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휴가 오다
예수가 휴가 오다
  • 지성수
  • 승인 2016.04.26 03: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평생 성당을 다닌 친구가 물었다.

“너 종말을 믿냐?”

“그거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지.”

“왜?” 

“생각해 봐라. 고스톱 판에서 누가 판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겠냐?

패를 잡은 사람이 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계속 가기를 바랄 것이고 그 판에 소망이 없는 사람이 빨리 판이 엎어지고 새 판이 벌어지기를 기대하겠지?”

예수가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세계를 통찰해 볼 때, ‘이대로는 정말 안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처음부터 종말에 대하여 이야기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보려고 전력을 다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서 예수는 도무지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안타까움과 절망을 느끼게 되고 이런 절체절명의 절망감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역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를 기대하는 소망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종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신약의 중심테마는 종말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이 잘못되었으므로 하나님이 개입하는 새로운 세상이 와야 한다는 종말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신약의 중심테마는 종말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이 잘못되었으므로 하나님이 개입하는 새로운 세상이 와야 한다는 종말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 대해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흔히 마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재난에 관한 기록을 보고 예수가 종말을 선포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종말’을 선포한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 사건’을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즉, 예수가 종말을 예언한 것처럼 보이는 마가복음 13장의 여러 가지 재앙들은 언제 어떻게 종말이 온다고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종말에 일어날만함 직한 ‘종말론적 사건’을 언급한 것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13장은 상징이지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가복음 13장의 여러 가지 재앙들이 서기 70년경에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것을 예언한 기록이었다면 재난이 쏟아지는 날에 산으로 도망을 가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공불락의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3년 동안 포위공격을 했던 강력한 로마군이 산이라고 쫓아오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산으로 도망가라는 이야기는 종말론적인 상황이 올 때를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면 예수는 왜 종말에 대해서 언제 어떻게 종말이 온다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하든지 자신이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말든지 할 것이지 이처럼 애써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을까?

예수가 체포될 당시 유대사회의 초미의 관심은 예수가 과연 그들이 ‘고대하고 있던 메시아인가,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메시아로서의 상징적인 행동만을 했을 뿐 속 시원히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를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흔히 예수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도 엄연히 당시의 언어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을 하러 그들의 고향으로 가다가 출산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호적을 하러가다 애를 낳으니 분명히 출생신고는 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즘으로 따져서 예수는 분명히 주민등록 신고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2,000년 전에 예수가 살았던 역사적 현실과 무관하게 예수를 생각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렇듯 역사적 실재인물이었던 예수가 무책임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종말이 이루어진다면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가 신속하게 진격해 들어오듯이 하나님이 전격적으로 현실 역사 속으로 개입해 들어올 것이지만 예수가 당장에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믿었을 리가 없다

한참 이장림의 종말론으로 시끄러울 때 대학 교수인 친구가 “야! 예수가 휴가 온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물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고의적으로 무관심한 그의 귀에 ‘휴거‘가 ’휴가’로 들린 모양이다. 하기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 한자도 아니고 한글로 ‘휴거‘라고 쓴 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턱이 있겠는가? 비록 나도 1970년대 조용기 목사의 영향으로 철석 같이 휴거를 믿어 친구들의 핀잔을 들었던 쪽 팔리는 세월이 있었지만.

하여간에 예수가 재림해서 실신한(신실이 아니라) 신자들이 휴거가 된다면(사실은 휴거가 아니고 철거겠지만) 빈 집이 많아져서 이 좁은 지구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확실하게 도움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부수적 효과는 대한민국에서 새누리당 같은 기득권 보수 세력은 대를 이어 충성하는 맹목적 기독교 보수 세력을 잃음으로써 집권이 어렵게 되고 민주주의가 그만큼 빨리 발전할 것이다. 이러니 이 어찌 아니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으랴?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휴거 개념은 인간 세상사의 고통과 재난을 회피하기 좋아하는 비겁한 사람들을 위한 편리한 도피구일 뿐이다. 

북한같이 허접한 가난뱅이 국가까지 핵으로 무장을 하고 환경파괴 등등의 지구적 재앙이 속속 밀려오는 이때에 팔을 걷어 부치고 같이 힘을 합쳐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골치 아픈 문제를 피해서 저들만 먼저 살 길을 찾아 나서겠다는 휴거 신봉주의자들이야말로 우주적 얌체가 아닐까?

한참 이장림의 종말론으로 시끄러울 때 대학 교수인 친구가 “야! 예수가 휴가 온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물었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고의적으로 무관심한 그의 귀에 ‘휴거‘가 ’휴가’로 들린 모양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황당 그 자체인 개념은 초대 교회에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고 19 세기 영국의 설교가인 John Darby에 의해서 일반화된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니 예수가 다시 온다는 것 자체를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지금 마음으로 모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지금도 매일 예수를 잘 모시자고 기도한다. 가끔 화가 나면 욕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예수가 나타난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천사가 될 수 있을까? 재림은 오직 희망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희망으로만 존재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무지 모르시는 말씀이다. 인간에게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이 없으면 안 된다. 다음은 고린도 3 서(전, 후서가 아니고) 13 장이다.

사랑은 참아서 나에게 득이 될 때만 오래 참으며, 온유하고 교만도 자랑도 아니함은 언제나 주변을 의식한 탓입니다.

어찌됐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세상 끝날 때까지 남아 있긴 있을 건데 믿음은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사랑은 자존심을 버린 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 같고, 소망은 로또를 사는 이들에게. 그래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래도 그 중에 제일은……. 질기디 질긴, 소망이 아니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