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은... 없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없다
  • 강만원
  • 승인 2016.04.10 0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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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강만원 ⓒ <뉴스 M>

신약성경의 가장 감동적인 세 일화,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간음한 여인',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차례대로 '선행',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견인)'이다. 물론 그런 해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자의 의도에 초점을 맞춰 '문체론적 관점'으로 해석하면 타성적으로 생각하던 것과 다른 메시지를 만난다. 표층적인 메시지와 심층적인 메시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 일화 가운데 우선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전통적인 오류'를 먼저 지적한다. 아마 성경을 통틀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만큼 연극이나 영화, 그리고 문학 작품 등 다양한 예술 매체를 통해 세상에 널리 소개된 구절도 없음 직하다. 실제로 작품과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조차 제목만 봐도 이미 '선한'이라는 수식어를 통해서 주제를 어렵지 않게 간파한다. 작품 구성과 상관없이 결국 '선행'을 강조하는, 이를테면 도덕적인 교훈이라는 섣부른 판단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등장인물이나 그런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는 단순히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었을 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대에 성경 독자들이 등장인물인 사마리아인으로부터 자신들이 받은 감동에 따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자의적으로 명명했다는 결론이다.

화자가 사용하지 않았고 저자 역시 기록하지 않은 '선한'이라는 수식어가 마치 본래 있었던 낱말처럼 사용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독자들의 인상에 사마리아인의 '선행'이 강렬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즉, 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가 느낀 주관적인 감동으로 본문의 메시지를 '사마리아인의 선행'으로 단정했다는 것이며, 이는 결국 해석의 오류를 일으킬 수 있는 '자의적인 해석'에 기인한다.

문체론적 분석은 메시지를 전하는 저자의 의도에 주목한다. 저자가 글을 쓰면서 특정한 단어, 문장, 문법, 나아가 특정한 인물과 장소, 배경 등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지를 구성하는 '내면적인 의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었던 이유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며 구원에 관해 물었던 한 율법사의 의도적인 질문, 이른바 '시험'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율법사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서 겸손히 물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질문했다는 성경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율법사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이자 선생으로 율법의 전문가이다. 그런 자가 율법을 몰라서 예수에게 물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는 '반문법'으로 율법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물었고, 이에 율법사는 '셰마 이스라엘'로 널리 알려진 신명기 구절로 자신 있게 대답한다. 율법을 신성시하는 유대인이라면 너나없이 암송하는 구절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계명'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는 이 계명을 실천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자, 율법사는 "누가 이웃이냐"고 다시 묻는다.

그는 '이웃'의 사전적 정의를 묻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율법에 따라 사랑을 실천할 대상이 '선민' 유대인 외에 과연 누구냐는 반문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말하는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서 율법사가가 물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이웃은 오직 유대인뿐이라는 율법주의(선민의식)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질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마리아인'은 여기서 제시된 비유로, 율법사가 알고 있는 이웃의 정의를 뒤집는 완전한 반전이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했다는 것은, 누가 '이웃'인지 율법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은 '개'나 '돼지'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이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웃'의 정의에 대해 율법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유대인이 율법에 따라 사랑을 실천할 대상은 오직 선택받은 유대인이라는 '선민의식'이다. 그와 동시에 율법사는 이방인이나 세리, 죄인과 가까이 지내는 예수의 율법에 반하는 태도를 은연중에 비난하고 있다.

율법을 안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율법사의 무지와 외식을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는 진정한 이웃의 개념에 대해 다시 설명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웃'이라고 말하기 위해 사마리아인을 비유로 제시한 것이다. 메시지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 화자의 의도적인 선택, 다시 말해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의 특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10:30-32)

단순히 '어떤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간 것이 아니라 유대 율법주의의 '최고봉'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하여' 지나갔다는 서술, 즉 제사장과 레위인을 특별히 선택한 화자의 의도가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를 파악하는 키워드가 된다.

'셰마 이스라엘'을 매일 암송하며, 사랑의 이중 계명을 율법의 최고 계명으로 인정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었지만, 정작 그들은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그들은 절대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기에 앞서 부정한 시체를 만질 수 없는 율법의 조문, 이른바 유대 '정결 의식'을 먼저 떠올린다.

시체를 만지는 자는 부정한 자라는 율법 조문의 족쇄가 그들로 하여금 사랑의 절대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가로막은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이 개나 돼지로 취급하며,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더럽다고 경멸했던 사마리아인은 '피하여 멀리' 지나간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돌보아 주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눅10:33-34)

예수는 영생의 조건으로 '도덕적인 선행'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예수는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함정을 놓았던 율법사에게 대답하면서, 유대인의 대표상징인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악역을 맡기며 일부러 갈등을 부추길 이유가 없다. 또한, 유대인들이 개나 돼지로 여겼던 사마리아인을 선행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킬 이유도 없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그 대척점에 사마리아인을 배치시킨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선택이며, 여기에는 화자의 특별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혈통적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웃'이며 형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 즉 '영적 이스라엘'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백성이라는 새로운 규범을 제시한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찾았던 장면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의 의미에 대해 분명한 정의를 내린다.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나의 어머니이며 형제이니라."

예수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말하면서 실제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의 외식을 꾸짖으며, 예수와 함께 시작하는 새 언약 세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를 말하기 위해서 '이웃'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처럼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강조하는 '도덕적 메시지'가 아니라,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 메시지를 설파하는 것이다.

신약시대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새로운 언약 시대이다. 신약성경의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는 '도덕적 선행'이 아니라, '믿음의 순종'을 강조하는 신앙적 메시지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혈통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예수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들 수 있다"며 선민의식의 오류와 율법주의의 외식을 엄히 꾸짖는다.

요컨대 예수 시대는, 혈통적 유대인이 아닌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영생'의 구원이 있다고 율법사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온전히 순종하는 자를 말하고 있다.

"화있을진저, 너희 외식하는 자여!"

강만원 / '아르케 처치' 대표,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저자, <루나의 예언> 역자, 종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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