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장경제를 망가뜨리는가?
누가 시장경제를 망가뜨리는가?
  • 김재수
  • 승인 2016.05.31 07: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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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수 교수의 신뢰의 경제학

"태정산업 권광남입니다.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려야 옳으나 이렇게 글월로 올리는 것 이해 바랍니다. 저는 올해 법정관리에 들어가 이제 인가절차를 거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일들을 법원 판사님께 통제를 받다보니 삼성의 협조사항에 대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상무님 올해는 제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거의 없습니다. 우선 회생인가를 받고 내년에는 삼성의 도움이 되는 협력업체로 거듭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스런 마음 그지없습니다. 너그럽게 용서 바랍니다."

대기업의 갑질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협성회 소속의 업체들에게 200억 정도의 돈을 요구합니다. 협성회란 삼성전자 생활가전부문의 주요 협력업체 모임입니다. 위의 글은 태경산업의 권광남 회장이 삼성전자의 상무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입니다. 태경산업은 삼성전자에게 성의 표시를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88년부터 삼성에 납품하기 시작했지만, 이 일이 있은 후 28년 만에 협성회로부터 탈락 통보를 받았습니다. 수주 물량도 큰 폭으로 줄었습니다. 이처럼 하도급 업체들에게 기금을 만들도록 하거나, 협의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하는 것은 하도급법 위반의 불공정행위입니다.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협력업체로부터 200억 정도의 돈을 요구한다 (사진출처: 뉴스타파)

대기업은 다양한 방식으로 중소기업에게 갑질을 하고 있습니다. 협력업체에게 공동사업을 제안하지만, 기술을 가로챕니다. 하청업체의 사업을 낚아채서 직접 계열사를 차립니다. S전자는 반도체 장비를 납품하던 J업체와의 거래를 끊고 계열사를 통해 제품을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열사의 제품을 쓸 것을 강요합니다. S전자에서 S카드를 쓰라고 한다거나, H전자가 H자동차 등의 구매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구매하지 말고, 지불하지 말자는 제안을 합니다. 시장 거래가 없으면, 자본주의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진한 방식의 싸움 전략입니다. 지갑을 열고 구매하라고 유혹하는 기업들의 광고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대기업들은 납품단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고, 사업 낚아채기 등을 통해서 거래를 중지하고 있습니다. 순진하지 않은 대기업들이야말로 반자본주의 운동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계약의 불완전성과 홀드업 문제

하청기업 을은 원청기업 갑에게 부품을 납품하고 있습니다. 을의 생산비용이 100원이라고 합시다. 갑은 최고 400원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갑과 을의 협상력에 따라 가격은 100원과 400원 사이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갑의 협상력이 크므로 납품가격은 150원에 결정되었습니다.

원청기업과 하청기업 사이의 납품 거래에 대한 간단한 묘사입니다. 소비자가 가격을 지불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거래 계약은 이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수 많은 불확실성이 존재해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알 수 없고, 각 상황마다 계약 내용을 명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품질 평가를 두고 갑과 을의 의견이 다르고 분쟁이 있는 경우, 어떤 식의 조정 절차를 거칠지 정해야 합니다. 납품 기한을 못 맞출 수도 있습니다. 과연 어느 정도의 벌금을 지불할지도 정해야 합니다. 끝이 없는 불확실성 때문에, 사실 계약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합니다.

계약의 불완전성은 기회주의적 행위를 낳습니다. 하청업체 을은 연구개발 투자 비용을 지출해서 부품의 생산 비용을 50원으로 낮추었습니다. 원청업체로부터 150원을 받고, 부품 하나당 100원의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갑은 을에게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합니다. 50원에 생산할 수 있으니, 100원만 주겠다고 합니다. 더 심한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생산단가 만큼의 가격도 지불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만약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을은 더 이상 연구개발에 투자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학은 이것을 홀드업 문제라고 부릅니다.

불공정성이라는 개념은 자발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제 모델에서 정의하기 매우 힘든 개념입니다. 계약의 불공정성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연구를 거의 찾기 힘든 이유입니다. 그래서 홀드업 문제가 갖는 의미가 매우 큽니다. 경제학자들이 홀드업 문제에 대해서는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홀드업 문제가 투자와 거래를 위축시키는 비효율성을 낳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의 갑질을 불공정거래라는 이름으로 규제하기는 하지만, 실상 경제학적 이론의 근거는 갑질이 낳는 경제적 비효율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장 경제의 두 바퀴

대기업의 갑질은 가격만으로 모든 거래가 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가격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면, 갑질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단가를 낮추지 못한다고 해서 중소기업 회장이 대기업 상무에게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정해진 가격을 지불하고 물건을 거래하면 그만입니다. 흔히 시장경제를 가격 시스템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시장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두 개의 바퀴 중 하나일 뿐입니다. 가격 시스템은 계약이 비교적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에서만 작동할 수 있습니다.

계약이 불완전할 때, 거래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신뢰입니다. 원청업체 갑이 납품단가 인하를 추가로 요구하지 않겠다는 신뢰가 있을 때만, 하청업체 을은 연구개발에 투자를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약속한 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있을 때만,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애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뢰는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복수는 나의 것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신뢰게임 실험을 하였습니다. 실험참가자 을은 $100를 가지고 있습니다. 을은 얼마의 돈을 갑에게 투자할 수 있고, 갑은 투자한 돈의 네 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만약 $100 모두를 투자하면, 갑은 원래 가지고 있던 $100에 투자 수익 $400을 더해 $500을 갖게 됩니다. 갑은 이 중의 일부를 다시 을에게 돌려줄 수 있습니다. 갑과 을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한다면, 홀드업 문제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질 것입니다. 갑은 돈을 돌려주지 않고, 이를 예상한 을은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어느 정도의 돈을 투자하지만, 투자받은 돈 보다는 조금 적게 돌려 받습니다.

게임의 마지막 단계에서 을이 갑을 응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봅니다. 자신의 돈 $10을 써서 상대방의 돈 $20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기적 인간이라면 응징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손실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복수를 선택합니다. 이를 예상한 갑은 공평한 분배를 선택하고, 역시 이를 예상한 을은 더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신뢰와 복수심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신뢰 관계는 복수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신뢰를 유지하는 연료는 불공평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입니다. 이기적 인간이 가격이라는 바퀴를 돌린다면, 분노하고 복수하는 인간이 신뢰라는 바퀴를 돌립니다. 시장은 가격과 신뢰로 움직입니다.

천민자본주의, 처벌의 부재

한국의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많은 이들이 이기심의 과잉을 지적합니다. 제가 볼 때는 복수와 처벌의 결여가 더 큰 문제입니다. 신뢰를 배반했을 때,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를 통한 처벌의 메커니즘이 작동해야 하지만, 한국의 기득권층은 어떤 식의 처벌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병역면제, 위장전입, 땅투기 등을 한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관으로 임명되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됩니다. 탈선, 회계, 횡령, 분식회계 등의 판결을 받았지만, 재벌 총수들은 특별사면을 받습니다. 대기업의 갑질은 시장경제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약간의 과징금을 지불하여 퉁을 칠 수 있습니다.

시장경제의 동력, 분노와 두려움

좌파 작가인 스테판 에셀은 자본주의의 폭력에 맞서 "분노하라"고 요청합니다. 그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분노하라는 요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유지 가능성을 위해서 절실히 타당합니다. 갑이 신뢰를 저버리면, 을은 분노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긴급한 요청이 있습니다. "두려워 하라"입니다. 갑은 을의 분노를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와 두려움은 마치 수요와 공급처럼 작동하여 신뢰라는 균형을 낳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 하지 않는 이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뒤엎는 사람들입니다.

김재수 / 인디애나 퍼듀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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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 2016-06-05 12:46:50
지구 한쪽에서는 천민자본주의 벌쳐캐피털리즘이 운위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본소득제가 운위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