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해방'이라니
'교회의 해방'이라니
  • 김종희
  • 승인 2008.02.11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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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참으로 해방된 교회] 01 정의, 해방 그리고 하나님나라

▲ <참으로 해방된 교회>.
교회에 대해서 ‘해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약간 불편하다. ‘해방’이라는 단어 자체에 무슨 하자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남조선 인민 해방’, ‘해방신학’ 같은 단어들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하신 사건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오셔서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하신 사건도 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우리나라 역사도 있다. 약간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해방’이라는 단어를 계속 써야겠다.

교회의 해방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회가 무엇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남미의 해방신학에 대해 생각해보자.

해방신학의 강점과 약점

해방신학자들은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를 해방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제3세계 민족들을 북미와 서구 유럽의 정치·경제적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대부분의 북미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착하고 강직하고 정직하고 근면하며 준법정신이 투철하다. 대부분 중산층이다. 신실하고 헌신적이고 정직한 상당수의 북미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자신의 신앙이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출발점으로 작용하기보다, 그들의 사회·문화적 여건이 그들의 신앙 성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들은 제3세계를 자신들의 경계선 밖의 세계로 치부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그렇다면 해방신학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의 초점이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들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인가. 정치·경제적 구조에 대한 관심이 문제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원용하기 때문인가. 그것은 오히려 옳은 것이다. 풍요로운 북미의 교회가 자본주의와 유착해서 공존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해야 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희생시켜 정치·경제적 해방이라는 명분만을 부각시키려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충성하는 수단과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이 문제다.

교회가 세상에서 해방의 힘을 발휘하려면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나라를 위해 해방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이념에서 자유로워져서 그런 이념들의 강력한 비판을 넘어서는 교회로 해방되어야 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이다.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향하여

그럼 교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듯이 전도가 목적이 아니다. 반대로 사회 정의나 정치적인 개혁이 목적이 아니다. 물론 그것들은 교회의 핵심적인 사명들이다(이것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게 된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나라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나라에서는 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성경은 의와 정의를 매우 밀접하게 연결한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수직적인 의와 수평적인 정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나님나라는 정의를 시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정의롭고 의롭게 사는 이들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기쁘게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분의 계획과 경륜이 수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전에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나라가 우리의 초점이 되었고, 우리는 이 나라에 궁극적인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런 교회는 신실하지 않으며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며 훼손되고 부패한 것이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실제 역사를 위한 것이다. 추상적이고 개념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니다. 전 세계 믿음의 형제자매들 대다수가 백인이 아니며, 가난한 자들이며, 정치·경제적으로 억압받고 있다. 특히 여자와 아이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통의 짐을 지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얘기하고,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기쁘게 순종하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이러한 현실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라크에서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보다 미군의 죽음에 더 분노하는 북미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진정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의와 의를 추구하는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해방은 좋고 저런 해방은 싫다?

▲ 선교사 출신으로 신학교에서 선교신학을 가르쳤던 하워드 스나이더 박사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그리스도의 공동체>, <참으로 해방된 교회>, <교회 DNA> 등 교회 갱신과 관련된 책을 많이 냈다.
예수님은 그분의 생애와 죽음, 부활과 현재적인 다스림을 통해 모든 정사와 권세들, 보이는 것(정치·경제·사회·신체적인)과 보이지 않는 것(사탄과 그 군대·이면의 보이지 않는 이 세상 권력 구조의 차원을 포함하는 모든 영적인 세력)을 모두 정복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해방되었다.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해방을 기뻐하고 자유를 만끽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은 무엇으로의 해방으로 자연스레 이끈다. 앞의 해방에는 기뻐하면서 뒤의 해방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분은 우리를 해방하여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 이 자유를 가지고 살기 위해 우상에게서 돌이켜서 하나님께만 충성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재의 교회와 세상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계속)

 

 

 * 이 글은 하워드 스나이더 박사가 쓴 <참으로 해방된 교회>(출판 IVP·원작 Liberating the Church)의 내용을 토대로 하고 기자의 의견을 결합해서 작성한 것입니다. 글은 책의 순서에 따라 16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1부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모형
00 오늘날의 교회 해방과 갱신
01 정의, 해방 그리고 하나님나라
02 하나님의 경륜
03 교회의 생태

2부 교회 해방의 모형
04 성례로서의 교회
05 공동체로서의 교회
06 종으로서의 교회
07 증인으로서의 교회

3부 하나님나라를 위한 교회
08 모든 신자는 사역자다
09 신학을 해방시키라
10 언약의 책
11 하나님나라의 생활방식

4부 성령의 자유 안에 거하는 교회
12 평신도, 사역자로 해방되다
13 여성, 지도자로 해방되다
14 가난한 자, 자주적인 인간으로 해방되다
15 목회자, 제자 훈련가로 해방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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