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테러리즘이 될 수 있다"
“진리가 테러리즘이 될 수 있다"
  • 양재영
  • 승인 2016.06.0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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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강남순 교수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종교] LA 강연회 열려
텍사스 크리스천대 강남순교수 강연회가 LA 향린교회(곽건용 목사)에서 열렸다. ‘정의와 연민의 종교를 향하여 - 종교의 미래, 미래의 종교'라는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서 강 교수는 자신의 저서 <코스모폴리타니즘과 종교>를 중심으로 오늘날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는 가치와 해석에 대해 풀어나갔다. <미주 뉴스앤조이>는  강교수의 강의를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해봤다. - <편집자 주>
텍사스 크리스천대 강남순교수 강연회가 LA 향린교회에서 열렸다.© <미주 뉴스앤조이>

- 신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가?

제 아버님은 의사이시면서 장로님이셨다. 그분에게 제가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하니 말리셨다. 그렇게 신학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목사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으로 생각하시는 분이셨는데, 항상 교회와 신앙에 비판적이었던 저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저는 한국신학대학(한신대)에서 공부하면서, 늘 화두처럼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신학교에서 많은 실망과 좌충우돌이 있었다. 그때,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는 의미를 생각하게 됐고, 종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 한국에서 여성으로서 신학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혜화동에 사제 평생교육원이란 곳에서 가톨릭 신부님들에게 ‘여성과 종교'라는 과목을 가르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여성 페미니스트 신학자가 없어서, 제가 여성신학을 처음 가르쳤다.

처음 강의실에 들어가니 신부님들이 저를 안 쳐다보더라. 나중에 그분들이 말하는 데, 개신교 사람에게 배운 것도 처음이지만, 여자에게 배운 것도 처음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시선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는 것이다.

소위 진보적이라는 분들에게도 또 다른 측면들이 늘 존재한다. 미국에서 보면 인종적 문제에 자유로운 분들이 성문제에 무관심한 분들도 있다. 종교가 '억압자'의 역할과 '해방자'의 역할을 동시에 해왔다. 사실 종교나 개인, 교회도 두 가지 가능성을 다같이 가지고 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해방적 역할보다 억압적 역할을 너무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한숨이 나올때가 많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역할을 망각하고, 복음을 자본주의화하고 있다. 진보적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억압적 역할을 할때도 많다. 여성으로서 신학을 공부할 때도 이런 측면에서의 문제가 적지 않았다.  

-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결국 책을 읽거나 공부한다는 것의 중요한 목적은, 자기 속에 있는 '인식론적 사각지대'를 깨는 것이라고 본다.  

저같은 여자는 인종적 소수자인데, 다른 면으로 보면 다양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저같은 여성의 경우에도 인식론적 사각지대가 있을 것이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사각지대를 깨뜨리는 것이 책을 읽고, 토론하고,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에대한 이해는 말하는 사람마다 다른 견해가 있을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단일한 이해를 가지기 어렵다. 동일한 성경을 보면서도 '억압자'의 역할로 해석하기도 하며, 또 다른 편에서는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의 이미지는 대게 단일화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면서도,  여성 안수나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가 존재한다. 

제가 학교에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를 가르치고 있다. 데리다는 ‘종교는 책임성이다’라고 말했다. 종교는 책임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책임성은 '타자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데리다를 무신론자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데리다를 ‘기도와 눈물의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전통적인 기도방식인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둘 수는 있다.

- 기독교라는 종교 역시 '책임성'으로 봐야 하는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종교 자체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예수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복음서는 예수가 직접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분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구분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예수의 복음의 핵심은 '책임성'이라는 점이다.  ‘책임성'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타자에 대한 책임과 자기에 대한 책임’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고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자기 사랑’이라는 것은 자명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과 '이기성'이라는 것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자기 사랑’이 ‘이기적’이라 착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차별적으로 희생 이데올로기를 강요했고, 죄인이 양산되기도 했다. 오늘날 교회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희생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 그리고, 그런 희생 이데올로기가 특히 여성에게 많이 강조되어 왔다.  

종교의 책임성은 나 자신의 책임성을 철저히 가지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책임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쳤다고 볼 수 있다. 그게 종교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텍사스 크리스천대 강남순교수 강연회가 LA 향린교회에서 열렸다.© <미주 뉴스앤조이>

- ‘진리의 테러리즘'이란 표현에 대해 설명해달라.

성서는 그 자체가 억압적인 전통과 함께 해방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의 일관성 있는 단일한 체계라는 것을 깰 필요가 있다. 성경은  한 사람이 쓴 게 아니며, 인간이 쓴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적 정황과 가치가 반영되어 있다.

인간의 인식능력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절대적인 것을 파악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절대적 진리가 보편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순간에 폭력이 행사된다.

그래서 진정한 종교를 바라보는 사람은 성경이 상충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흠없는 사람이 아니다. 요즘 시대로 보면 첩도 있었고, 거짓말도 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충적 모습처럼, 성경 자체도 다양한 가치를 담고 있다.

기독교는 21세기 서구세계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기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래서, 때론 기독교가 악마화, 폭력화의 기재로 쓰여 오기도 했다. 기독교가 가진 책임성을 터득하지 않으면 또다른 억압적 기재로 작동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중 하나는 권력이 있는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절대적 진리가 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교리를 만드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의 인식의 한계를 보지 못하고, 진리 주장을 절대화해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철저히 배타한다. 과거 이교도들이나 과학자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가 그것이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주장이 절대화되는 그 순간에 종교가 폭력과 테러로 작동한다.

- 종교가 폭력성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종교가 폭력적으로 되는 쉬운 이유는 ‘진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이 내 삶 속에서 어떤 작동을 하는가?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촛점을 둬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할 때 폭력적이 된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그런 고백은 별로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도 그런 고백을 한다. 중세에 마녀 화형 자료를 보면  당시 수사들이 수십명의 마녀들을 화형에 처하고 난 후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했다”고 말하며, "진리에 철저히 따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가치를 성서 속에서 끄집어 내어 정당화시키는 예는 아주 많다. 성서를 통해 노예제도, 여성문제를  비판해온 것이 한 예이다.

성서 안에는 상충된 메시지가 많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종교의 책임성을 확대해 해석하면 ‘무수히 많은 소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성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수는 기독교의 영원한 참고서이다. 하지만, 예수는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다만 사랑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 코스모폴리타니즘이란 무엇인가?

코스모폴리타니즘에서는 두가지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개별성의 윤리'이다.

'개별성의 윤리'라는 것은 대체 불가능성이다. 자식을 길러 보신 분들은 잘 알 것이다.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한 명을 없애고 생각할 수는 없다. 자식들 한명 한명이 대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개별적 존재이면서 모든 존재들이 가진 ‘평등성’이다. 이게 민주주의의 가치이다. 평등성은 정의와 연결된다. 그러나 그런 평등성이 개별성을 보지 못하는 평등일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가치는 '개별성의 윤리'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 코스모폴리타니즘과 모더니즘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더니즘의 중요한 가치는 개체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더니즘은 모든 인간의 평등에서 배제시킨 것이 많았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에서 주장한 ‘모든 인간의 평등'에서 여성, 무식자 등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은 모더니즘이 개체성을 부각시키다보니 ‘나'와 ‘너'가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완한다. 모더니즘은 함께 존재하는 실존이라는 ‘공동체' 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공동체의 윤리가 개체의 윤리를 억누를 수 있다는 점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고, 교회를 위해 개인을 억누를 수 있다. 커다란 하나의 원리를 놓고, 그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구체적 정황 속에서 억눌리고 무시되는 것이 많다. 그점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공격하는 것이다.

- 코스모폴리타니즘이 한국의 '홍익인간'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홍익인간'과 같은 보편주의의 한계는 개별성의 윤리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별적 존재의 얼굴을 보지 않고 집단화하는 문제가 있다.

홍익인간이라는 단어 속에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권력자들을 위한 홍익인간이 될 수도 있다.홍익인간을 외치는 한국에서 공교육을 보면, 초등학교부터 개별적 아이들의 목소리가 무수하게 억눌려진다.

저는 한국과 독일, 미국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시켰다. 그런데, 아이들이 한국에서 교육 받는 것을 가장 어려워했다. 한국의 교육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아이들의 개별성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 물음들을 다 묵살시키고 문제아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를 테면 우리 아이가 “왜 일기장을 공개해야 하지요?”라고 물었다가 문제가 많은 아이가 된 경우가 있다.

홍익인간이라는 멋있는 단어 속에서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소위 권력있는 사람들의 홍익인간이 될 수도 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의 화두는 그런 '개별성의 윤리'이다. 한국에서의 가치의 한계를 보면서 이런 코스모폴리타니즘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잘 살리면, 가정, 학교 , 직장에서 우리를 좀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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