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맞서라! 그러면 웃게 되리니
신에게 맞서라! 그러면 웃게 되리니
  • 김기대
  • 승인 2016.04.08 0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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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영화 [사울의 아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 중에 <사울의 아들>(라슬로 메네스 감독, 2015)은  가장 불편한 영화다. 영화의 비율, 카메라의  초점,  스토리 등이 모두 낯설다. 헝가리 출신의 라슬로 메네스 감독은 2016년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이병헌이 수상자를 발표했다) 수상을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그의 첫 작품으로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무엇이 이 불친절하고 대충 찍은 듯한 작품을 명작으로 만들었을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거우면서  신선하다.  아우슈비츠에 끌려 오는 유대인 수용자들을 가스실로 안내하고 죽은 뒤 시신을 처리하는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들은 수용자들 중에 선발된 유대인들이다.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유대인들도 지옥을 경험하지만 존더코만도들의 일상도 지옥이다. 단지 그들의 생명이 몇 개월 연장되었을 뿐인데 그들은 조금 더 살기 위해 동족이 당하는 참상의 현장에서 나치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표정이 없는 이들이지만 죽은 자들의 옷에서 금붙이를 챙기고 음담패설을 나눈다.

주인공 사울은 존더코만도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동족들을 가스실에 몰아 넣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뒷정리를 하는 그에게 책임자는 가스실 벽에 귀를 대고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을 듣게 한다. 철문이 열리면 가스실 안에는 수 백구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 때 10대 소년 하나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고통을 호소했다. 존더코만도들에 의해 검시관에게 옮겨진 소년은 질식사를 당한 뒤 부검실로 옮겨진다.  사울은 포로 신분인 부검의에게 가서 시체를 넘겨달라고 한다. 가스실에서 살아 있었던 소년이 자신의 아들인데 이 아이만큼은 구덩이 던져져 불태워지게 둘 수 없고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소년은 정말 사울의 아들인가?

죽은 아이 옆에서 유대교 기도문을 암송하는 정도는 허락할 수 있다는 부검의의 대답은 상당한 배려이지만 사울은 동의하지 않고 아이의 장례식을 집례할 랍비를 찾아 나선다. 사울의 랍비 구하기와  존더코만도들의 탈출 시도가 함께 전개 되면서 사울은 탈출모의를 하는 자들과 함께 한다. 랍비가 집례하는 장례식이라는 종교적 목표와 탈출이라는 세속적 목표가 ‘사울의 아들’을 통해 만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장례식을 고집하는 사울 때문에 탈출 계획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사울 때문에 애먼 사람이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보통의 영화 문법으로 보면 아들 장례식을 위해 다른 사람을 곤경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울의 행동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과 삶의 구분이 별 의미가 없는 수용소 공간에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사울의 행동을 윤리적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

그런데  잠시 죽음이 유예되었던 아이는 사울의 아들이 아니다(아들이다 아니다 논쟁이 많지만 그 사실이 중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영화는 실제 아들이 아니라는데 초점을 둔다). 그러면 왜 사울은 아이의 장례식에 집착하는가? 수용소에서 유대인 시체를 부르는 ‘토막’이라는 표현은 독일군이나 존더코만도가 하고 있는 일의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사물’임을 보여주는 기표다. 라캉의 말처럼 기표와 기의가 단절되어 있는  생생한 현장이다.

기표(記表, 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signifié 시니피에)는 소쉬르 언어학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나무’를 예로 들자면 ‘나무’라는 말은 기표이지만 우리가 나무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의미는 ‘기의’다. 즉 기표를 통해 기의에 도달한다. 하지만 라캉은 이를 뒤집는다.  기표와 기의는 단절된다. 기표는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지만 기의에 도달할 수는 없다. 영화에서 기표 ‘토막’은 결코 나무 토막의 의미로 이해될 수 없고 토막을 처리하던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생명’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토막을 처리하던 사울은 토막들 사이에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토막 처리반이 아니라 사람이 죽어가는 지옥 한 가운데 자신이 서 있음을 알아 차렸다. 이제 랍비의 입회 하에 ‘사람’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

여기서부터 대부분의 영화 평론가들이 영화를 놓치기 시작한다. 사울의 행동을 죽음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아이의 죽음만이라도 고결하게 처리해 주려는 종교적 의도라고 해석한다. 랍비에 집착하는 사울의 행동이 그런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는데 유대교 장례 규정에 랍비가 꼭 입회해야 할 이유가 없다. 누구라도 기도문을 외워주면 된다. 게다가 아들의 이름을 묻는 부검의에게 사울은 아들의 이름을 ‘아우스랜더(Auslander)’, 즉 이방인이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 사울이 아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면서 스스로 선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죽음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아들 죽음만에라도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주제 의식을 <사울의 아들>이 갖고 있다면 그저 그런 영화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면 왜 사울은 그토록 랍비를 찾아 헤매었을까? 그는 자신이 처리하던 시신들이 토막이 아니라 생명임을 신에게 항의하고 싶었다. 이 지옥을 외면하지 말고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똑바로 보라고 신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내내 사울은 정면을 응시하지 않는다. 다른 영화들과 달리 주인공 사울의 등이 보이는 장면도  많다. 출애굽기 33:20 이하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등을 보인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었다고 성서는 설명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그 민족 앞에 다가올 시련을 회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대타자의 시선을 외면하려는 듯 사울이 등을 돌린다.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등을 보이는 장면은 이 지옥을 허락한 대타자로서의 신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사울의 심정과 닿아 있다. 또한 감독은 흐릿한 영상을 제공한다. 이는 선명함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희미하고 모호하게 응시하라는 지시다. 수용소 공간에서 신의 섭리와 개입은 모호하다.  이처럼 수용소 안에서는 어떤 일도 의미를 갖지 않기에 선명하게 묘사할 수 없다.

그런데 ‘토막’이 아닌 ‘사람’의 죽음 앞에서 신에 대한 사울의 분노가 폭발한다. 신과 맞서기 위해 자신과 자신을 도우려는 이들의 죽음도 개의치 않는다. 이제 ‘랍비’라는 기표를 빌어 신에게 지옥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어 한다. 첫 번 째 랍비는  기도문만 암송해줄 수 있다는 선에서 타협을 제안하고 배교의 경험이 있는 두 번 째 랍비는 사울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수용소 탈출에 성공한 존더코만도들과 함께한 사울은 아들의 시체를 둘러 매고 세 번 째 랍비를 탈출 행렬에 포함시킨다. 사울은 아들을 묻으면서 랍비에게 기도문을 부탁하지만 랍비가 아닌 그는 강을 건너 도망가고 사울은 다시 시체를 매고 강을 건너다가 시체를 놓쳐 버린다. 훗날 민족을 구원할 아기 모세는 나일강에 떠내려갔지만 지금 떠내려 간 ‘아들’은 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저항의 도구였다.

그러므로 사울은 장례식을 종교적으로 치르기 위해 랍비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다. 종교적 ‘의미'(기의)를 가진 랍비가 아니라 도구(기표)로서 랍비가 필요했을 뿐이다. 사울은 끝까지 모든 의미를 생산해 내는 ‘상징계’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강을 건넌 탈출자들은 헛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곳에서 사울은 동네 아이와 마주치면서 처음으로 환한 웃음을 짓는다. 시신을 물에서 놓침으로써 신과 맞서려 했던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는 지옥 밖에서 한 아이와 눈을 마주침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헛간에서 만난 아이는 물에 떠내려간 아이의 환영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 엔딩 크레딧에서 사울의 아들을 맡은 배우로 두 명의 이름이 나온다.

참혹한 역사에 개입하지 않는 신을 역사 속으로 소환하려는 사울의 시도는 용감했다. 그 시도는 비록 실패했지만 새로운 아이의 출현으로 그가 맞섰던 신이 준비하는 새로운 세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제 죽어도 좋다.  충분히 용감했다.  

이 글은 <뉴스B>에도 함께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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