진전이냐 후퇴냐의 기로 4‧13 총선
진전이냐 후퇴냐의 기로 4‧13 총선
  • 임종석
  • 승인 2016.04.05 0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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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대 손에…

최선이 없으면 차선이 최선

“지난번 선거 때 나는 최선은커녕 차선의 후보도 없어 투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통해 한 말이다. 듣기에 따라선 그럴듯하지만, 큰일 날 소리다.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인 선거권은 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의 대표적인 것이니, 그것은 국민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포기하는 것으로 국민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대통령이 마음 내키는 대로 나라를 주물럭거리든 정치가 오물투성이가 되든 어떠한 말도 할 자격이 없다.

최선이 없을 때는 차선이 최선이 되는 것이고, 차선이 없을 때는 삼선이, 삼선도 없을 때는 사선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고, 사람 중에 의인은 또 어디에 있는가. 그런 것,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실재하는 것 중의 가장 나은 것이 최선이다.

그놈이 그놈이라 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서 거기’라는 의미로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 같은 사고가 우리의 정신체계를 망가뜨린다. 어떻게 ‘50걸음’과 ‘100걸음’이 거기에서 거기라는 말인가.

백이면 백 사람, 천이면 천 사람의 얼굴 모양이 모두 다르듯이 저마다의 가진 성향이나 능력 또한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다 해도 다 다르다. 그러니 열 명도 채 안 되는 입후보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해도 1%는 날 것이고, 보통은 5%나 10%는 날 것이다. ‘티끌 모아 태산(積塵成山)’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1%의 작은 차이가 나라를 흥망성쇠(興亡盛衰)로 가르는 갈림길이 된다.

대통령이 됐건 국회의원들이 됐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정치에 혐오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차라리 두 눈을 딱 감아 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한다면 그 정치라고 하는 것은 더욱 괴물이 되어 갈뿐이다.

인물이 먼저냐, 정당이 먼저냐

흔히 나라의 일꾼은 인물을 보고 뽑아야 한다고들 한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아무리 똑똑하고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정당들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장점을 살려 일할 수 있게 내버려 두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라의 장래를 위한 바른말을 했다가 찍혀 나가는 사람들을 보아 왔다. 공천이라는 것도 일꾼으로서의 자질이나 자격보다는 칼자루를 쥔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보았다. 물론 인물을 보아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당 또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정당에 손을 들어 주어야 하는가. 없는 최선을 찾으려 하지 말고, 있는 중의 가장 나은 정당이나 후보를 최선으로 알아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 어느 정당이 얼마만큼 민주주의의 유지‧발전에 기여해 왔고,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투쟁)을 해 왔는가를 봐야 하고, 또한 민주화에 어떻게 역행했었는가도 봐야 한다. 그런 면에서의 현재는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바른 말을 하는 방송인들이 찍혀 나가는 것을 보아 왔다. 검‧경이나 국정원 등의 권력기관이 정권의 시녀노릇을 하는 것도 보아 왔다. 이 또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느 정권 때나 그랬다. 그런데 그 정도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다. 어느 정권 때 그런 현상이 더 심했는가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선거는 정책대결로 승부가 나야 한다고도, 공약을 보고 찍어야 한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말만은 전적으로 맞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는 선거 때마다 정말이지 화려하고도 폼 나는 공약들이 터져 나오는 것들을 보아 왔다. 경제민주화를 이루겠다, 소통의 정치를 하겠다, 서민을 위한 정치도 하겠다, 낙하산 인사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 뭣은 하고 뭣은 하지 않겠다, 하는 식의 공약들을 진정인양 쏟아 냈지만, 당선이 되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公約’을 ‘空約’으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이것이 정책이나 공약을 보기에 앞서 어느 정당이, 그리고 누가 조금이라도 더 정직한가를 봐야 하는 이유이다.

선택 때 봐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것들

지역구 국회의원의 대표적인 능력으로 예산을 끌어 올 수 있는 힘을 들기도 하지만, 필자는 이 같은 것들을 내세우는 후보자들을 볼 때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한다. 물론 무능하여 자기 지역으로 와야 할 예산까지도 빼앗겨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타 지역과의 형평성을 무너뜨릴 만큼 많은 예산을 끌어 오는 것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타 지역으로 갈 예산을 힘으로 빼앗아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기 지역에 이익이 된다 해서 그 같은 이기주의를 옳다 한다면 그건 도둑의 심보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얼마 전 알고 지내는 현직 교수 하나를 만났는데, 지인의 아들을 자기 학과의 시간강사로 썼다며 자랑을 했다.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좋은 일일까. 아니다. 좋은 일이기는커녕 나쁜 일이다.

시간강사 자리 하나 얻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힘없고 배경 없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자기 때문에 뒤를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어느 누군가가 자신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빼앗기고 억울한 눈물을 흘렸으리라는 것을 알고나 한 자랑이었을까 싶었다. 한 학과의 강좌 수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예산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니, 자기 지역으로 끌어올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예산을 자기 지역으로 끌어 온다면 다른 지역들은 그만큼 손해를 봐야 한다. 그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기주의자이지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가장 큰 민족적 숙원은 누가 뭐래도 무력 아닌 평화적 통일일 것이다. 그러니 어느 정당이, 그리고 누가 그에 합당한가도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권 때 남북 간의 갈등이 가장 심했고 덜했는가도 봐야 한다. 입으로는 평화통일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긴장을 고조시키며 북의 탓만 한다면 안 될 일이다.

국토의 균형발전도 시급히 해결해 가야 할 문제이다. 면적이 전국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에는 나라 인구의 절반이 모여 북적거리며 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방의 농어촌은 인구가 줄어 학교들이 문을 닫아 가고 있다. 가는 곳마다에 폐가가 널려 있고, 동네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인구뿐 아니라 모든 것이 수도권으로 집중되고 있다. 망국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의 책임소재도 가려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느 정당의 누가 더 적합한가도 봐야 한다.

스펙을 쌓게 해 주려고 고위 공직자로 임명했다가 선거 때가 되면 그만두게 하여 써 먹는 정권도 있다. 제 세력만 확장할 수 있다면 나라야 어찌 돼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할 수 있은 일이 아니다.

이번 4‧13 총선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났으니 벌써 만 2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인양조차 되지 않은 선체와 함께 해저의 어둠속에 묻혀 버린 참사의 진실은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도 야도 자기네가 제시한 것이 진실규명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왔는데, 이번 총선을 통해 그 진위를 따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어느 정당이 진실규명을 위해 더 노력했고, 어느 정당이 표면적으로는 규명을 원한다 하면서도 뒷구멍으로는 그것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려 했는가를 따져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표로 물어야 한다.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대한 옳고 그름도 가려내야 한다. 그것이 옳다면 그에 찬성한 정당에 표를 주어야 하고, 옳지 않다면 반대한 정당에게 표를 주어야 마땅하다. 물론 이 하나로 기표 여부를 결정할 순 없는 일이지만 참고로 해야 할 중요한 사안임은 분명하다.

전문 선거꾼들에게 속지 마라

선거운동의 막바지에 들면 어느 정당이 됐건 참신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몸부림을 친다. 재래시장을 돌며 서민들을 위하는 척하는 것은 이제 구태가 되었고, 서로가 조금이라도 더 참신해 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 안간힘을 쓰는데, 그런 것들과 당의 정체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당의 상징색이 빨강이든 파랑이든 노랑이든 그것도 당의 성향과는 관계가 없다.

겉으로 보여 주기 위한 선거운동기간 중의 언행들은 어느 정당이 됐건 당사자들의 어두운 내면을 가리기 위한 가면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전문 선거꾼들에게 속기 쉬우니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한다.

유권자들 모두가 다 그렇지만 특히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는 선량들을 뽑는 데에 무엇보다도 큰 비중을 가지고 봐야 할 것이 있은데, 그것은 어느 정당이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서민들 편에 더 가까이 서 있느냐이다. 예수께서는 부자보다 과부와 같은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셨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부자들의 편도 가난한 사람들의 편도 아니시다. 그게 누가 됐건 옳은 자들의 편이시다. 그가 누가 됐건 하는 일이 옳으면 잘했다 칭찬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악하다며 꾸중을 하신다.

크리스천은 그것을, 그러니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어느 것이 조금이라도 더 성경적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할 수 있어야 지혜로운 사람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독자 여러분께 우문(愚問)이 분명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다. 입후보자들 가운데에 크리스천이 한 사람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게 편으로서의 가재가 될 것인가.

어느 때였던가, 대선에서 우리는 장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자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의기투합하는 것을 보았다. 특히 대형교회에 그 같은 현상은 두드러졌다. 어쨌든 그 장로라고 하는 분은 당선이 되었지만, 그분에게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는 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됐건 국회의원이나 지방 자치단체의 일꾼이 됐건 선거를 통해 그들을 뽑는 건 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신, 불신이 표를 주어야 할 요소는 되지 못한다. 물론 크리스천으로서의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교회가 세속화되어 세인들의 지탄을 받을 지경이 되어 버렸으니 믿는다는 것이 표의 향방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옳은 일도 상대방이 하면 그르다 하고, 그른 것도 자신이 속한 집단이 하면 옳다 하는 것은 악한 것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나의 소중한 한 표를 조금이라도 덜 그르고 조금이라도 더 옳은 쪽에 주어 크리스천으로서의 길을 걸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번 총선의 공천과정에서 막장 드리마보다 더 막장 같은 일들을 보았다. 어느 한 정당도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올바른 공천을 하지 못했다. 이에 많은 국민들은 정치에 혐오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선거를 외면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치를, 나라를 더욱 나빠지게 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어느 쪽인가는 단 1%라도 나을 것임이 분명하다.

정치는 비뚤어졌어도 투표는 바로 하자

임종석 / <당당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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