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박통의 죽음과 광주
[연재] 박통의 죽음과 광주
  • 시드니
  • 승인 2016.06.15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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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민초의 반세기 전투기 (2)

구파발 시절 

배우 이은주가 나왔던 <안녕? UFO>라는 영화가 있었다.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영화의 무대가 한 때 나의 삶의 현장이었던 구파발이었기 때문이다. 40년 전 당시, 서울의 끝인 갈현동 박석고개를 넘어있던 구파발을 아는 서울 사람은 드물었다. 경기도 고양군이었던 구파발은, 토박이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서울에서 살 수가 없어 밀려 온 사람들, 그러니까 실패한 사람들이 이사 오는 곳이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도 1969년도엔가 구파발의 월세 방으로 이사를 갔다. 지금의 구파발역에서 왼쪽으로 5분 정도 올라가면 있는 물푸레 골은, 내가 구파발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던 1970년도엔 아낙네들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로 빨래를 하던 수려한 골짜기였다. 당시는 공공기관의 행정력이 무허가 주택까진 미치지 못할 때라 그린벨트였던 물푸레 골의 주인인 김 모씨는 무허가 건물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레슬링 선수들과 주먹깨나 쓰는 사람들에게 관리를 맡겼다.

그런데 이들이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얼마씩 받고 집을 짓게 해줬고, 물푸레 골에 무허가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관리인에게 돈을 쥐어 주고, 더 이상 집을 지을 수가 없는 제일 높은 꼭대기에 벽돌이 아닌 블럭으로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집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지은 집이 결과적으로 아버지 살아계실 때 장만했던 유일한 내 집이었다. 

출처- 헝그리포토 '뉴타운개발로 사라진 구파발 물푸레골'

1971년에 선거가 끝난 후 연락 사무실이 폐쇄되어 할 일이 없어졌던 나는 그 동안 모았던 돈으로 집 옆의 산비탈을 깎아내서 집터를 넓히고 내가 살 방을 짓기로 했다. 블럭으로 사면의 벽을 쌓고 슬레트를 얹으면 그만인 소규모 공사였지만, 리어카 하나도 끌고 올라갈 수 없는 언덕이었기 때문에 모든 건축자재를 등에 지고 옮겨야 했다. 방 한 칸을 짓고 난 다음에 시간이 나는 대로 망치와 정으로 바위를 파서 우물을 만들고, 우물을 파느라고 쪼아낸 바위로 석축을 쌓아 마당을 넓혔다. 그린벨트를 훼손한 셈이었지만 나무는 다치게 하지 않고 마당을 넓히느라고 애를 썼다.

암자 같은 이 집은 순전히 내 힘으로 지은 집인 데서도 의미가 있었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그 집을 짓다가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집 때문에 자주 의논을 하러 가던 동네의 신출내기 목수 집에는 옆집의 처녀가 자주 와 있었다. 우리 집 바로 뒤에 있는 빨래터에 자주 빨래를 하러 오던 처녀였다. 아내도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어서 우리처럼 물푸레 골에서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한창인 24살에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친구들과 마음 놓고 어울리지도 못하고 집에서 살림을 하던 처지였다. 탈출구가 없던 시절, 똑같이 어려운 처지였던 아내와 나는 동갑내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쉽게 가까워졌다.

나는 구파발에 살면서 시장 2층에 있는 아주 가난한 개척교회에 나갔다. 그 교회에서 피터슨이라는 선교사를 만났다. 피터슨은 내 생애 처음으로 알게 된 미국인이었다. 피터슨은 연세대학교 한국어 학당에서 1년 간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그 교회로 실습을 나오고 있었다. 교인이 3~40 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회라서 교인 중에 단 2명만 대학물을 먹었고, 그 중 한 명인 나는 아쉬운 대로 그의 통역을 하게 되었다. 객지에 나와서 피터슨이 고생 많이 했을 것이다.

출처- KMC뉴스

평상시와 같이 피터슨은 설교를 했고, 나는 평상시와 같이 미리 원고를 받아서 통역을 하던 날이었다. 모두 일어서서 마지막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피터슨이 긴장을 하더니 나에게 귓속말로 “지 선생! 제 축도가 차에 있습니다."라면서 차 열쇠를 줬다. 축도가 차에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영어로 했다면 쉽게 알아들었을 터인데 한국말로 하니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줄 몰랐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어려서부터 계모 밑에서 눈치 밥을 먹고 살아서 눈치 하면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관운장의 적토마 뺨을 칠 정도로 빠른 내가 아닌가? 피터슨의 얘기는 찬송가 뒤에 축도를 영어발음으로 써놓고 읽는데 그 찬송가를 차에 두고 왔다는 거였다. 눈치를 채고 강대상을 내려와 교회 앞길에 세워 놓은 피터슨의 차까지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서 찬송가책을 가지고 왔다. 교회가 상가 2층에 있었고 바로 앞 도로에 차가 있었던 터라 다행히 피터슨은 한국어 축도를 할 수 있었다.

피터슨과 친해지자 그는 나를 연희동에 있는 선교사촌으로 초대했다. 미국에서 누리던 생활수준을 그대로 누리고 있는 선교사들의 생활환경은 당시 가난한 우리에겐 눈이 휘둥그러질만한 것이었다. 집을 나오면서 이 친구가 “지 선생! 우리 집에 함부로 오십시오.”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아무리 우리가 가난해도 그렇지 내가 저희 집에 뭐 얻어먹으러 가는 줄 아나 괘씸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의 뜻은 ‘아무 때나 오라’는 뜻이었다. 그 친구는 한국말로 나는 영어로 이야기를 했으니 피차 오해할 만한 사이였다.

그 후 나는 군대를 갔고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20년이 지난 1989년에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5공 청문회에 광주 항쟁 조사위원회의 증인으로 섰다는 소식이었다. 피터슨은 나랑 헤어진 후 광주로 가서 선교사로서 사역을 하다가, 1980년 광주 학살 때 헬기에서 사격하는 장면을 찍었다고 했다. 1989년에 피터슨은 이미 은퇴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었지만, 증언을 하기 위해서 청문회의 초청을 받아 왔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그 정보를 들었을 때는 건강이 좋지 않은 피터슨이 증언을 마치고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와 뜻 깊은 재회를 하진 못했다.

사람이 죽어도 슬프지가 않다니

그 동안 딴지에 몇 가지 글을 연재하면서 내가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댓글에 자꾸 나를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한 때 목사였다. 한 번 안수를 받으면 물릴 수 없는 목사. 나는 잘 몰라서 신학대학을 나오고 목사가 되기는 했지만(나처럼 함부로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목사로 오래 밥을 벌어먹지 못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많은 딴지스들이 생각하는 흔하디 흔한 직업적 목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야기는 목사가 목회를 해서 먹고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길거리 도사가 좌충우돌하면서 거칠게 세상과 싸우면서 살아온 이야기다. 

군대를 다녀와서 신학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는 유신체제였기 때문에 학생회도 군사편제로 짜인 ‘학도호국단’이었다. 종합대학의 총학생회장은 사단장, 단과대학학생회장은 연대장이라고 호칭하고 이 간부들을 학교에서 임명했었다. 내가 다니고 있던 신학대학은 학생수가 200여 명 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였기 때문에 학생회장을 중대장이라고 불렀다.

학도호국단 중대장을 임명할 때였다. 군대식 편제이기 때문에 대장은 어느 대학이나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 맡는 것이 통례였고, 내 위에 학년의 중대장도 예비군이었다. 우리 학년에서는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 나 혼자였던 데다 나이도 내가 제일 많았고 학점도 간부가 되기에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내가 될 줄 알았고, 학생처장도 내가 해야 할 거라고 했는데, 막상 신학기가 되자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나이 어린 학생이 중대장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30살이나 된 늙은 학생의 입장에서 그까짓 중대장이 되지 못한 건 섭섭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어렵게 학교를 다닐 때라 중대장에게 주는 등록금 면제 혜택을 놓친 것이 무지하게 유감스러웠다. 학장의 입장에서는 나같이 성깔 있어 보이는 인물보다 양순한 학생이 중대장이 되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나를 정말 불쾌하게 만든 것은 나에게 맡으라던 훈련부장 자리였다. 중대장이라면 몰라도 21, 22살짜리 애들하고 같이 호국단 간부 활동을 하는 것이 거북해서 안 하겠다고 했더니, 훈련부장은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 해야 한다고 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더욱 열 받는 일은 방학 기간에 호국단 중대장은 학생간부 수련차 대만으로 해외연수를 가는데 나는 훈련부장이기 때문에 새마을연수원으로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원에 있는 새마을 교육원에 가보니 그때까지 내가 봤던 것 중에서 가장 최상의 교육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새마을’ 상표가 붙은 것에는 무조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원해줄 때였기 때문에 연수원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이 나무랄 데 없이 세련되고 풍족했다. 예를 들면 요즘 같은 복사기가 없던 30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2주간의 교육이 끝나는 수료식 날에 벌써 그간의 활동을 담은 앨범을 인쇄해 나눠줄 정도였다. 비록 나는 정문을 나오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196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는 새마을연수원에서 10년 만에 학생들과 어울리는 셈이었다. 대부분이 학교가 믿을만한 학생들만 뽑아서 간부를 맡겼기 때문에 체제 비판적이거나 반항적인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수동적이고 무기력하며 냉소적이었다. 

돌발사건이라면 어용경제학자로 유명했던 연세대학교의 한기만 교수가 ‘3공의 경제치적’에 대해서 강연을 하는 시간에 고대생 한 명이 벌떡 일어서더니 “씹할 놈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누구를 놀리는 거야, 뭐야.”하고 소리를 지른 사건이 발생한 게 다였다.

나같이 경제에 무지한 사람의 귀에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는 부분이 있던데 경제를 전공하고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학생은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을 거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고대생의 발작적 거부반응을 이해를 하면서도 그 학생에게 혹시 어떤 불이익이 오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분위기였다.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지만, 연수원 교수들은 토론의 자유가 얼마든지 보장되어 있으니까 차근차근 토론을 하자며 발작을 일으킨 학생을 진정시켰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방에는 먼저 거쳐 간 수료생들이 쓴 수료소감문이라는 것을 비치해 놓았다. 나중에 오는 사람들이 읽어보도록 해놓았기에 한번 훑어보았다. 그 중에 서울법대 학생회 간부 학생이 쓴 글이 있었다. 

“이제까지 과에서 1년에 한두 명씩 공부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학업을 그만두는 동료가 생길 때 마다 안됐다는 생각 보다는 ‘아, 경쟁자가 하나 줄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는 동안 그 동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돌아간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세상에, 후회하고 반성할 것도 수준이 있지 대학생의 의식수준이 새마을 교육을 받고 바뀔 정도였다는 것이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비록 반성을 한다고 했지만 법대 3학년생이 될 때까지 이런 정도의 생각을 했던 사람이 반성을 하면 얼마나 했겠나 싶었다. 그 정도의 윤리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법고시에 패스를 해서 판사나 검사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시간이 지나 1979년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용인에 있는 시골 교회에서 첫 목회를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10월 26일에 3살 먹은 큰 아이를 데리고 안성에 있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전도사가 목회를 하는 교회에 놀러 갔었다. 그 집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정규 방송이 중단되고 ‘박통이 유고’라는 긴급뉴스가 나왔다. 내가 그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아나운서가 긴장된 표정으로 박정희의 죽음을 알리는 순간 집주인 전도사와 내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소리가 "할렐루야!"였기 때문이다. 

국가의 비상사태가 벌어졌으니 서둘러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시외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하늘과 땅이 새로워 보이고 들이 마시는 공기도 다른 것 같아 연달아 심호흡을 했다. 무릎에 앉아 있던 어린 아들이 내 표정을 보곤, “아빠? 왜 그래?”하고 물어서 “아니. 그냥”이라고 했다. 

그런데 두고두고 생각해 보아도 신기한 것은 평소에 정치에 대한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 전도사도 ‘할렐루야!’를 외친 것이다. 분명히 '헬렐레'가 아니고 '할렐루야‘였다. 나에게 그 사건은 유신의 분위기가 보이지 않게 사회를 억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줬다. 

바닥에서

다음 해인 1980년 3월,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선인 황산이라는 곳으로 교회를 옮겼다. 황산은 서울의 서쪽 끝이었지만 시내버스 한 번만 타면 당시 민주화 운동의 메카였던 종로5가의 기독교 회관으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언론이 통제된 여건 속에서도 사실에 가까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교인의 대부분은 시골에서 올라와 공장의 기숙사가 아니면 자취하는 어린 노동자들이었다. 겨우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올라온 가냘픈 소녀들이었다. 한참 잘 먹고, 잘 자야만 정상적으로 발육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재봉틀대나 자기 체격보다 몇 배나 큰 직물기 앞에 앉아 밤을 꼬박 새는 일을 밥 먹듯 했다. 어쩌다 제품 불량이 나거나 몸이 아파서 지각이라도 하는 날에는 남자 기사들에게 쌍스런 욕을 얻어먹는다든지 심하면 뺨을 얻어맞기도 했다. 할당된 생산량을 달성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재봉틀을 돌리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나는 서서히 현실에 눈 뜨게 되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주일날은 기숙사에서 밥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일요일에 딱히 점심 먹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모이면 항상 먹는 것이 문제였고, 그러다 보니 식사 시간이 되면 무엇이든지 함께 먹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어떤 때는 교회에서 저녁까지 먹을 때도 있었다. 예배가 끝나면 점심에는 항상 라면을 끓이거나 라면을 살 돈이 없으면 국수를 끓였다. 나는 주일마다 라면을 끓이는 문제로 집사람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국수를 끓이면 돈이 덜 들지만 교인들이 평소에 국수를 많이 먹기 때문에 주일날만이라도 라면을 끓이자는 나의 의견과 국수를 삶자는 아내와의 의견 차이 때문이었다. 당시의 노동자들에게는 라면조차도 일주일 중에 가장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어떤 교인들은 기숙사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교회에서 잠을 자고 가기도 했다. 그들은 한 달에 두 번밖에 쉬지 못하는 모처럼의 일요일이 와도 딱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들의 생활이 너무나 힘겹고 딱하게 보였지만 정작 본인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자기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 이외에 미처 딴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체로 어린 노동자들은 그렇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면서 사춘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YH 출신도 있었다. 

10.26의 도화선이 된,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들이 정당의 당사에서 농성을 했던 그 ‘YH 사건’의 출신들도 몇 있었다.

그들이 서울의 변두리인 우리 교회까지 흘러 들어온 이유는 근처에 정윤 고등학교라는 야간 수업이 있는 가난한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배움의 끈을 놓기가 너무도 억울해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기어코 학업을 마쳤다. 

공장들은 노동자들이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것을 막기 위해, 기숙사를 군대처럼 엄하게 통제했다. 그래서 회사를 옮기려면 사전에 치밀하게 탈출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외부에서 탈출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과 약속을 한 다음, 담장 너머로 짐을 집어 던지면 밖에 있던 사람이 짐을 받아서 보관했다가 나중에 몸만 빠져 나오는 식이었다. 교회의 몇 명 안 되는 남자 청년들은 종종 여자 청년들의 탈출을 도와주는 공범이 되었고, 교회는 이들의 짐을 보관해 두는 보관소가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헌법에 엄연히 보장되어 있는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지만 당시 노동자들은 감히 그런 현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2000년대에는 순자, 영자, 순희 등의 이름들이 꾸엉, 뚜엉, 홍잉 등의 낯선 이름들로 바뀌고 있을 뿐 세상의 본질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 시골의 인력이 동남아 인력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광주 항쟁

1980년 5월 31일, 서강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김의기라는 학생이 전날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 군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써서 그 전날 6층에 있는 NCC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밤새워 등사기를 밀었으며, 그 글을 창문으로 뿌리면서 자신도 뛰어내렸다. 당시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모르고 온갖 소문만 무성했던 터라, 김 군의 소식을 듣고 종로5가 기독교 회관으로 달려갔다.

김의기 열사

하지만 이미 종로5가 주변거리는 계엄군에 의하여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나처럼 입소문을 듣고 달려온 학생들이 있었지만 큰 길로는 못 나가고 이 골목에서 저 골목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고 또 부르고 있었다. 이 골목에서 끝나면 저 골목에서 메들리로 밤늦게까지 마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던, 

“내 머리를 너를 잊은 지 오래, 너무도 오래…. 민주주의여 만세!”

나는 그날의 그 멜로디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늘 마음에 빚을 진 것같이 살다가 광주 망월동 묘지를 처음으로 찾아갔던 것은 1988년이었다. 그 해부터 1996년 호주로 오기 전까지 매해 5월, 부천에서 노동자, 청년, 학생들 순례단을 조직하여 단체로 망월동 묘역을 참배했었다. 1980년 5월은 오랫동안 잊히고 금지된 시공간이고, 광주지역과 대학가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1987년 이후 한국은 서서히 민주화가 되었지만 광주와 5·18은 여전히 불온시 되었다. 수많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5월이면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아 몰려들었지만 공권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길목을 차단하고 집회를 봉쇄했다. 5월에 광주에 간다는 것 자체가 불법인 시절이었다.

어렵게 버스를 빌려 밤새워 광주로 가서, 새벽에 망월동에서 참배를 하고, 낮에 열리는 각종 집회에 참석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집회를 봉쇄하려는 전투 경찰과 백골단의 쫓고 쫓기는 전투가 벌어졌다. 순례단을 대표하는 나로서는 ‘가두전투’도 해야 했지만 큰 피해 없이 돌아가야 할 책임이 있었다. 대부분이 청년 학생들인 순례단원들은 1980년 5·18 현장에 있지 못했던 부채의식 때문에 실전을 치르듯 날아오는 최루탄에 돌과 화염병으로 맞서서 전투를 치르려고 했다. 순례단을 인솔해야 하는 나로서는 우리 편을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대열을 따라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니면서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출발해서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부천으로 돌아오는 것이 해마다 반복되는 5·18의 일상이었다.

나중에 민주화가 되고 난 후 망월동 묘소를 참배하면서 ‘어떤 사람은 광주항쟁에 참가했다가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고 적지 않은 보상금을 타기도 했는데, 정작 총에 맞아 죽어버린 이들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목숨을 잃을 때까지 싸운 그들의 정신은 어떻게 되살아나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더 이상 노동법의 준수를 부르짖거나 독재에 대항하는 투쟁을 할 필요는 없다. 오늘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달라졌다. 이제는 나태함, 무사안일,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 이런 것들이 나의 투쟁의 대상이다. 나와 동갑인 전태일과 5·18의 광주는 죽는 날까지 나를 깨어서 게으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민족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5월만 되면 이렇게 몰려 다녔다.

다시 1980년대로 돌아와서, 당시 풍산교회는 1년 예산이 300만 원도 안 되는, 그것도 어린 노동자들이 한 달 동안 뼈가 휘도록 철야해서 낸 헌금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월 10만 원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았지만, 가냘픈 여공들이 뼈를 깎으면서 번 십일조라서 생활비를 받을 때마다 저 애들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어떻게 하면 내 손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면서 이들을 섬길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사회의 기층민중인 노동자들의 형편은 이러하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선 율산, 제세 그룹의 신화를 바라며 창업 붐이 한창 불 때였다. 대기업 종합무역상사 경험이 많은 이가 해외에서 오더를 많이 받았고, 남에게 맡기기 보다는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해서 돈을 벌어 보겠다고 봉제공장을 차렸다. 봉제 노동자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그 공장의 총무과장으로 취직이 되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국회의원의 개인 비서를 잠깐 했지만, 그것은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일반 직장과는 조금 달랐다. 때문에 나는 봉제공장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조직의 쓴맛을 보기 시작했다. 회사에는 예기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불교신자인 부사장이 번번이 툭 하면 “총무과장! 목사라며?”라고 시비를 걸었다. 목사인 내가 총무과장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업무로서 내 능력을 보여야만 했다.

신설공장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생산 라인을 채우기 위해서 공원을 구하는 것이었다. 나이 어린 여공들에게 접근을 하고 근처 다방에 들어가서 좋은 말로 유혹해 우리 공장으로 끌고 들어오는 펨프 노릇을 했다. 먼저 들어온 노동자들을 통하여 부도가 나거나 운영이 잘 안 되는 회사가 있다는 정보를 얻으면 그 회사의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래도 안 돼서 추운 겨울날 성북지역 노동부 지역사무소 앞길에서 떨면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다른 공장에서 일을 하고도 돈을 못 받아서 신고를 하고 나오는 노동자들을 데려왔다. 

하루 종일 그 짓을 하다가 집에 들어갈 때는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 머릿수를 채워야 재봉 라인이 돌아간다. 한 달 동안 열심히 뛴 결과 2개 라인에 100여 명의 노동자들을 채울 수 있었다. 다른 공장과 별로 다른 것도 없는 영세한 신생업체인 우리 회사에,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을 동원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돈을 주고 일을 시키겠다는 것이니까 양심적인 편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총무과장으로서 노동자들을 위한 기숙사나 식사 등 모든 것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지만 워낙 제한된 자금 안에서 일을 하다 보니 아쉬운 점이 많았다. 남자인 나도 더운 물에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추운 겨울 날 아침에 여자들이 찬물로 머리를 감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들이 시골 출신인 덕분에 그 정도를 보통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우선 화장실에 대형 연탄난로를 설치하고 물을 데워 쓰도록 했다. 하지만 더운물에 머리를 감으려면 새벽에 남보다 두 시간은 먼저 일어나야 겨우 차례가 올 정도였다.

젊은 사람들이 경영을 하기 때문에 의욕은 넘쳤지만 자금이 원활하게 돌아가지를 않아서 월급이 한 번을 제 날짜에 나오지 않더니 결국 6개월이 안 돼서 부도가 났다. 일단 부도가 나자 회사의 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야 했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선 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러나 경영자는 줄 것이 없자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나는 회사에 남은 물건들을 처분해서 나누어 주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총무과장님이 회사 편이 아니고 자기들 편에 서주어서 고맙다면서, 밀린 월급 때문에 무거운 재봉틀을 한 대씩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과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회사를 모두 정리하고 텅 빈 공장과 기숙사를 바라보는 것 보다 마음속에 뚫어진 구멍을 메우기가 더 힘들었다. 그래도 봉제공장의 경험은 노동자들의 삶의 형태와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경영자의 입장까지 이해할 수 있는 값진 배움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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