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경제 성장 기원 자체가 다르다"
"한국과 일본은 경제 성장 기원 자체가 다르다"
  • 정재웅
  • 승인 2016.06.30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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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 연구에 계량경제학적 방법을 적용한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더글라스 노스가 그의 저서 <Structure and Change in Economic History>에서 “산업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산업혁명이라고 알고 있는 18세기 말의 경제적, 산업적 격변은 단속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시기까지 연속된 인간 노력의 집적으로 이루어진 연속적 현상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 경제가 기록한 놀라운 성장의 원인도 단속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 현상이고, 그렇다면 그 원인 역시 일본 경제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원은 마땅히 에도 바쿠후(막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센코쿠 시대의 혼란을 마무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바쿠후를 개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권력의 안정을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한다. 그중 하나가 산킨코타이(参勤交代, 참근교대) 제도다. 다이묘의 아내와 자식을 에도에 인질로 잡아두고, 정기적으로 다이묘들이 영지에서 에도로 올라오도록 만든 이 제도는 에도 시대 일본 경제가 성장한 원인 중 하나다.

아내와 자식 및 다이묘 본인이 에도에 거주할 용도의 대저택을 짓느라 다이묘들은 막대한 지출을 감내해야 했고, 산킨코타이를 위해 에도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그 행차를 누가 더 화려하게 하는지 경쟁하느라 막대한 지출을 하기도 했다. 또한 영지가 안정화되면서 다이묘들 간 누구의 영지가 더 부유하고 번영하는 영지인지 경쟁하는 성향이 나타났는데, 이 과정에서 영지 및 영민의 생활도 풍족해졌다.

이처럼 다이묘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쇼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산킨코타이 제도는 다이묘들의 지출을 증대시켜 재정적 어려움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이묘들이 농업에서의 혁신과 상공업 진흥에 투자하게 만들어 일본 경제를 성장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 더해 에도에서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다이묘들은 영지의 고쿠다카(石高, 석고)를 미리 거래해서 돈을 조달하곤 했는데, 이것이 오사카 선물거래소의 기원이 된다. 이처럼 일본은 에도 바쿠후 시대부터 경제 성장이 나타났다. 비단 Angus Maddison의 경제통계 자료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역사적 문헌만으로도 에도 바쿠후 시대 일본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다.

미쓰이 포목점의 점내 출처: 「時計仕掛けの昭和館」別館

이런 번영을 기회로 삼아 자이바츠의 초기 형태도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일본 전전 5대 자이바츠 중 하나인 ‘미쓰이’는 창업자이자 에도 시대 오사카의 거상인 미쓰이 다카토시가 1673년 에도와 교토에 ‘에치고야(越後屋)’라는 포목점을 열어 당시로는 파격적인 정찰제와 현금 거래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족으로 저 에치고야는 영화 <암살>에 나오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전신이기도 하다. 즉 에도 시대 일본은 농업의 성장, 상업의 발달 등 말 그대로 ‘내생적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영화 <암살>에 등장하는 미쓰코시 백화점

일본의 문호 개방이 끼친 영향

이에 더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본의 문호개방과 메이지 이신이다. 비록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에도 앞바다에 나타난 ‘구로후네 라이코(黒船来航, 흑선내항)’로 인해 굴욕적으로 개항을 하고 그에 이어 심각한 불평등 조약인 미일수호통상조규를 1858년 체결하지만, 이로 인해 1867년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 대정봉환)으로 메이지 이신이 성립된다.

메이지 이신은 청 제국이나 조선의 문호개방처럼 국가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에 너덜너덜해지기 이전에 자체적으로 국가의 개혁을 시도한 사건으로 에도 바쿠후 시기 성장한 경제력이 그대로 근대국가를 추구하는 일본으로 계승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바탕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적 산업체계를 수립하면서 일본 경제는 일찍부터 제국주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이나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자신보다 몇 배나 큰 제국들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원인도 에도 바쿠후 시대 경제력의 기반 위에서 서양 문물을 수용한 근대적 산업체계를 수립한 데 있다.

이러한 외형적인 면에 더해 일본 특유의 내면적 문화, 즉 잇쇼겐메이(一生懸命, 일생현명)와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의 기여도 빼놓을 수 없다. 잇쇼겐메이는 자신이 맡은 사명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고, 이이토코토리는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정신은 지금도 우리가 ‘일본’하면 떠올리는 장인정신이나 원작을 능가하는 모방품을 만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는 현재까지 일본 산업을 지탱하는 수없이 많은 전문 중소기업들의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일본의 수출은 우리나라와 다르다

일본이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정책을 펼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다시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과정 역시 한국과 달랐다. 한국이 경제성장 초기부터 수출에 모든 중점을 두고 정책적 드라이브를 걸었던 데 반해, 일본은 치열한 내수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탈락한 제품을 판매할 시장을 확보할 목적으로 수출 드라이브를 걸었던 것이다.

즉 한국은 내수시장의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수출에 의존한 경제성장 정책을 펼쳤지만, 일본은 충분한 내수시장의 기반 위에 수출까지 확보하는 경제성장 정책을 펼친 것이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외국인 쇼군’ 맥아더에 의해 ‘아시아의 스위스’가 될 뻔했던 처지가 한국전쟁의 발발로 다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에 우선해서 일본은 내생적으로 충분히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다시 경제성장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더해 주거래은행을 바탕으로 한 강고한 자이바츠 체제와 그것을 후원하는 대장성을 필두로 한 관료 체제, 그리고 1억이 넘는 풍부한 내수 시장은 일본 경제가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경제성장의 기원 자체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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