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재벌 집안 외손녀 아닌 평범한 청년 '캔디 고'를 만나다
[인터뷰] 재벌 집안 외손녀 아닌 평범한 청년 '캔디 고'를 만나다
  • 유영
  • 승인 2016.06.06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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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 유영 기자] 캔디 고 씨와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났다. 한국을 그리워하며 20여 년을 살아온 캔디 씨의 진짜 이야기는 미국에서의 삶일 텐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유명인의 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캔디 고’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차별, 미국에서의 첫 번째 경험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하지만 이민자에게 가장 가혹한 나라이기도 하다. 자유가 강조되어서 그런지 차별도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하다. 특히 유색인종이나 소수자가 느껴야 하는 차별은 법으로 금지해야 할 만큼 여전히 큰 사회 문제로 남았다. 인종이 뒤섞여 살아가는 대표적인 다문화, 다인종 사회에서 차별이 일상과  같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20년 전, 11세에 어머니를 따라와야 했던 캔디 씨가 미국에서 처음 만난 것 역시 인종 차별과 유색인종의 고단함이었다.

캔디 씨 가족은 뉴저지 주의 한 도시에 처음 정착했다. 그는 바로 학교에 들어가야 해서 가톨릭 계열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남미에서 온 히스패닉들이 정착한 가난한 동네에 있는 학교였다. 학교 급식은 먹기 힘들 정도로 맛과 상태가 좋지 않았다. 동양인도 거의 없었다. 영어를 제대로 못해 학교에서 늘 놀림당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20년 전, 11세에 어머니를 따라와야 했던 캔디 씨가 미국에서 처음 만난 것 역시 인종 차별과 유색인종의 고단함이었다. ⓒ <뉴스 M> 유영

생활 형편도 풍족하지 않았다. 싱글맘인 어머니는 어린 남매와 살 작은 월셋집을 구했다. 나쁜 집 주인을 만나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캔디 씨가 사는 집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락날락 거렸다. 더 나은 환경과 집을 원했지만 찾지 못했다. 예술 활동으로 아이들과 먹고살아야 하는 어머니만의 경제 활동으로는 여유가 없었다.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 시기로 기억한다.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는 엄마를 보며 10대를 지내서 그런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숙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얼마 후 전학 간 학교에서도 차별당하는 건 여전했다. 동양인들은 어디 속할 곳이 없다. 보통 미국은 아주 크게 흑인과 백인으로 나뉘는데, 미국에서 자란 동양인은 흑인도 백인도 아니다. 그저 소수자일 뿐이다.

10대에 경험한 차별은 엄청난 문화 충격이었다. 물론 이러한 경험으로 배운 것도 많다. 지금은 사람을 어느 곳에 강제로 소속하게 하는 일이 굉장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에서 속하지 않은 사람은 소수자로 전락하고, 강제로 소속된 사람은 차별을 경험한다. 차별이 시스템으로 존재한다. 흑인이 백인보다 더 많이 감옥에 가는 이유는 범죄율이 더 높아서가 아니라 피부가 검다는 편견 때문이다. 견고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편견과 차별이 낳은 결과다.”

캔디 씨가 어린 시절부터 사회과 사람을 두고 지금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차별을 경험했지만, 한국에서 교육받았던 내용과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기도 했다. 지난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했던 아버지의 교육관이 무의식중에 내면화한 경향이 없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거리의 청소부처럼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돈이 있으면 훌륭한 사람이고, 가난하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생각보다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는 캔디 씨와 남동생 등하교를 잘 챙겨주지 못했다. 일 때문에 늘 바빴다. 남매의 등하교는 다른 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동생 학우 어머니가 도움을 주셨다. 어머니가 데리러 올 때까지 그 집에서 머물렀다. 문제는 캔디 씨가 운전하는 아주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 때문이지 화가 난 어린 캔디 씨는 어머니에게 그 사람이 싫다고 이야기했다. 

“어머니에게 그 아주머니를 싫다고 따지며, ‘가난한 주제에’라고 비하했다. 한국에서 자란 영향으로 재산의 규모가 사람을 가르는 흑백논리로 이어졌다. 아버지에게 받은 교육이 무의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부자는 훌륭한 사람이고, 가난하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처음으로 나를 질책하며 무척 혼냈다. 한 번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던 분이 아니었다. 그런 어머니가 ‘돈이 없다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다시 가르쳤다. 가난한 사람은 그 사람이 나쁘거나 죄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 이유가 더 많다고 말씀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창피한 일이다.”

처음 미국에 온 많은 한인이 경험하는 어려움을 캔디 씨 가족도 동일하게 겪었다.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 외손녀의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캔디 씨는 한국 시민들의 선입견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포스코를 소유했던 재벌이 아니다. 박정희가 시킨 일을 했던 공무원이었다. 주식도 처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하나도 가져본 적이 없다. 돌아가셨을 때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유산으로 남겨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 할아버지는 돈이 없었다. 한국 언론에서도 많이 보도한 사실이다. 

재벌 집 자식으로 바라보는 편견은 너무 억울하다. 재벌 집안에서 태어나서 편하게 자랐고, 편하게 생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만약 그런 호사를 누렸으면 지금 사는 월셋집에 살지 않고, 훨씬 크고 좋은 빌딩에서 살았을 것이다. 월세 내는 걱정도 안 하고, 남들처럼 비싸고 좋은 옷도 입고, 학교도 장학금 걱정 안 하고 다녔을 것이다.

돈이 없어서 '막노동'을 하면서 굶고 지낸 적도 있었다. 하루 최소 8시간 혹사하는 육체노동으로 돈을 벌었다. 하루 일 끝나면 온 몸이 쑤시고 아파도 다음 날 다시 나가야 하는 일을 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힘들게 자랐다. 할아버지가 재벌이었으면 내가 그런 생활을 하게 놔두었을까. 재벌 집안, 그런 집안의 손녀라는 편견과 선입견이 안타깝다."

캔디 고 씨가 처음으로 공개한 가족 사진. 그는 스마트폰에 사진을 저장해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가족 사진을 본다고 한다. 힘들게 지낸 시절 가족 사진이 큰 위안을 주었던 까닭이다. 외할아버지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어린 캔디 고 씨의 사진. (사진 제공 캔디 고)

예술가에서 비평가로

고단한 삶을 살면서 지속한 예술과 글쓰기는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자기 만족감에 숙명처럼 시작한 그림과 글쓰기였지만, 전문적으로 예술 비평을 배우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예술가에서 비평가로 진로를 바꾼 경험은 자신만의 세계를 강조하던 사람에서 소통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먼저 예술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예술가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림 그리는 일은 캔디 씨에게 일상과 같았다. 심지어 16살 정도에는 스스로 천재라고 여기며, 자기 작품 세계에 빠져들기도 했다.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 몰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심취했다. 그만큼 그림 그리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 큐레이터나 예술가를 꿈꾸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사실 학창시절에는 예술 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예술을 숙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경험한 차별과 내성적인 성격이 더해져 자기중심적 작품이 많았다. 결국 문학과 조형예술로 대학에 진학했다. 

새롭게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사건도 대학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기말 전시회 기간이었다. 어머니가 가깝게 지내는 미술 비평가와 전시회를 보러 왔다. 그런데 그 비평가가 작품을 보고, 충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노골적인 비판은 없었지만,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금새 알 수 있었다. 

“자기중심적이고 도취가 가득한 내 작품을 꼬집어 주었다. 그때는 무척 큰 상처를 받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분이 정말 정확하게 판단했던 것이다. 그분의 지적을 듣고는 너무 마음 아파서, 눈물만 흘렸다. 마음을 추스르고 ‘당신은 대체 누구냐, 내 작품을 나보다 더 잘 평가할 정도로 잘 아느냐’고 물었다. 나를 울린 비평가에게 복수한다는 마음으로 미술 비평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웃음)

그분이 내게 SVA(School of Visual Arts)에서 예술 비평과 글쓰기 과정을 배울 수 있도록 추천해 주었다. 예술 비평은 공부할수록 매력이 있었다. 시각적인 것을 글로 표현하는 작업이 너무 흥미로웠다. 그리고 예술과 우리 삶이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사소한 부분까지 예술과 융합해 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히 공부했다.”

자기중심적이고 도취가 가득한 내 작품을 꼬집어 주었다. 그때는 무척 큰 상처를 받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분이 정말 정확하게 판단했던 것이다. 예술 비평은 공부할수록 매력이 있었다. 시각적인 것을 글로 표현하는 작업이 너무 흥미로웠다. 그리고 예술과 우리 삶이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 <뉴스 M> 경소영

사회 문제 해결을 돕는 예술 

예술과 대중, 예술과 사회는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에 넘쳐나는 시각 정보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대중 예술을 대표하는 광고나 영화만 보아도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색상 하나를 사용해도 심리에 영향을 끼치려 의도를 담는다. 정작 소비자들은 자신이 보고 느낀 정보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중요성을 가볍게 여긴다. 캔디 씨는 사람들이 ‘시각 매체’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과 환경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예술은 우리 삶이다.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광고, 뮤직비디오, 텔레비전 영상 등도 모두 시각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다. 연출하는 사람들은 색을 좌우하는 조명까지 예민하게 신경 쓴다. 많은 시각 정보가 담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잘 관찰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우리는 보는 대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만, 시각은 여러 요소로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제대로 보기 위한 훈련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New York Times>의 기사가 시각적 판단을 돕는 훈련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난 4월 신문은 뉴욕 경찰들이 예술 훈련을 받는다고 보도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예술 작품을 보고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훈련했다. 경찰은 빠른 시각적 판단이 중요한데, 선입견에 지배받지 않고 관찰하며 판단하는 일에 이 훈련이 큰 도움을 준다. 

최근 미국 유색 인종을 대상으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경찰 총격 사건들은 주로 잘못된 시각적 판단에 기인한다. 가령 흑인들이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려고 한다면, 경찰은 총을 꺼내려 한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크다. 반면 같은 상황에서 백인들이 주머니에 손을 댄다면 총이 아닌 휴대전화나 다른 것을 꺼낸다고 생각한다. 경찰들이 냉철하게 시각적 감각을 구별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상황이다. 

캔디 씨는 대중이 시각 매체에 휘둘리지 않도록 시각 정보를 구별하도록 돕고 싶은 목표가 있다. 예술은 결국 모든 사람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지 현혹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이를 위해 선택한 방법 역시 예술과 글이다.

“시각 예술은 강력한 소통, 그 자체다. 시각은 무엇보다 빠르다. 글은 읽어야 하지만 시각 정보는 빠르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무언가 보아야 글을 쓸 수 있고, 글을 읽을 때도 무언가를 먼저 본다.(기사에서도 사진이 내용보다 더 빠르게 전달된다.) 그만큼 시각 매체가 중요하다. 그리고 글은 소통의 중심이다. 우리는 누구나 SNS에 자기 생각을 쓸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그 글을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산다.

글의 잠재력을 토대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싶다. 마음과 감정을 움직이는 글은 더 강력한 힘이 있다.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는 글은 잠재력이 어마어마하다. 악성 댓글이 사회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글에 진심을 담는 일이 중요하다. 진심이 담긴 글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예술 집단 '크리에이트'에서 활동하는 캔디 고 씨는 시각 정보에 휘둘리지 않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 지난 4월에는 세월호 2주기를 맞아 크리에이트가 제작한 작품을 들고 길을 걸으며 뉴욕에서 세월호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사진 제공 캔디 고)

‘천조국’ 미국? NO

누리꾼들은 종종 미국을 ‘천조국’이라고 부른다. 사대주의적 국가 현실을 지적한 표현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초강대국으로 추앙하는 표현으로도 사용한다. 다른 나라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영해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어린시절 미국으로 건너온 캔디 씨도 비슷한 생각이 강했다. 한국에서도 그렇게 배웠고, 미국에서도 같은 생각을 하도록 교육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에 살면 미국은 정말 살기 좋은 나라라는 세뇌를 받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최근에 본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Where to invade next’를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영화는 감독이 유럽, 터키, 남아공 등 다른 나라를 방문해서 미국과 비교한다. 방문한 나라가 미국보다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보여준다. 많은 사람이 품은 환상과 다르게 미국이 얼마나 살기 끔찍한 나라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한 예로 다른 나라는 개인 의료보험이 없이도 아프면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학생은 학교를 통해 의료보험을 들어서 그나마 괜찮지만, 사회에 나오면 의료보험은 큰 짐이다. 아주 좋은 대기업에 취업하지 못하면 버젓한 의료보험 하나 유지하기 쉽지 않다. 미국에서 병은 정말 엄청난 시련이다. 의사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150~200달러를 내야 한다. 만약 보험이 없다면 아파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인종 차별도 뺄 수 없는 사회 문제다. 미국은 피부색으로 그 사람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나라다. 뉴욕에서도 다른 민족 고유문화의 상대성은 잘 인정하지 않는다.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일이 허다하다. 흑인들이 감옥에 더 많이 들어간다고 이미 말했다. 이 시스템도 문제다. 수감되면 출소해도 선거권을 박탈당하는데, 보이지 않는 노예 생활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수감자들은 가구 제작 등의 노동에 동원되는데, 한 시간에 2센트도 받지 못하는 심각한 노동착취를 당한다.

거기에 여성 차별도 심각하게 존재한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black female)이 사회에서 가장 약자라고 볼 수 있다. 흑인 여성은 제멋대로고, 시끄럽고, 난폭하다는 선입견이 강하다. 편견이 여전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동양 여성이 살기에도 쉬운 사회가 아니다. 동양 여성은 고분고분하고 늘 웃는 표정에 친절하다는 선입견이 있다. 평소 주변 사람들도 나에게 이러한 모습을 기대했다. 그래서 난 잘 웃지 않는다. 그들의 선입견에 맞춰 쉽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차별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사회 문제로 커졌다.”

미국은 여성 차별도 심각하게 존재한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black female)이 사회에서 가장 약자라고 볼 수 있다. 동양 여성은 고분고분하고 늘 웃는 표정에 친절하다는 선입견이 있다. 평소 주변 사람들도 나에게 이러한 모습을 기대했다. 그래서 난 잘 웃지 않는다. 그들의 선입견에 맞춰 쉽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 <뉴스 M> 경소영

미래를 준비하다

차별과 편견 속에 지내온 캔디 씨는 지금 전공하는 ‘법’으로 무언가 바꾸고 싶은 마음이 크다. 예술과 비평, 글쓰기, 법으로 세상 변화에 일조하는, 아니 옆에서 차별받는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함께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 물론 미국에서 변호사는 다른 나라보다 더 중요하고, 세속적 성공을 거두기 좋은 직업이니 쉽지 않은 선택일 테지만 말이다. 

“아직 정확하게 어떤 분야로 나가야겠다고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확실하게 마음먹은 바가 있다. ‘사람을 돕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잘 사용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관심 분야를 잘 찾고 싶다. 사람을 돕기 위해 법을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힘이 되는지 잘 알고 있다. 법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이유다. 돈과 명예만 추구하는 미국 법대생들 중에도 타인을 돕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도 계속 관심을 기울이려고 한다. 내가 비록 한국 시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일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런 일들이 더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시민이 아니기에 제삼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생각한다. 항상 옳을 수 없겠지만, 한국을 사랑하는 제삼자가 바라보는 눈이 장점으로 작용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캔디 씨는 자신에게 덧씌워진 선입견과 차별에 맞서며 지내왔다. 지난 2014년 한국에서 알려진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외손녀, 고승덕 전 서울시 교육감 후보의 딸이라는 꼬리표는 비교적 최근 얻은 선입견이다. 차별의 땅 미국에서 동양인, 여성이라는 꼬리표와 더 오래 싸워왔다.

그런 그에게 소통은 그야말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차별과 선입견에 맞서 동등한 입장이 되려는 외침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고, 글쓰기와 비평으로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왔다. 지금은 법을 공부하며 억울한 처지에 놓인 다른 사람을 돕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캔디 씨는 상대방이 바라보는 시각에 상관없이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들장미 소녀 캔디’를 좋아해 캔디라는 이름을 지어준 어머니의 바람처럼 용기를 잃지 않는 희망의 사람으로 살고 있다.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세월호는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함께 행동하는 캔디 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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