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
  • 성기문
  • 승인 2008.02.13 02: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창세기와 자본주의적 해석 (5)

1. 물질적으로 복을 받은 자는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전한 자인가?

기존의 주석 작업을 서둘러 요약하다보니, 중요하게 할 말이 단락째 빠져버렸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아브라함이야기를 살펴보기에 앞서서 추가하고자 한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후대의 역사서의 사사들과 다윗과 사울과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노아와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21:22; 26:3, 24, 28; 28:15)는 언급 자체가 등장인물의 윤리적 고결성 혹은 완결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사들이나 사울의 경우처럼(심지어 신약의 베드로나 바울의 경우를 보더라도) 성령의 강림과 하나님이 함께하심에 따르는 등장인물의 물질적 번영 자체가 하나님(혹은 성경의 저자)이 그의 행동의 정당성(의 전부 혹은 의도)을 항상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에서 아비멜렉은 심지어 아브라함과 이삭의 부와 하나님의 현존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하였지만(창 21:22; 26:28), 그것이 족장들의 신앙과 윤리성의 고결성을 ‘보장’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심지어 야곱은 아버지에게 복을 받기 위해서 거짓으로 들짐승을 쉽게 잡을 수 있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하기까지 한다(27:20). 게다가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하여 번영케 되었기 때문에 보디발이나 간수장이 그를 선호하였던 것이지 그가 윤리적으로 고결하였기 때문에 그를 선호하였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창세기를 읽을 때, 본문이 바로가 요셉이 자신의 꿈을 해몽한 이후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한다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가 이집트의 총리로서 공무를 수행할 때와 형제들을 대할 때 온전하게 신앙적이거나 윤리적이라는 점을 자동적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 본문은 그 속에 언급된 인물과 사건들의 진행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성경이 바라는 반응과 행동을 하도록 항상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 즉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 전체를 혹은 등장인물의 언행을 (경제)윤리적으로 평가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이 사용된다. (1) 당사자의 말, 행동 그리고 일관성(신뢰성)에 따른 평가, (2) 다른 캐릭터들에 의한 평가, (3) 화자의 평가다.

2. 아브람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가?

본문 자체는 아브람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는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그가 부르심을 받은 후에 어떻게 부자가 되었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아마도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우르→바벨론→마리→하란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며, 나중에 아브람은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함께 하란→알레포→카트나→다메섹→세겜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우선 우리는 어째서 롯을 아브람이 데리고 가나안까지 갔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필자가 볼 때 아브람은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이미 롯을 자신의 상속자로 삼고 가나안까지 데려왔을 것이다. 그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때 자신의 혈족인 롯을 데리고 갔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아브람이 롯을 데리고 갔던 합당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브람이 하나님의 소명을 잘못 혹은 부분적으로 이해해서 온전히 그의 고향을 등지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소명 자체가 고향에서 아무것도 데리고 나오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굳이 이 이유를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물론 본문이 아브람이 롯을 양자로 삼았다는 말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황적으로 이러한 전제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만으로도 종(아브람과 엘리에셀)이나 첩의 자녀나 손자나 며느리의 아들(나오미와 보아스의 아들)마저도 양자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질녀(룻기)나 여족장(사라, 야곱의 아내들)의 입양의 경우도 나온다.

부끄러운 부자, 부끄러운 축복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을 따라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함께 하란에서 얻은 재산들과 종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지만, 아브라함이 처음으로(약속의 땅 밖에서) 처음으로 복을 받게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기 목숨의 부지를 위해서 사라에게 한 약속이 본 단락을 이해하는 중요한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혹은 눈빛이 아름다운 여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이 그대를 볼 때 ‘이 여자가 그의 아내다’라고 말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려둘 것이요. 그러니 당신이 나의 누이라고 말해주길 바라오. 그렇게 한다면, 당신으로 인해서 내가 후대(厚待)를 받을 것이며 내 목숨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보존될 수 있을 것이오."(12:11-13)

아브라함의 예견(!)대로 이집트 사람들이 사라의 탁월한 미모에 놀랐으며 바로의 고관들도 바로 앞에서 그녀의 미모를 칭송하자 그녀는 왕궁으로 인도된다. 아마도 바로는 사라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소문만 듣고 무턱대고 (주름이 주글주글한 사라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너울을 벗겨볼 기회도 없이) 사라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거짓말이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이것은 나중에 이삭과 리브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임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미모에 반한 이집트 왕 바로로부터 후대를 받고 어마어마한 결혼 대금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가 그녀를 후궁으로 맞아들여 결혼하고자 신부의 아비의 역할을 대신하는 그녀의 오라비인 아브라함에게 행한 것이었다. 즉 “…아브람이 바로로부터 양들과 소들과 노비들과 암수 나귀들과 낙타들을 얻었다”(16절). 고대근동의 관습상 사라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오라비 노릇을 하는 아브람이 결혼 대금을 받았다는 말은 바로와 사라가 법적으로는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신이 받을 ‘후대함’을 먼저 언급하고 자신의 목숨의 보존을 나중에 언급하는 아브라함의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목숨을 보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내로 인하여 치부(致富)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볼 때 아브라함의 아내에 대한 요구는 이기적이고 비굴하다 못해 교활하기까지 하다.

사실 고대 이집트에서 남편 있는 아내를 얻기 위해서 남편을 죽인다는 예가 있었는가? 이것도 드문 사례였을 것이며, 사라가 바로와 같은 신적인 권세자에게 발탁되어 첩으로 불려갈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희박한’ 가능성을 위해서 신분을 속이게 되었으니, 그러한 것들을 미루어 본다면 그러한 염려는 기우(杞憂)였다. 아니 아브라함은 그와 같이 과장된 내용을 근거로(즉 자신의 목숨을 근거로) 삼아야만 사라가 자신과 함께 이집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아니 남편은 아내에게 그와 같은 수치스러운 일을 행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말은 남편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자를 자기 여자로 삼기 위해서 남편을 죽일 만큼 이집트 사람들이 ‘비윤리적’일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아브라함이 보기에 이들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 ‘간음과 간통’을 행하기보다는 편하게 남편을 살해하여 아내를 과부로 만든 후에 ‘합법적으로’ 결혼하는 이상한 사고방식의 사람들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우리가 아브라함이 또 이런 일을 하다가 아비멜렉에게 발각되어 자기의 죄(?)를 진술할 때 행한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이후로 내가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시오. 그것이 당신이 내게 베풀 성실함이오’”라고 언급하고 있는 창세기 20:13을 떠올린다면 아브라함은 상습적으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생활하였던 첫 번째 사건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아브람과 사래가 서로 조약을 맺은 것과 같다. 그래서 필자는 이 두 사람을 ‘부부 사기단’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마도 바로의 후궁이나 첩이 되려면 적어도 수개월에서 1년 정도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에스더의 경우에는 12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바로에게 직접 나타난 야훼의 중재로 사래는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고, 재산들도 고스란히 가지고 이집트를 나올 수 있었다(20절). 아브라함은 이집트 땅에 거류민(10절)으로 내려갔으나 재산을 소유하고 나오게 된다. 그러한 일(거짓말로 인한 위기와 재화의 획득)로 인해 부자가 된 아브라함은 계속적으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갔다(계속).

자세한 논의는 http://www.cyworld.com/moses_torah를 참조하면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