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구속'과 '부활 복음'의 우선순위?
'십자가 구속'과 '부활 복음'의 우선순위?
  • 강만원
  • 승인 2016.04.23 06:50
  •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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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무의미한 논쟁, 이제 그만하자...!
강만원 ⓒ <뉴스 M>

과연, '십자가 구속(론)'과 '부활 복음(론)'의 우선순위나 우월성을 두고 서로 치고 박으며 그토록 험악하게 싸울 일인가? 예수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완전한 제사'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께서 탄생, (공생애)사역, 죽으심,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신 구원의 복음을 온전히 믿을 때, 비로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고 성경에 이른 그대로 간단히 말하면 되지 않는가.

'십자가 구속'과 '부활 복음'은 모두가 '구원의 전제'로서, 결코 대립되거나 모순일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부활 복음'이라는 말이 부활만을 복음의 전부인 양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복음의 완성이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구속 없이 구원 없으며, 구원은 반드시 구속을 전제한다. 그러나 사회구원도 결국 개인 구원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는 의미에서, 구원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얻는 신앙의 결실이라면 엄밀히 말해서 '구속'과 '구원'은 다르다. 구속의 올바른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류의 죄를 씻었다'는 말이며, 사전적인 의미에서 '구속救贖'은 '대속代贖'과 동의어이다.

자신의 '몸'을 '대속제물'로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제사'를 성경은 '완전한 제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제사는 '완전한 구원', 이를테면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개인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구원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구속은 영생의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능력인 동시에,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구속이 그 자체로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론에 앞서 미리 말하면, 완전한 제사는 구약시대에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불완전한 제사'와 구별하는 이름이며, 그것이 '완전한 구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대속으로 성소의 휘장이 갈라졌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개개인이 이미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구약시대처럼 제사장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만인'이 각각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신약시대는 우리들 자신이 이른바 '만인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만났고 전적인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들,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의 순종, 그리고 개인적인 믿음의 결단이 없다면 성소의 휘장이 갈라졌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옛날에, 거기서' 우리의 '구체적인 죄'가 모두 용서받은 것이 아니다. 만약에 대속으로 인해 이미 죄를 용서받고 영생의 구원에 이르렀다면 2000년이 지난 오늘, 새삼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없다. 그래도 신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기독교 신앙을 '구원 신앙'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철학'에 일치하는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대속의 보편적인 은혜를 넘어서, 개별적인 믿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지만, 2000년 전의 대속이 그 자체만으로 2000년이 지난 '지금, 여기서' 우리의 완전한 구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부활의 능력이 아무리 위대한들 십자가 대속으로 예수께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하나님과 죄인인 인류가 '아버지와 아들'로서 온전히 관계를 '회복'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신분으로 감히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 죄로 더럽혀진 자가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다.

구약시대에 속죄제를 드리는 대제사장도 짐승의 피로 자신의 죄를 먼저 속죄한 다음에 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의 죄를 속죄할 수 있었다.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를 더럽힐 수 없으며, 성소를 더럽히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는 대속제사의 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고, 그로 말미암아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로 말미암아 마침내 '영생의 구원',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구속과 구원은 불가분의 관계일망정 동의어는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논쟁에 좀처럼 끼어들지 않는다. 각자의 주장에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 때문에 틀렸다고 함부로 단정하기 전에 다른 생각들을 다른 관점에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과 부활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이 마침내 파당을 지어 서로 이단이라며 물고 뜯더니, 이제는 '성명전'까지 펼치는 진흙탕 싸움을 보다 못해 한 마디 한다. 독자들이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신앙에 도움을 얻기는커녕, 혼란만 가중될 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을 변론하기 위해서 '다른 복음'을 끌어들이면서 마치 "십자가가 구원의 완성이기 때문에 '부활 복음'을 믿지 않는다"거나, "부활이 복음의 완성이기 때문에 십자가 대속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면, 서로에게 이단의 낙인을 찍을 것도 없이 모두가 '쌍방 이단'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는 완전한 제사로서 분명히 '대속제사'이지만,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구속救贖'만으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영생의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2000년 전의 대속이 오늘날 우리의 실제적인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고 '영접'해야 하는 명백한 전제前提가 있다.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다 보니 이제 이전의 주장들까지 끌어들이며 인신공격마저 마다하지 않는다. 한쪽에서 말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육신도 썩었다' 주장에 대해 격한 반론이 제시되면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한쪽의 주장은, 예수도 육신을 지닌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에 죽은 그의 육신도 음부(무덤)에 있었던 '사흘 동안' 마땅히 썩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쪽의 주장은 성경에 분명히 예수의 육신이 썩지 않는다고 기록되었다며, 예수의 몸이 썩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적인 해석인 동시에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부활의 능력이 아무리 위대한들 십자가 대속으로 예수께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하나님과 죄인인 인류가 '아버지와 아들'로서 온전히 관계를 '회복'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신분으로 감히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시16:9-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7절)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1)

적절한 번역이 없어서 그대로 쓰면, 이런 경우를 두고 'proof-texting'이라고 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또는 자의적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텍스트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일탈'을 일컫는 언어학적 용어다. 실제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는 구절을 보면 예수의 육신이 썩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사실인즉, 거룩하신 예수의 육신이 썩고 부패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예수를 그리스도로, 거룩한 신성을 지니신 우리의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이 어쩌면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심히 거리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분명히 말해야 한다. 예수의 육신이 죽은 다음에도 썩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육신이 아니며, 인간의 육신이 아니라면 예수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결국 예수의 인성을 송두리째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의 '허울'만 쓰셨을 뿐 사실은 인간이 아니었다고 '누군가' 말했던 것이 아닐까?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며 인성을 부정하는 이런 '거룩한'(?) 주장을 들어본 기억이 없는가?

이는 기독교 역사 이래 가장 대표적인 이단인 '영지주의'의 대표적인 주장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심지어 예수가 '월경이 없는' 정결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며, "마리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한 동정녀'이다."라는 허무맹랑한 주장까지 서슴없이 내뱉는다. 외경서 '베드로 복음'을 보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시기는커녕 제자들을 보며 싱긋 '웃으셨다'고 한다. 신성을 지니신 예수에게 십자가의 처참한 고통이 있을 수 없다는 영지주의의 신념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앞둔 겟세마네의 기도가 가증스런 '쇼'이며, 자기를 낮춰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시기 위해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성경은 허구가 된다. 결국 성경은 '픽션'으로, 어디선가 말했듯이 '재미있는 이야기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오래 전에 '예수의 특별한 신성'이라는 주제로 내가 말했지만,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전지전능의 신성을 드러내시기 위함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실 하등의 이유가 없다. 구약시대에 익히 보았던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이 하늘에 그대로 계시면서, 때로는 선지자를, 때로는 천사를 보내시고, 때로는 꿈과 이적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면 되지 않는가?

예수의 육신이 죽은 다음에도 썩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육신이 아니며, 인간의 육신이 아니라면 예수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결국 예수의 인성을 송두리째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하신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명백한 이단이다. 그러나 신약시대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특별한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전지전능의 초월적 신성을 계시하시기 전에 세상의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새로운 언약'을 맺기 위함이다. 그리고 신약시대 '새 언약'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생명의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는 신약시대 새 언약의 백성에게 '새 계명'을 주셨으며,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절대계명이다. 예수의 특별한 신성은 전능의 초월적 신성 이전에 온전한 사랑이라는, 인간의 몸으로, 그리고 인간의 삶으로 예수께서 계시하신 '실존적 신성'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전지전능의 '본'을 보이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지닌 자가 아니다. 예수가 본을 보이신 것은, 인간의 비천한 몸으로 오셔서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매시며...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오롯이 사랑을 실천하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시며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해서 예수는 기꺼이 살을 찢기며 피를 흘리는 처절한 육신의 고통을 감당하신 것이다. 요컨대 예수의 인성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 신앙은 허구이며, 더 나아가 '종교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라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면, 그리고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었다면 예수의 시체는 응당 썩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의 육신이 썩고 부패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금요일오후에 죽으신 예수를 일요일 새벽에 부활시키셨다(예수가 스스로 부활하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부활시키셨는가 하는 논쟁은 다음으로 미룬다). 우리의 육신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썩고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몸이 썩고 부패해서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끔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강만원 / '아르케 처치' 대표,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저자, <루나의 예언> 역자, 종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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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본질 파악 2016-04-23 11:42:00
강만원 목사님은 김성로 목사님의 부활복음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잘못 잡으신 것 같습니다. 바른믿음 최근 글을 보니까, 김성로 목사님의 부활복음의 핵심은 십자가로는 부족하고 부활하여 다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김성로 목사의 이론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의 증거들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강만원 목사님은 이 내용을 보시고 다시 글을 쓰시면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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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나라 성막에 들어가셔서 다시 제사를 드려주어야만, 이 땅의 제사는 순간적인 효력밖에는 없지만, 예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늘나라 성소에 들어가시게 되면 순간적인 죄사함이 아니라 영원한 죄사함이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김성로 목사, ‘부활복음세미나 1’, 인터넷 영상)

“그래서 제가 하늘나라의 참 장막을 딱 인지하고 나니까, 영원한 제사! 이게 인지되니까, 부활이 안 되면 구원이 없구나! 부활이 안되면 죄사함이 이루어질 수가 없고, 죄는 그대로 있을 수 밖에 없는 거구나! 이것이 너무나 확실한 가운데 이루어진 줄 믿습니다. 왜 부활을 꼭 해야하는지를 이야기해 주는 10장을 봅시다. 12절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이 분이 승천해서 곧 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은 것이 아니라 참 장막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은 줄 믿습니다.” (김성로 목사, ‘부활복음세미나 1’, 인터넷 영상)

“제가 이것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십자가에 딱 붙들려 있으니까 ...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야 할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부활하여서 하늘

TO: 강만원 님 2016-04-24 00:55:50
강만원 님의 글에  “그러나 있는 그대로 분명히 말해야 한다. 예수의 육신이 죽은 다음에도 썩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육신이 아니며, 인간의 육신이 아니라면 예수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강만원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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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기서 강만원 님은 “예수님의 시체가 썩었다”고 분명히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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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석서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석서는 말하기를 “시체가 썩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망에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고로 성경이 말씀하는 “섞지 않았다”에 위배된다.
.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시16:9-10)
.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7절)
.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1)
.
또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는 말씀에도 위배되는 강만원의 주장이다.

고로 강만원 님은 “썪었다”는 성경적 오류/ 즉 신학적 오류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더우기 강만원은 새롭게 아르케처치를 주도하기에 몹시 걱정된다.
그러한 신학적 오류를 지닌 체, 무슨 아르케교회 운동을 주도하겠다는것인지
몹시 우려되고, 성경을 제대로 볼 줄 모르면서… 이러니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지난 번에 무슨 글을 올렸을 때도 자기 마음대로 글을 올렸기에 가만히 두고 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끼어들어 신학적오류/ 성경적 오류를 드러냈으니 오호 통제라 !!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텐 데…. !!
아르케교회 운동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지원들을 받을 수 있으련만 !!
앞으로 강만원 님이 이끌 아르케운동의 앞 날이 심각히 우려된다.

성경이나 제대로 알고 아르케운동을 하던지 하시길.

피닉스 2016-04-24 06:19:34
예수님의 성정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면서 예수를 끝내 인간의 모습으로 보는 어리석음이 강만원님의 실체를 보여 주는 것 같아 조금은 그동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많은 실망이 갑니다. 예수님은 이미 인간으로 오시기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 인간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인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 뿐이지 인간을 이해하거나 인간의 인생과 같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순간부터 이미 신성으로 돌아가셔서 인간세계 육신의 모습은 이미 끝난 것인데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기에 동굴에 있는 시체가 썩었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할 말이 아닌 망발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3일 후 안식일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향품을 갖고 무덤에 들어갔을 때 무덤에 흰옷 입은 청년이 우편에 앉아 있다고 했는데 시체가 썩었다면 그 무덤에 썩은 냄새가 진동을 했을 텐데, 흰옷을 입은 청년(예수)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강만원님 말이나 정이철님 말이면 인간적으로 시체가 썩어 있어야 하는데 썩어있기는커녕 흰옷을 입고 계셨다, 당신들은 이것은 어떻게 설명을 하실까요,
소설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누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겠습니까?ㅎㅎㅎ
너무나 극히 눈앞의 3차원적인 인본주의 생각이 이시대에 판을 치니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건 당연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강만원 2016-04-24 09:32:42
<시체가 썩었다>는 말과 <썩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았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보십니까? 예수는 <완전한 신성>과 동시에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인성은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고통과 슬픔, 분노와 기쁨, 심지어 죽음까지 겪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 이상으로 인성을 부정하는 것도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을 감히 이단으로 몰기 전에 자신의 신앙을 먼저 점검해보라는 말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문자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상황적 문맥에 따라 예수께서 돌아가신 배경을 고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근방에서 유월절에 돌아가신 예수의 몸은 - 다른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이지만 - 불과 하루 반 만에 절대로 썩지 않습니다. 더욱이 서늘한 무덤 안에서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예수의 몸이 썩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았다는 말은 <회색 신앙>이 아니라 썩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은 <썩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덧붙여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은... <익명>이라는 보호막의 뒤에 숨어서 비방이나 조롱, 심지어 인신공격을 일삼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주 비겁한 짓입니다... 저와 논쟁을 하고 싶은 분은 실명과 소속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밝히시기 바랍니다.

강 선생님께! 2016-04-24 10:58:06
시신은 일반적으로 3알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부패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신 몸이 무덤에서 계신 시간은 실질적으로 이틀 정도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들이 죽었을 벌어지는 일이 예수님의 몸에서 벌어졌다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죽어도 부패되지 않는 몸이라면, 어찌 우리와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사도행전을 다시 보니 다윗은 썩었고, 예수는 썩움 당하지 않는다고 비교되었습니다.
핵심은 부활이지, 죽어도 산 사람과 같이 몸이 보존돤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불신앙도 나쁘고 미신도 나쁩니다.
강 선생님의 말씀이 성경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