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해보지 못한 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년(?!)
  • 지성수
  • 승인 2016.04.13 06: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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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교회 안 나가는 목사 이야기 (8)

도올이 구약을 거시기 해야 한다고 한 말씀 하셨다. 구약에서 기록된 율법을 지킬 때 내려지는 축복과 지키지 않을 때 내려지는 저주는 개인의 흥망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 공동체가 잘 굴러갈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쪽박을 차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모를 리 없는 도올이 구약을 거시기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 교회에서 구약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뼈다귀 빼고 고기 빼고 나면 설렁탕을 무슨 맛으로 먹겠나?

인도인과 이야기하다가 매우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내가 간디를 입에 침에 마르게 칭송을 했는데도 반응이 매우 시큰둥해서 사람 무안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이상해서 인도인들을 만날 때마다 캐묻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인도가 어떤 나라인가? 종교 백화점 같은 나라가 아닌가? 워낙에 종교적 천재가 많은 나라이다 보니 간디가 그저 우리나라의 백범 김구 선생처럼 훌륭한 정치가로 존경받는 정도일 뿐 바깥세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의 성역화된 현충사처럼(박통에 의하여 많이 뻥튀기되었다가 지금은 거품이 많이 빠졌지만) 거대한 기념 시설도 아닌 조그만 기념관이 하나 있는 정도란다. 다시 말하면 간디의 사상은 보통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되는 부분이 없기도 하고 도대체 그의 사상은 너무 어렵고 고상해서 보통 사람들이 따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현실과 적당히 절충되어 현실적인 느낌이 있어야 종교로서 생명력이 있는 법인데 간디의 사상은 마치 고상하기만 한 철학처럼 현실적인 접촉점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날 예수는 그가 태어난 나사렛에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던 대로 회당에 갔다. 예수는 이사야의 예언서 두루마리를 펴서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시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4:18-19)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예수가 이 본문을 읽었을 때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꼭 본문에 나오는 '나'가 바로 방금 두루마리를 읽었던 예수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의 첫 활동을 희년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다. 희년이란 복 희(喜), 혹은 길할 희(喜)에 해 년(年)을 쓴 것이다. 한자의 뜻을 풀어 보면 복된 해, 길한 해라는 뜻이다. 

어릴 때 하던 놀이 중에 땅따먹기라는 놀이가 있다. 땅바닥에 둥그렇게 원을 그린 다음에 각자가 자기 손의 길이만큼 반원을 그려서 자기 집을 정한다. 처음에는 손바닥의 길이만큼 밖에 차이가 없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차이가 벌어져 나중에는 상대편의 집까지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게임을 끝내고 싹 지워 버리고 다시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희년인 것이다.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해서 팔렸던 땅과 집이 본래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가고, 종이 되었던 사람들이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제로 납치되어 끌려온 자들과 정치적 이유로 옥게 갇힌 사람들이 풀려나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하고 어떤 이유에서건 몰수된 땅을 다시 그 가문의 기업으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세상에! 얼마나 좋은 년이냐?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생각만 해도 황홀한 이 년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년(年)이 되었다.

희년이라는 말이 처음에 나온 것은 구약성서 레위기였다. 그러나 이 희년법은 다른 율법과 같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나왔을 때 즉, 광야에서 제정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패망해서 포로생활을 하고 돌아왔을 때 비로소 제정되었다. 그렇다면 처음에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벗어났을 때는 없던 희년제도가 왜 나중에 생겼을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좋은 제도는 그냥 심심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고 굳게 믿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손들고 반성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의 균형이 깨진 것이 결국 멸망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어째서 그 좋은 법이 한 번도 시행이 되지 못했을까? 희년 운동을 벌이고 나선 주체는 오랫동안 종살이를 하고 돌아온 레위인들 중에서도 가난한 레위인들이었다. 

요즘 성직자 사이에서도 빈부의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듯이 당시의 성직자에 해당하는 레위인 사이에도 빈부의 차이가 컸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먹고 살만한 대 교회 목사들이 아니라 가난한 개척 교회의 목사들이 희년을 주장하고 나서고 이에 가난한 대중들이 동조를 하고 나선 셈이다. 

즉, 희년 운동은 가진 자들 편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희년은 지켜지지 않았고 갈가리 갈라진 이스라엘은 패망하고 말았다. 마치 환경운동을 열심히 하지만 공해는 계속 증가해서 멸망의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는 지구의 꼴이다. 인간은 더 이상 희년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 

반면에 제사를 드리는 성막제도는 구약 시절에도 목숨 걸고 지켜졌고 지금도 성막을 재현하면서 우려먹는 목회자들이 많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국물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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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해본년 2016-04-17 00:06:18
지성수씨 내용과 제목이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 묻고 싶네요..
제가 욕정에 눈이 멀어서인지 성적인 생각이 우선 들고 자극적인 제목으로만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