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 언론인, 무엇으로 사는가?
재외 언론인, 무엇으로 사는가?
  • 김명곤
  • 승인 2016.05.29 0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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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6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5회 재외언론인대회 심포지움에서 <플로리다 코리아위클리> 김명곤 대표기자가 발표한 '재외언론인, 무엇으로 사는가' 발제문입니다. (편집자 주)

어쩌다가 한국의 친척과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면 종종 불편한 질문을 받습니다. “밥은 잘 먹고 있냐?” 대학 강단에서 언론학을 가르치고 있는 친구로부터 “신문 일 제대로 하고 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질문들을 들으면 좀 우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혹 ‘나는 밥도 제대로 못먹고 신문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존재는 아닌가’하는 자괴감이 듭니다. 

우리는 대체 무슨 이유로 신문을 만드는 걸까요.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요. 인쇄비와 발송비를 마련하느라 허덕거리고, 없는 집 제삿날 돌아오듯 바쁘게 바쁘게 신문 일을 하다보면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잊고 살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제가 패널 토론 주제로 내놓으려고 하는 것은 재외 언론인으로서의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이민 와서 하고 많은 일들을 놔두고, 왜 신문을 만들어야 하는가, 즉 ‘당위’를 자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재외 언론인은 누구냐’는 자문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할 수도 있는 답변은, 우선 재외 언론인도 ‘몸은 멀어도 마음만은’ 고국에 두고, 현지의 삶에도 적응해야 하는 이중구조적 삶을 살고 있는 ‘이민자’라는 것입니다.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에 따르면, 어느 한 사회나 문화권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회의 현상유지(status-quo)를 고수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이민자는 그 사회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본토인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창조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민자’ 재외 언론인도 본국의 언론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이를 언론의 장에 발현할 수 있는 창조적 가능성에서 열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시절 해외의 ‘독립 언론’과 엄혹한 독재시절에 해외 한인 언론이 했던 역할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국 언론인들과 유사하지만 ‘뭔가 다른 가능성이 있는’ 재외 언론인의 정체성에 대해 대략적으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여러 각도에서 정리할 수 있겟지만, 매스미디어 역할의 이론적 뼈대라고 할 수 있는 ‘게이트 키핑(gate keeping)’과 ‘아젠다 세팅(agenda setting)’을 필두로 간단하게 정리해 발제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대체 무슨 이유로 신문을 만드는 걸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게이트 키퍼(gate-keeper) 

우선, 재외 언론인은 게이트 키핑(gate-keeping)을 하는 ‘게이트 키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의 유통과정에서 ‘문지기’ 역할입니다. 옛날 우리 농촌에서 보았던 ‘물꼬지기’ 역할과 유사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홍수가 나면 물의 흐름을 적절히 조정해 주기도 하고 새로운 물꼬를 터주기도 하는 물꼬지기 처럼 게이트 키퍼는 정보 유통과정에서 정보를 걸러내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인터넷 세상을 맞은 지금, ‘정보의 홍수(information overflow)’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보의 홍수 시대에 누구나 ‘빠르고 쉽게’ 정보를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전통 매체의 역할은 끝났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엄청난 정보를 수초 내에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 기본 신문 매체나 방송 매체로 승부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죠. 과거 주는대로 받아먹던 시대에서 이제는 독자가 알아서 찾아먹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시대에 게이트 키핑의 결과물에 대한 비교 분석이 용이해지고 전문성을 가진 이용자까지 가세하면서 궁극적으로 뉴스 유통 경로를 감시하는 눈이 늘어나 전통적인 게이트 키퍼가 수행하는 역할이 분산되고 약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게이트 키핑’의 시대는 가고 ‘게이트 워칭(gate watching)’에 이어 ‘게이트 쉐어링(gate sharing)’의 시대가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말 기존 매체의 역할은 끝난 것일까요? 게이트 키퍼로서 언론인의 역할은 끝난 것일까요? 그런데 재외 언론인으로서 제 생각과 경험은 조금 다릅니다. 바로 이 ‘정보의 홍수 시대’라는 지점에서 단 몇 페이지의 종이 신문의 역할이 있는게 아니냐는 역발상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자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가 넘치는 상황에서는 다시 게이트 키퍼의 역할(gate keeper revisited)을 요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몇 년 전부터 우리 신문 독자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어 왔습니다. 

“아, 한국 인터넷에서도 비슷한 기사를 봤는데, 종이신문으로 보니까 느낌이 많이 달라요.” 또는 “요즘 포털이나 인터넷 신문이 너무 벌려놔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안 봐야 할지 헷갈려요. 종이 신문을 보니 필요한 것만 잘 정리해 주어서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이처럼 정보 홍수의 시대에 재외 언론은 일차적으로 본국 뉴스의 영역에서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배껴서 내든 제휴를 맺어서 내든 재외 언론인은 게이트 키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재외 언론 시장에서 게이트 키핑이 이뤄지는 또하나의 중요한 영역은 주류 사회의 뉴스와 국제 뉴스입니다. 재외 언론은 이민자들의 경제적인 면을 위해서나 흔히 말하는 ‘정치력 신장’을 위해서나 주류 사회의 뉴스는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민 1세대 가운데는 아직 영문을 해독하지 못하거나, 어느정도 영문을 해독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섬’처럼 살아가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류사회의 소식을 직간접으로 취합하여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은 이민자들에게 단비와 같은 것입니다. 

국제 뉴스의 게이트 키핑과 관련해서도 재외 언론의 게이트 키핑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살고 있는 문화권의 시각에서, 더 나아가 우주적 관점에서, 직간접으로 외신을 자유롭게 접근하고 정리하여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재외 언론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면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하겠습니다. 

본국의 언론들이 본국의 정치적 상황에 맞는, 심지어는 특정 정권의 입맛에 맞는, 더 나가서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줄을 댄 외신 기사들만을 취사 선택하여 전하는 데 비해, 이민 언론은 비교적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자유롭게 타문화권 또는 우주적인 문제들과 관련된 기사들을 공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지요. 

아젠다 세터(agenda setter) 

언론 매체가 게이트 키핑을 계속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의제 설정(agenda setting)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톱기사로 어떤 뉴스를 내보낼 것인가, 어떤 기사를 크게 보도하고 작게 보도할 것인가, 제호의 크기와 위치는? 즉 기사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것인데, 이게 바로 아젠다 셋팅입니다. 

아젠다 세팅의 권한은 언론인의 존재 근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언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아젠다 셋팅에 의해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생각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언론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의제 설정 권한은 공중 토론의 의제를 설정하는 막강한 힘을 갖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는 이 막강한 힘이 어떤 법률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습니다. 

흔히들 재외 언론이 한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청들이 있습니다. 이 같은 요청은 주로 한인 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나 본국이 재난을 당했을 때, 재외동포 참정권과 같은 정책적 변화가 있을 때, 그리고 세계적 또는 국가적 변화가 요청되거나 할 때 언론의 긍적적 의제 설정이 필요합니다. 이번에 재언협이 적극적으로 재외선거에 이 같은 의제 설정을 했고,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 경관에 뽑힐 때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얼마 전 미주 사회에서 탈북자 여자 목사님 한 분의 강연이 문제가 된 적이 있고, 국회 대정부 질문에 오른 것을 보았습니다. ‘평화’를 말하고 ‘민족 화해’를 고민해야 할 민주평화 통일 자문회의 모임들에서 ‘때려잡자 000’ 식의 강연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런 경우 집회의 ‘반헌법적’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연사를 바꾸도록 여론을 조성하는 일도 재외언론의 아젠다 세팅 역할입니다. 

언론의 의제 설정 파워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06년, UPI기자로 47년간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한 헬렌 토머스(1920~2013년)는 <민주주의의 감시견? 맥빠진 워싱턴 기자단, 어떻게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는가(Watchdogs of Democracy?: The Waning Washington Press Corps and How It Has Failed the Public)> 라는 책에서 “민주 언론의 목표는 의제보다 ‘진실추구’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백악관 기자실의 전설, 고 헬렌 토머스 기자.

언론이 의제설정의 위력을 의식하고 처음부터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의제를 설정하게 되면 여론을 왜곡 오도하고, 사회를 조종하게 되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죠. 언론의 의제설정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의제 설정 비판론자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언론이 기존 권력이나 현상유지(status-quo)에 안주하려는 속성 때문에 특정 이데올로기나 특정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기가 쉽다는 것이지요. 

저희 신문이 종종 듣는 소리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신경 거슬리게 논조가 편향적이고 삐딱하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서 모두가 ‘아멘!’을 외칠 때, ‘아뇨!’라고 외치면, 목사님도 놀래고 졸던 사람들도 잠이 확 깨지 않을까요?” 90%가 권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때, 한 둘 쯤은 머리를 쳐들고 ‘아뇨’라고 외치는 것이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집단 무의식’과 ‘집단사고’를 깨는 것은, ‘아뇨’라는 돌발사태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 

재외 언론이 피리부는 소년을 따라가듯 본국 주류언론의 게이트 키핑이나 아젠다 세팅에 동조하여 ‘카피 캣’ 역할을 하는 것은 재외 언론의 특권을 반납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외 언론은 본토 친척 아비집의 번영을 위해 긍정적인 아젠다 세팅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민 언론만이 감지할 수 있는 주류 사회와 국제 사회의 새로운 풍향을 기반으로 한인 사회의 미래와 더 나아가서 민족의 먼 미래를 위해 보다 창조적 아젠다를 설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재외 언론인이 주류 사고에만 빠져서 카피 캣 역할을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고, 이민자 언론인으로서의 특권을 유보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외 언론의 생명력은 주류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스스로 ‘제외’시키려는 도전 정신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재외 언론인에게 남겨진 중요한 과제는, 독립적인 게이트 키핑과 아젠다 세팅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 그리고 언론인으로서의 도덕성과 균형잡힌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겠지요. 물꼬지기가 지금 흐르고 있는 물이 짠물인지 민물인지 구분도 못한다거나, 흐르는 물이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는채 물꼬를 지키고 있다면 패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뻔한 이치일 것입니다. 

진실 추구자 

이민 사회에서 흔히 듣는 푸념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이민자들이 김포공항에서 떠날 때 가지고 있던 생각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험난한 시대를 통과하며 이민자 자신들의 겪어온 체험과 정치 사회적 분위기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위말하는 주류 언론들의 일방통행적인 게이트 키핑과 아젠타 세팅의 효과 때문이기도 합니다. 

앞서 헬렌 토마스 기자가 ‘민주 언론은 의제보다 진실 추구여야 한다’는 명제는 사실상 언론의 고유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언론이 의제 설정에 힘을 쏟다 보면 표면적으로 보이는 사회 정치적 요구에 따르게 되고, 이는 현재의 권력집단의 이데올로기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겠습니다. 

미국 언론이 이라크 전에서 보여준 보도 태도가 바로 이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을 일으키기 전만 하더라도 미국 기준으로 좌파 언론 <뉴욕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등은 전쟁에 반대하는 민주당 편을 들며 맹렬하게 이라크 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라크 전에 터지고 나자 이들 주요 신문들이 ‘국뽕 늬우스’로 돌아서서 미군이 이라크에서 몇 명을 살상했는지, 어디 어디를 점령했는지 등을 주로 보도하고 이라크 민간인들의 피해와 이라크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는 가뭄에 콩나듯 다루고 있었습니다. 마치 1960년대 1970년대 월남전에 대한 ‘국가주의적’ 보도태도와 같았다고나 할까요. 

한 사회가 오랫동안 심하게 갈등을 겪다보면 패거리 문화가 형성되고, 이에 맛들인 주류 권력은 이 패거리 문화의 영속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보를 조작하고 왜곡합니다. 이런 문화에서 우리는 소수의 권력 엘리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유리한 정보만을 일방적으로 제공받고, 이 정보를 토대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종교를 꽃피우고 나름대로 즐기게 됩니다. 

여기서 무서운 것은,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즐기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물을 객관화시켜 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상적인 인식 체계가 깨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신동엽 시인이 ‘먹구름을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고 한 것처럼, 정상적인 인식체계가 깨어져 버린 상황에서 이민을 왔으니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재외 언론이 주체적으로 사고하여 창조성을 발휘하면 안 될까요? 본국 언론이 알게 모르게 자행해온 편파성과 오보와 왜곡보도의 고리를 끊어버리자는 겁니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내고 모 신문의 주필을 지냈던 김삼웅 기자가 쓴 ‘곡필로 본 해방 50년’이란 책을 보면, 해방 이후 뿐 아니라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 70여 건의 곡필 사례들을 포함하여 1995년까지 300여 건의 ‘주요’ 곡필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뜨고 보기가 민망할 정도의 곡필들입니다. 이후로 20년이 흘렀으니 곡필 사례는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건전하게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자명(自明)한 것으로 전제하고 아예 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사물을 되짚어 보고, 세상을 거꾸로 보기도 하며, 상대편의 눈으로 나와 우리에 대해 질문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진실의 문은 끝없이 질문하는 자에게만 틈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언론인이라면, 아주 마땅하게 진실 전달에 앞서 진실을 캐내려는 노력을 해야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주어진 ‘팩트’를 넘어서 ‘진실’을 찾기 위한 부단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팩트(fact)는 정보제공자가 제공한 것으로 ‘겉으로 드러난 사실’을 말합니다. 이에 반해 진실(truth)은 속성상 은폐의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찾아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팩트에 대한 검증과정을 거치고 그 ‘의미’를 찾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진실찾기와 관련하여 언론인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실마리를 찾아내는 인류학자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이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우리 재외언론인에게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치열함과 열정(passion) 있느냐는 것입니다. 

척박한 한국 언론 현실에서 진실을 추구했던 진정한 언론인 고 리영희 선생.

진실 추구를 위해 치열하게 살다간, 철학자 같기도 하고 인류학자 같기도 한 선배 언론인 리영희 교수의 명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시대의 소명자 

앞서 언급한 게이트 키핑과 아젠타 세팅, 진실 추구는 언론인의 통시대적 임무요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미디어 환경이 변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게이트 키핑과 아젠다 세팅이 이뤄지고 진실은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재외 언론인이든 국내 언론인이든 언론인들이 가져야만 하는 이 같은 통시대적인 역할이 있는 한편으로, 시대적 역할, 즉 시대가 요청하는 특수 역할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일제시대 해외에서 신문을 통해 독립운동에 매진한 우리 선조들이 이 역할들을 어떻게 해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미국, 중앙아시아, 러시아, 중국에서 발행된 재외 언론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대표적인 신문들을 나라별로 하나씩만 꼽아보면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1931년 북간도 용정의 <조선독립신문>, 1914년 일본의 <학지광>, 1908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해조신문> 등이 있습니다. 우리 조국이 엄혹한 독재 체제 아래 있을 때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에 공헌한 재외 언론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언론이, 언론인이 시공간 속의 존재라는 사실을 깊게 인지한다면, 시대에 따른 소명(calling)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인 디아스포라 언론인의 시대적 소명은 뭘까요. 

한국전 참전 1세대 이민자들, 북에 고향을 둔 이민자들, 요즘에 탈북하여 해외에 살고 있는 이민자들의 한과 고통을 듣다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로인해 이민 사회가 때로 갈등을 겪는 아픔도 종종 경험하기도 합니다. ‘화해’니 ‘분단 극복’이니 ‘평화통일’이니 하는 단어가 기사에 나타나면 아직도 ‘경기’를 일으키는 분들이 이민 사회에 널려있습니다. 

어떤 이는 통일운동을 한다며 완전히 친북운동에 빠져 있고, 어떤 이는 평통위원을 하면서도 완전히 반통일 운동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재미동포 신은미 씨의 북한 방문기를 놓고 어떤 때에는 통일부 추천도서로 추천했다가 금방 이적 도서로 몰아갑니다. 이쯤되면 70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우리 민족의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서 이제는 정신분열증 수준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민족의 상처와 갈등 앞에서 재외 언론인들은 무엇을 해야 한단말인가. 같이 안고 뒹굴 것인가? 아니면 외면하고 말 것인가? 저는 급한 마음에 종종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태양의 후예’니, 추신수니, 박병호니, K팝이니 하는 자랑거리도 잠시 접어두는게 어떨까. 유엔 사무총장이니, OECD국이니, 현대니, 삼성이니 하는 것들도 잠시 밀쳐두면 어떨까. 이런 것들은 남북이 통일이 된 다음에 천천히 뜸 들여가며 즐기면 어떨까, 하는 망상입니다. 

만약 '역사의 신'이 존재해 21세기 현재 미국 땅에서 살고 있는 한국 이민자들에게 그 어떤 일을 맡겼다면 이는 두 말 할 필요 없이 '분단극복'에 관련된 일일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민자들이 창조성을 발휘하여 풀어내야 할 시대적 과업이라고 믿습니다. 70년 동안 갈라져서 온갖 불합리와 부조리와 상처와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분단 문제 만큼 재외 언론에게 최대 현안은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재외 언론은 아젠다 세팅 과정에서 한국전으로 상처를 입은 선대들, 그리고 월남민들과 탈북자들을 싸안고 위로하는 한편, 어떻게든 갈등을 최소화 하고 치유하려는 노력들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본국의 보수 주류언론과 일부 극단적인 이민자들이 부추기는 증오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일이 재외 언론의 시대적 사명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는’ 노력을 통해서 ‘분단 사고’를 극복해 보자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 차세대 인물을 키우는 것도 재외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통일시대에 걸맞는 인물을 키워서 주류 사회에서 남북화해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보니 민주평통이 차세대를 키우는 일에 적극 나서고 있는 데, 우선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부 구세대 평통위원들 가운데는 ‘호전적인 차세대’를 키우려는 움직임도 있어서 우려스럽기는 하지만,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이들을 평와통일 일꾼으로 길러낼 여지는 많다고 봅니다. 

발제를 마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요셉의 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함부로 형제들에게 발설하였다가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 쫓겨나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기근이 들어 모두가 죽게 되었을 때, 이집트 뿐 아니라 고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살리게 됩니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꿈쟁이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고 까지 했던 형제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품에 안은 것입니다. 

분단상황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꿈꾸는 사람으로 고국을 떠나 물설고 낯설은 땅에 정착했습니다.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가’, ‘신문은 제대로 만들고 있는가’라는 속질문이 여전히 마음을 뒤시끄럽게 하지만, 최소한 분단의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온 언론인들이 먼저 민족 화합의 꿈을 꾸고, 더 나아가서는 이민자 모두가 그 꿈을 꾸게 하는 일에 나서면 어떨까요. 지금이야 망망대해에 투망 던지기 같은 일일 것이지만, 역사는 꿈꾸는 자들에 의해 진보하게 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최근 좋아하게 된 노랫말 ‘거위의 꿈’을 소개하는 것으로 토론을 마칠까 합니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김명곤 기자 / <코리안 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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