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경찰과 애증의 관계가 시작되다
[연재] 경찰과 애증의 관계가 시작되다
  • 시드니
  • 승인 2016.06.28 01:5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느 민초의 반세기 전투기 (4)

1983년도 학교를 사직하고 강원도 양구로 갔다. 한 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는 양구는 인구 3만에 사단이 두 개나 있는 군사지역이다. 

즉 사람 보다 군인이 더 많은 지역이어서 경제적으로도 군대에 절대로 영향을 받고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행정기관은 물론 교회조차도 군대와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보니 당시 군사 정권의 어두운 면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본 것 같다.

군부대에서의 정신교육

5월 어느 날 사단 군종참모인 불교의 법사가 교회로 나를 찾아왔다. 육군본부에서 6월 한 달 동안 외부 강사를 초청해서 정신 교육을 실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단다. 예산이 없어서 곤란한데 보좌관 군목이 나에게 부탁을 좀 해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사단 직할대부터 시작해서 보병은 연대 급까지 포병은 대대 급까지 전방을 구석 구석 돌아다녀야 하건만, 돈은 주지 않는 순회 강연을 수락하자니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애국하는 마음으로 거의 한 달간 사단 내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했던 것 같다.

나중에 부대순회를 끝냈을 때, 사단장이 감사의 뜻으로 식사를 하자고 해서 사단 장교식당에서 참모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날 사단장은 나에게 "목사님은 사단장인 나도 못한 일을 하셨습니다. 사단장인 나도 우리 부대를 그렇데 돌아다니면서 장병들을 만나 본 일이 없어요. 우리 부대를 모두 돌아다녀 보셨으니 느낀 점이 있으면 한 마디 해 주시지요"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느 포병 대대에 갔을 때의 일을 이야기 해주었다. 포병 대대장이 나에게 "목사님, 요즘 사병들은 국가관이 도무지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국가관을 좀 심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 국가관이란 대대장처럼 군인으로서 출세하겠다고 마음먹은 직업군인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국가의 종살이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사병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형식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내 생각을 들은 사단장은 껄껄 웃으면서 "군에서는 처음 지휘관이 된 대대장이 제일 무서운 겁니다"라고 했다.

식사 후 벌어진 해프닝도 잊혀지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사단장과 장교 식당 현관을 나서는데 사단장 운전병이 20m 정도 떨어진 차를 끌고 식당 현관으로 오려고 했다. 아마도 평소에 사단장이 현관으로 나오면 차가 정확하게 대기하고 있도록 되어 있던 모양이다. 현관에서 나를 배웅하는 입장인 사단장은 차를 끌고 오려는 운전병에게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면서 왼손으로 오지 말라고 신경질적인 제스처를 보냈다. 

아마도 사단장은 짧은 대화 중에서도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파악하고는, 평소처럼 차가 자기 발 앞에 대령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뒤 돌아 보지는 못했지만 틀림없이 그 순간 평소와 다른 사단장을 모습을 보고 뒤따라 나온 참모들은 매우 의아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상황이 데자뷰처럼 30년 후에 똑같이 재현되었다. 울산에 들를 일이 있어서 갔을 때였다. 마침 노조 위원장이 내가 아는 사람이길래 중공업 노조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위원장에게 내가 울산에 왔고 전해달라"고 했더니 나중에 위원장이 전화를 해서 아침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현대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위원장이 나를 배웅하기 위해서 호텔 현관으로 나섰을 때 위원장은 주차장에서 자기를 향하여 다가오는 승용차에게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현대중공업 노조 위원장은 운전기사 딸린 승용차까지 제공 받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에게 자기가 운전사 있는 승용차를 타는 입장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이 그 때 왜 그랬을까?  비록 순간적이나마 사단장에게나 위원장에게 나는 어색한 존재였던 것이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나는 그들이 평소 만나는 사람들과 전혀 다른 존재였다는 점일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민간목회를 하면서 사단으로 연대로 다니면서 군목을 도왔던 것은 지원은 없고 명령만 있는 당시의 한국 군대의 실정을 말해 주는 것 같다. 군목들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해도 예산이 없으니 나같이 자원봉사를 할 사람을 필요로 했고 때 마침 정성이 뻗친 나 같은 미친놈이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같다.

군청이 마음대로 교회를 헐던 시절

양구 교회는 6.25 직후 미국으로부터 구호물자를 많이 받아서 배급을 했던 교회이었기 때문에 한창 때는 고아원과 공민학교까지 운영했었다. 그래서 내가 가던 그 때까지도 공민학교를 하던 교실 3개를 교육관으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부임 했을 때는 목사가 없는 사이에 이미 그 땅을 군청의 신축부지로 팔도록 매매계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오래 전에 샀던 가격으로. 세상에! 그런 거래도 있었다. (당시는 문어장군이 대통령을 할 때라서 그럴 수가 있었던 것 같다.) 

매매는 이미 되어버렸고 건물의 철거만 남겨 놓고 있었는데 내가 이사를 온 다음날이 건물을 철거 하는 날이었다. 나는 헌 목재라도 건져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공사를 맡은 현장 소장에게 교회가 땅은 팔았지만 건물은 교회 것이니 지붕의 트러스트를 떼어서 교회 마당에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런데 현장 소장이 매우 난처해하는 얼굴을 하는 것이 아닌가? 웬 일인가 했더니 이미 자재를 실어갈 트럭이 와 있었고 주위에는 평범하게 생기지 않은 인물이 서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삼청교육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동네 건달이었는데 목재를 그가 가져가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니 교회 것을 마음대로 누가 가져간단 말입니까?"고 따졌더니 소장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며 나중에 이야기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하여간 오늘 부터 담임 목사로서 교회 재산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가져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건달은 어제까지만 해도 자기 동네에서 보지도 못한 젊은 목사가 난데없이 나타나서 사업에 방해를 하는 것이 가소로웠던 모양이었다. 교인들이 있으니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거칠게 몸으로 밀쳐대면서 온갖 욕설과 공갈을 퍼부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건달이 그렇게 설쳐도 동네의 어른이 되는 교인들도 누구 하나 감히 말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건달이 아무리 나를 위협을 해도 효과가 없으니까 이번에는 현장 소장이 제발 자기 입장을 좀 봐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나도 일단 배짱을 부렸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가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아 못 이기는 체 하고 건달에게 반만 가져가라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포크레인으로 지붕 테라스를 하나씩 철거해서 반은 교회 마당에 쌓아놓고 반은 건달이 싣고 가면서 소동은 가라앉았다.

건달이 사라진 다음에 현장 소장에게 들으니 건설회사가 외지에 와서 공사를 맡으면 어디서나 현지 깡패들이 와서 공갈을 놓기 때문에 무난히 공사를 마치려면 어떤 형태로든 떡밥을 주는 것이 관례라는 것이다. 그러나 군청 공사는 관급 공사이기 때문에 줄 것이 없어서 철거건물의 목재를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현장소장으로서는 손을 안대고 코를 풀 줄 알았는데 삼청교육대 출신 보다 더 독한 목사를 만나서 애를 먹게 된 셈이다.

훗날 강원도 교육감이 된 이를 만나다

이 시절 양구 고교에 수학 선생으로 재직하는 민병희 선생이 교회에 나오고 있어서 나는 그에게 학생지도를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 번은 민 선생과 졸업을 앞둔 고3 학생들을 데리고 추곡 약수터라는 곳으로 수양회를 하러 갔다. 수양회라고 해서 무슨 집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고3 학생들의 졸업 후 진로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갖기 위한 것이었다. 지방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은 십대들의 미래에는 아무 계획도 없는 백지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사람씩 개인 면담을 통해서 함께 고민을 해보려고 하는 나로서는 마음먹고 시도해 보는 아주 의미가 깊은 프로그램이었다. 모두들 진지하게 프로그램에 참석했는데 한 녀석이 초저녁에 없어졌다가 잔뜩 술이 취해서 한 밤 중에나 나타났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민 선생과 내가 자고 있는 방으로 쳐들어 와서 술주정을 벌렸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우선 숙소로 쓰는 여관방에 교회에서 왔다는 이들이 술 먹고 떠드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창피한 일이었지만 겨우 창호지 한 장으로 가려진, 방음장치도 전혀 안 된 시골 여관집이라 다른 손님들이 자는데 방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녀석을 진정 시켜서 빨리 재우는 것이 덜 밑지는 장사라고 생각해서 살살 달래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내가 부드럽게 나올수록 오히려 녀석은 점점 기세가 등등해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있으면 내 눈 앞에 보여줘 봐라!"면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 때 옆에서 눈만 껌벅이며 듣고만 있던 민 선생이 갑자기 "이놈아! 내가 지금 너를 안 때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있는 거야!"라고 일갈을 했다. 민 선생의 그 한 마디에 녀석이 쑥 들어가 버렸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을 목격한 기적적인 순간이었다. 그(랬다! 감히 자기 학교 선생님 앞에,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섭기로 소문난 학생부 선생님 앞에서 술을 먹고 나타나서 주정을 하다니? 하나님 사랑이 아니었으면 녀석은 벌써 작살이 났을 터였다.)

그 녀석은 가정도 불우하고 성격이 대단히 내성적이었는데 그 전에도 술 먹고 교회 유리창을 깨고 난리 친 사건이 있었다. 그 날도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교인들이 알기 전에 학생들을 시켜서 녀석을 잡아 오게 했다. 왜 그랬느냐고 하는 나의 질문에 녀석은 "교회는 다 위선자들의 집단이다. 그래서 때려 부수려고 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를 부숴서 고칠 수만 있다면 내가 먼저 부수겠다"고 했더니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랬던 전과자가 또 다시 재범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녀석이 근본적으로 못된 놈이 아니고 무엇을 고민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었다. 녀석은 그 후 목사가 되었다는데 지금 어디서 밥이나 벌어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양구를 떠나고 다시 민 선생을 만난 것은 89년 전국 교직원 노조가 조직이 되고 800여 명의 교사가 집단 해고를 당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 명동 성당에서이었다. 8월의 뜨거운 염천에 민 선생 부부를 농성장인 텐트에서 만났을 때 만감이 교차하는 나에게 민 선생 부인은 "이게 다 목사님이 잘못 가르쳐서 이렇게 됐지요. 뭐"하고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민 선생은 내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대로 좁은 길을 택했던 것이고 그 덕에 20여 년을 찬바람 모진 서리를 맞으며 거기까지 온 것이라는 것을. 신념대로 고난 속에서 미련하게 타협 없이 자기 길을 걸었던 그는 후에 강원도 교육감이 되었다.

경찰과 애증의 관계가 시작되다

당시는 양구에서 춘천으로 나오려면 27km를 배를 타고 소양호를 건너야 했다. 사단에서 춘천에 있는 야전병원으로 후송을 가는 사병환자들도 이 배를 이용해야 될 정도였다. 

한 번은 다친 병사가 머리가 붕대로 싸인 채 들것에 실려 누워 있는데 한 눈으로 보기에도 부상이 매우 심각해 보였다. 그런데 그 병사는 고통스럽게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주의를 기울여 들어 보았더니 '아-! X팔', '아-! X같이'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 병사는 그가 느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기독교인들이 어렵고 힘들 때 저절로 나오는 '주여!' 하는 소리나 그 사병이 욕으로 극도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그 순간 그는 욕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인간이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그것이 순간적이든 지속적이든 간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루려고 하는 것 혹은 벋어 나오려고 하는 것, 그것은 기도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잠깐 이야기가 샜다. 양구의 교통 얘기를 꺼낸 건 사실 교통 경찰에 얽힌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렇게 다니기 힘든 양구에서는 차가 필요했고 무면허인 나도 조심 조심 운전을 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그럴 수는 없어 면허가 있는 교회 청년을 대동해 운전을 시키곤 했다. 문제의 사건은 서울에 살아봤던 나와 달리 이 청년은 서울 길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벌어졌다.

남대문 경찰서 뒤에서 길을 찾느라고 잠시 신호등 앞에서 주춤하는데 마침 앞에서 경찰차가 오더니 우회전을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지시대로 우회전을 했더니 차를 세우고 면허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하니 이미 우리 차가 빗금을 친 안전지대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위반을 한 건 맞지만 태도를 보아하니 교통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의지보단 얼마든 쥐어달라는 의지가 더 커 보였다. 뜯어 먹겠다는 경찰과 더 이상 실랑이를 벌여보았자 소용이 없는 일이고 나는 그날 오후부터 연대 군목의 부탁으로 군종사병 집체 교육을 하기로 해서 빨리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5,000원을 주고 해결을 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당하고는 못사는 체질이 아닌가? 경찰과 헤어지자마자 다음 공중전화 앞에 차를 세우라고 하고 돈을 준 것을 신고를 했다. 경찰관의 이름을 알려주고 뇌물을 준 혐의로 나도 처벌을 받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아내에게 이야기할 틈도 없이 곧바로 면소재지에 있는 연대로 교육을 하러 가서 1박 2일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그날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부대에서 잤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에 집사람이 놀라서 서울에서 경찰 두 명이 집으로 찾아왔다고 전화가 왔다. 나는 즉각적으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걱정 할 일이 아니니 경찰들을 부대로 보내라고 했다.

1시간 후 쯤 위병소에서 경찰이 왔다는 연락이 왔다. 부대로 경찰이 찾아왔으니 나는 군목에게 차종지종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고 군목은 연대장에게 보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보고를 받은 연대장은 "그 사람들 나쁜 사람들이군. 점심시간까지 면회 시켜주지 마라"고 명령을 내려서 경찰들은 추운 겨울 날 밖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오전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점심시간에 드디어 피같은 내 돈 5,000원을 뜯은 경찰을 알현을 했더니 이미 그들은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자기들이 신고를 당했다는 내부 정보를 듣고 그들은 차를 타고 한 밤중에 나를 찾아 출발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양구가 어딘지를 몰라서 영동 고속도로를 타서 원주를 거쳐 횡성, 홍천을 지나서 스노타이어도 없는 차로 강원도 산골의 눈이 쌓인 험한 고갯길을 넘어 오다가 미끄러지면서 밤새도록 달려와 구사일생으로 새벽에 우리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 갔다가 다시 연대로 와서 정문 앞에서 오전 내내 차 안에서 달달 떨고 있다가 드디어 나를 만나니 그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내가 한 없이 인자한 표정으로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힘드셨지요?"라고 하니까 서울 교통 경찰관들은 거의 눈물이 날 것 같은 표정으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기구한 여정을 털어 놓았다.사연을 모두 듣고서"여기 오는데 그렇게 고생을 해보시니까 시골 사람들이 서울에 가서 길을 몰라 헤매다가 돈을 뜯긴 기분을 이해하시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아이고! 저희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면서 5000원을 내놓았다. 이자도 없이.

"죽을 죄는 무슨? 항상 하시는 일이면서." 

"한번만 살려주시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까?"

"죄송하지만 돈을 주지 않았다고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나는 돈을 주고서 안 주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백지에 서명하고 도장 찍어 줄 터이니 알아서 마음대로 쓰세요."

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남대문 경찰서 감찰반에서 전화가 왔다. 신고를 하고서 돈을 안 주었다고 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감찰반에서 직접 내려와 다시 진술을 듣겠다는 것이다. 이틀 후 감찰반원이 내려와서 사실대로 가감 없이 말해달라고 했다. 두 경찰관을 살리자니 하는 수가 없이 억지로 논리를 맞추어 말도 안 되는 위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운전사에게 돈을 주라고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운전사가 돈을 안주었더라. 그러나 나는 돈은 준 것으로 알고 신고를 했었다"라고 참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성완종 사건을 놓고 검찰이 하는 짓이 바로 이런 짓인 듯 하다.)

나의 진술을 다 듣고 조서를 작성한 감찰반원은 "이 사람들이 목사님 만나서 살았습니다"라고 했다. 결국 나는 부패 경찰 두 명을 지옥의 문 앞에까지 보냈다가 구해준 셈이다.

계속되는 경찰과의 악연

당시 지방에서 제법 큰 교회 목회를 하면 당연직 경목이었고 새로 서장이 오면 인사를 하고 지내야 했다. 한 번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제법 공부를 한 것 같은 이가 중앙에서 한미한 양구경찰서장으로 부임해 왔다. 서장이 나와 몇 번 이야기를 해보더니 한 번은 내게 직원교육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때는 툭 하면 강원도 구석에 있는 경찰도 데모 진압을 위해 서울로 출동을 하던 때였다. 그래서 내가 경찰들을 모아 놓고 데모를 막더라도 학생들이 왜 데모를 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면서 당시 운동권이론의 필수 과목인 종속이론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아마 전두환의 철권통치 시절에 경찰서에서 운동권이론을 강의한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이다.

강의가 끝난 후 질문 있으면 해 보라고 하니까 한 나이 많은 형사가 "그거 순 공산주의군"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그렇게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요? 김일성 입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자생적 공산주의가 생기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바로 군사정권 때문이라고. 그래서 여러분이 고생하는 것이라고. 아마 경찰서장은 아마 '이게 아닌데' 싶었을 거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주일 날 마다 한 여인이 한복을 입고 예배가 시작된 후에 들어와서 뒤 자리에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예배를 보다가 축도가 끝나기 전에 사라져 버리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있었다. 맨 뒤 자리에 있다가 교인들이 나오기 전에 가버리니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길도 없고 다른 교인들은 그런 사람이 왔다 갔는지 조차도 모르고 강단에 있는 나만 아는데 예배당이 길어서 강단에 서 있는 나로서는 얼굴도 확인할 수도 없고 참으로 궁금한 일이었다. 그래서 한 달쯤 지난 다음에 청년 한 사람을 시켜서 예배가 끝난 다음에 그 여자가 어디로 가는지 미행을 하라고 했다. 알고 보니 읍내 청자 다방의 마담이었다.

그 후에 내가 청자 다방에 가서 커피를 시키고 마담을 불렀다. 큰 예배당 뒷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기 때문에 내 얼굴을 기억 하지 못하던 마담이 내가 "왜 맨날 도망가요?"라고 물으니까 목소리로 듣고 깜짝 놀라서 "어머나? 목사님이시네요?"하는 것이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남편이 오토바이 사고로 죽고 돈을 벌기 위해서 두 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전방까지 흘러 들어와서 다방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다방 마담이 교회에 나간다면 다른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몰래 예배를 보고 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그 다음 주에 교회에 광고를 해서 앞으로는 청자 다방을 많이 이용하도록 했다. 물론 마담은 나의 특별관리 대상이 되었다.

주일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던 마담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지나가는 길에 다방에 들려보았더니 골방에서 끙끙 앓아 누워있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하니까 형사 몇 놈이 불러서 갔더니 변두리로 데려가서 술을 처먹고 덮치려고 해서 신발도 못 신고 버선발로 눈 덮인 논밭을 넘어서 도망쳐 와서 앓아 누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자 승질이 뻗쳐서 그 길로 경찰서에 쫓아가서 서장에게 당장 범인들을 불러서 시말서 받고 당사자에게 사과 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이후에 경찰서에서 커피를 시켜서 다방 아가씨가 배달을 갔더니 과장이 "야! 지 목사와 너희 마담과 무슨 관계냐?"하더란다.

전두환의 사회정화위원회

당시 전두환은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열심히 사회를 정화조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당연직 정회위원으로서 이런 저런 회의에 참석하라면 참석하고 길에 나와서 교통정리를 하라면 하고 했는데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앙에서 정화위원회 간부가 순시차 내려온다고 와서 긴장을 해서 난리가 났다.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지방 유지들을 모아놓고 간담회를 열었지만 유지들이 얼어서 아무 말을 안 하기에 내가 이야기를 했다.

"대변인이라니까 이야기한다. '땡전 뉴스'라는 말 들어보았느냐? 뉴스 시간이 되면 일제히 '땡! 전두환 대통령은……. '으로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제발 그런 유치한 짓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대변인은 물론 들어 보았겠지만 내가 구태여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시골에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막상 이야기를 듣는 대변인은 세련되게 넘어갔지만 순간에 보안대장, 경찰서장, 군수 등의 인상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인연이 나중에 재미있는 사건을 만들게 될 줄은 정말 몰랐었다.

해마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베데스다 선교회에서 여름 방학 때 장애인들을 100여 명을 데려다가 캠프를 했다. 당시에는 장애자들이 밖에 나돌아 다니기도 어렵지만 캠프를 하는 일은 더욱이 어려운 일이었다. 장애인이 100명이면 봉사자 숫자는 그보다 많아야 하는 대규모 캠프로 선교회의 일 년 사업에서 가장 큰 행사이었다.

요즘처럼 차가 흔하지 않을 때라서 교회의 봉고차를 가지고 청년들을 데리고 가서 한 주간 동안 봉사를 하러 가게 되었다. 캠프 전날 문득 이럴 때 대변인을 한 번 써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걸어서 나를 기억 하는지 물었다. 대변인은 "아! 내가 까칠한 목사님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내 용건은 우리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TV에 좀 내보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내 요청에 대변인은 두 말도 하지 않고 "조처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다음날 12시 쯤 캠프장에 도착하니까 MBC 방송 차량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데없는 방송중계차의 출현으로 모두들 어리둥절했었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방송국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내가 도착하니까 그들이 나에게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하러 오는지도 모르고 이 많은 장비를 끌고 왔단 말이요?" 하니까 PD의 말이 아침에 출근하니까 책상 위에 '양평군 개군면 초등학교로 10까지 출동'이라는 지시사항이 있어서 왔단다. 감히 상상이 안가겠지만 그 때는 세상이 그 모양이었다. 요즘 점점 비슷해져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이렇게 입바른 소리한 것이 훗날 뜻 밖의 편의(?)를 제공해준 덕분인지 나는 다른 데에서도 공무원들을 진땀 빼 놓는 일에 거침이 없었다. 총선거 직전에 세미나를 한다면서 강원도 내의 목사, 신부, 스님 등 200 여명을 설악산 호텔에 불러 놓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문교장관까지 해 처먹었고 이순자의 사촌이라나, 뭐라나 하는 당시 강원대 총장 이상주가 주제 발표를 하면서 월남이 학생과 종교인들의 데모 때문에 망했으니 협조를 잘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도저히 내가 참고 있을 수가 없어 발언권을 얻어서 "뭘 알고 이야기 하는 거냐? 난 그 때 거기 있었던 참전 군인이다. 베트남의 썩은 정치는 국민의 극심한 반발을 낳았고 연일 시위와 함께 급기야 스님들이 시위대와 함께 동참하거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스스로 등신불이 되어 버려서 세계를 놀라게 했었다"라고 반격을 했다.

내 발언으로 세미나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총장은 논리를 떠나서 '젊은 사람이 버릇이 없다'고 나를 질타했고 몇몇 목사들이 동조해서 나를 공격했다. 어떤 목사는 아예 위통을 벋어 부치고 '차라리 나를 쳐라. 나를 쳐'하고 대드는 잉간(인간이 아니고)도 있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양구로 돌아왔더니 다음 날 아침에 경찰서 정보과장이 찾아왔다. "군 안에서는 괜찮지만 밖에 나가면 제발 좋은 소리만 해 달라. 이렇게 나가면 좋지 않은 벌어질 수도 있다"고 호소 반 협박 반으로 얼러댔다. 서슬이 시퍼런 시대였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내가 서울로 온 후 뒤늦게 내가 떠났음을 알고 경찰서장은 감사패를 만들어서 일부러 사람을 출장을 보내서 전달해 주기도 했었다.

대학생 때 일시적으로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있었지만 그 후에는 별로 관계가 없이 살았는데 이 무렵부터 다시 경찰과 본격적으로 애증이 얽히는 관계가 시작이 된 것이다.

양구에서의 생활은 내 평생에 편안한 목회를 하면서 교회에서 나오는 월급에 의존해서 생활을 해 본 유일한 3년이었다. 월급이 교목으로 받던 고교 교사 봉급의 두 배나 되었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가장 평안한 시기였지만 내적으로는 갈등이 가장 심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등은 따뜻하고 배는 불렀지만 그 곳도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서울에 올라 갈 때 마다 종로 5가 기독교 회관에 있는 NCC에 가서 시국에 관한 자료를 챙겨 왔다. 그 당시에는 모든 언론이 군부독제권력에 통제된 상태였기 때문에 NCC만이 진실을 전하고 있었다. 어두운 세월을 보내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항상 마음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허경조 2016-06-30 20:16:24
수구 세력들에게 까칠한 목사님(?)의 글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