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를 보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그 시를 보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 이계선
  • 승인 2016.04.23 0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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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링컨 생가'와 '백두산 들쭉 밭'

봄 길을 걷다 들어오니 집안에 소포가 기다리고 있다. 이메일 시대에 팬으로 주소를 눌러쓴 우편물이라서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얼른 뜯어보니 예쁜 시집이 들어있다. 캐나다 시인 석천 이상묵이 쓴 '링컨 생가와 백두산 들쭉 밭'. 아내가 반가워한다.

"여보, 몇 년 전 돌섬을 다녀간 적이 있는 석천 이상묵 시인이 시집을 보내왔어요."

겉표지가 아름다웠다. 우리 부부는 앨범을 보듯 페이지를 넘겼다. 페이지마다 예쁜 컬러 사진이 숨어 있었다. 215개의 작품이 300페이지에 가득 차있다. 전에 출판한 시집 "링컨 생가에서"와 "백두산 들쭉 밭에서"의 전 작품을 옮겨 실었다. 거기에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따라다닌 이야기, 이민 살이, 그리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감탄한 문화 기행도 시로 적었다. 서울공대를 나온 공학도답게 편집이 완벽했다.

책을 받은 그날 밤 새벽 3시가 넘도록 여기저기를 찾아 대충 읽었다. 그 후부터는 피곤하거나 그리우면 누워서 천천히 읽는다. 우선 시 2편.

링컨 생가生家에서

링컨의 영혼은 
본향으로 갔겠지만 다 
옮겨갈 수 없는 것들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새들이 떼 지어 나르고 있다 
옥수수 우거진 켄터키 
벌판에 흑인들 보이지 않고 
디트로이트 다운타운 
주유소 철망 유리 속에 백인 한사람 
몸 숨기고 새 모이통만한 틈새로 
흑인들의 돈을 거두어 들인다 

거스름 동전 속엔 
링컨의 초상 
노예 시절 목화농장 
목화 꽃 꼭지같은 잇몸 드러내며 
탱크에 채워지는 휘발유성 자유만큼 
그들은 잠시 당당해 하지만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자본의 
세상에서 언제나 
알 수 없는 이윤의 크기 
손바닥에 던져지는 
일전짜리 속에는 Liberty라는 단어가 
양각돼 있다.

<현대시> 1992년 9월호에 게재

절구를 생각하며

들어갈수 없을까 
그 절구 속으로 
나는 다시 결코 들어 갈 수 없을까 

절구에 가득 보리를 넣고 
어머니는 공이를 내리치면서 
날 보고 보리를 저으라고 하셨다 

빨라지는 공이질 
넘쳐나는 소용돌이 
자꾸만 보리알들 흩어지면서 
나는 끝내 밖으로 새고 말았다 

아, 그게 몇십 전 일이던가
어머니가 노기 띠며 나무라던 것이 
낯선 땅에 떨어진지 벌써 까마득 
보리 톨 하나가 그리도 아까웠었는데 

그러나 이제야 알겠어요 
어머니 

공이에 얻어맞아 알갱이 되고 
보리끼리 부대끼며 껍질 벗는다는 것을 
그리고 또 
잔돌과 섞였으니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문학과 비평> 1988년 가을 호에 게재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고 흑인 슈퍼스타들이 스포츠를 점령하고 있다. 그런데도 '링컨 생가에서'를 읽으면 슬픔이 밀려온다. 노예처럼 고생하는 흑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디 흑인뿐 인가? 우리 모두가 삶의 줄에 매어 끌려 다니는 노예들인 것을!

'절구를 생각하며'는 더 절박하다. '쭉정이는 가라'고 외치다 죽은 민주 시인 신석정 생각이 난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평생 절구를 찧으셨다. 자식들이 알갱이가 될 때까지 가슴을 찧어가면서 절구질을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참지 못하고 쭉정이가 되어 절구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 어머니! 절구를 생각하면 당신 생각이 납니다.

돌섬을 방문한 석천 부부와 등촌 부부. 미녀와 야수들

중학교 국어책에서 읽은 시란 무엇인가? 

'시는 순간 감정의 표현이다'

그건 태초의 감정이요 순수한 감정일 게다. 조지훈은 승무를 춤추는 여승의 모습을 훔쳐본 순간감정을 4년 동안 갈고 닦아서 명작 '승무'(僧舞)를 썼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도 마찬가지다. 피를 토해가면서 밤새워 울어대는 소쩍새의 아픔이 만들어낸 명작이다.

난 시를 모른다. 석천의 시를 평할 자격이 없다. 한국시단의 실력자 김광규 교수가 높이 평가 했으니 따져 무엇 하리오. 대신 나는 내가 잘 아는 인간석천을 이야기 하고 싶다. 숭산(崇山)이 캐나다 여행 중 이상묵 시인을 만났다. 숭산은 달라이라마 틱낫한과 더불어 세계 3대 선승으로 불리는 생불(生佛)이다. 대화를 나누던 생불이 무릎을 쳤다.

"내가 숭산(崇山)이니 선생은 석천(石泉)이 되시오. 높은 산(崇山)에는 샘물이 솟아 흐르는 바위(石泉)가 있어야 산이 살고 산을 찾아오는 등산객이 살지요."

숭산은 무명 서생 이상묵을 한번 만나보고는 자신과 대등한 그릇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이상묵의 아호가 석천이다(시집 222페이지).

써니사이드 약국에 들렀더니 시집 판매 쪽지가 걸려있었다. '링컨 생가에서'를 7달러에 팝니다. 서장로는 석천을 형처럼 생각하는 고향 후배다. 농담이 나왔다.

"약국에서 책장사도 하시는군요?"

"목사님처럼 시비 거는 분에게는 거저 드리지요."

말 한마디로 시집을 공짜로 얻었다. 그 후로 석천의 작품집이 나올 적마다 서 장로는 날 불렀다. 내가 석촌의 중독자가 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작이 나오면 석천에게서 직접 공급받는다. 우리는 친구가 됐기 때문이다.

석천은 산문도 잘 쓴다. '아는 만큼 더 보이는 유럽여행', '박용만과 그 시대'는 역작이다.

몇 년 전 여름날 석천 부부가 캐나다에서 차를 몰고 돌섬을 찾아왔다. 뉴욕의 시인 김송희도 달려왔다. 1962년도에 혜성처럼 등단한 송희는 석천의 초등학교 단짝이었다. 도원결의라도 해볼 양으로 나이를 알아보니 세 명이 모두 41년생 동갑내기다. 우리는 20평 에덴 농장에서 따온 덜 익은 수박을 나눠 먹으면서 친구가 됐다. 석천은 돌섬을 떠나면서 손을 흔드는 나에게 빨간 셔츠를 건네줬다. 수박이 익어가는 여름이 오면 나는 빨간 셔츠를 입고 돌섬 비치를 걸을 것이다. '링컨 생가'와 '백두산 들쭉 밭'을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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