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의 공화당이 트럼프의 공화당이 되기까지 (1/3)
링컨의 공화당이 트럼프의 공화당이 되기까지 (1/3)
  • ingppoo
  • 승인 2016.07.2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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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변천사
노예 해방을 이뤄낸 에이브러햄 링컨의 공화당은 지난주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 후보로 임명한 그 공화당과 같은 정당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렀다지만 어떻게 이런 극과 극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걸까요? 복스가 13가지 결정적인 장면을 통해 공화당의 변천사를 훑었습니다. 주제에 따라 1) 노예 반대 정당에서 친기업 정당으로의 변화, 2) 공화당의 보수화와 남부 유권자들의 보수화, 3) 미국의 인구구조 변화, 공화당에는 위기? 세 편으로 나누어 사흘 동안 소개합니다. 

공화당은 노예제 확산을 막기 위한 운동에 그 태생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후보 지명은 대단히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물론 공화당은 시대의 요구와 흐름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지금은 유색인종의 외면을 받는 공화당이지만, 한때는 당대 가장 진보적인 의제를 공화당이 독점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탄탄한 지지 기반을 북부 공업지대 갖추고 있던 것도 공화당입니다. 지금 공화당이 강세를 보이는 건 남부입니다.

1. 노예 해방을 위해 싸우던 정당이 친기업 정당으로 변모하기까지

1) 공화당이 탄생한 뿌리에는 “노예 노동력”에 대한 반대가 있다

건국 이후 50년간 (18세기 후반 ~ 19세기 초중반) 노예제는 미국의 수많은 정치적 의제 가운데 그저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농업을 기반으로 한 미국 남부의 경제는 수백만 노예 노동 없이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850년 당시 양대 정당이었던 민주당과 휘그(Whig)당은 모두 (남부 주들의) 노예제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부로 개척이 계속되고 새로운 주가 잇달아 편입되면서, 새로 생겨난 주에서 노예제를 허용할지, 아니면 금지할지는 정치적으로 첨예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이는 당장 상원과 대통령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예를 허용하는 주가 (금지하는 주보다) 더 많아지면, 노예를 허용하는 주가 상원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대통령을 뽑는 데 필요한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하기도 훨씬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극소수 급진적인 정치인을 제외한 북부 정치인 대부분은 남부의 노예제를 당장 폐지하자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건 남부를 중심으로 노예제에 찬성하는 주들이 연방 정치에서 다수를 차지해 일종의 도당을 형성하고 미국 정치 전반을 쥐락펴락하며, 원하는 부문에 노예제를 도입해 자유주 출신 백인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었습니다.

1854년 캔자스-네브라스카 협약 (출처: PBS)

휘그당은 1854년 새로 미국에 가입하려는 캔자스 주와 네브라스카 주를 노예제를 허용하는 주로 할지 금지하는 주로 할지 문제를 두고 대립하다가 쪼개졌습니다. 권력 공백을 메우며 빠르게 새로 부상한 건 철저히 북부 자유주(free state)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이었습니다.

새로운 정당이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건 아닙니다. 모든 인종이 평등하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이 정당의 주장은 기존의 노예제는 인정하되, 노예제를 더 많은 주로 확산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하원 선거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순식간에 전국 규모 정당으로 성장한 이 신생 정당은 공화당으로 불렸습니다.

2)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군이 된 공화당

공화당이 창당한 뒤 첫 6년,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 점차 격렬해졌고, 노예제는 미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로 자리 잡습니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자유 토지당 지지자(Free-Soilers)와 캔자스 주의 노예를 거느린 정착민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대법원은 흑인은 미국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노예제 폐지론자 존 브라운(John Brown)은 노예주들을 향해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공화당은 북부에서 점차 지지층을 결집해 갔습니다. 그리고 1860년 대선에서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에이브러햄 링컨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쾌거를 이룹니다. 당선될 때까지만 해도 링컨은 노예 해방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차례 기존의 노예제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북부 공화당 정부가 주도한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 자체가 탐탁지 않았던 남부 노예주 11곳은 1861년 미국 연방에서 탈퇴해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합니다. 북부 주들은 남부 연합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고, 남북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에 돌입한 상황에서도 북부 주들의 원래 목표는 노예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남부 주들을 다시 미국으로 편입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남부군을 전략적으로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노예제라는 사실을 깨달은 링컨과 공화당은 점점 노예제 폐지를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1863년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선언합니다. 남부 연합에 속한 노예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북부에 저항하지 않은 4개 주는 제외) 그리고 전쟁의 승패가 거의 기운 1865년 초 의회는 수정안 13조를 통과시켜 미국에서 노예제를 철폐합니다. 같은 해 수정안이 비준됐습니다. 노예제 확산을 막기 위해 탄생한 정당이 결국 미국의 노예제를 완전히 철폐한 겁니다.

3) 전쟁 이후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싸운 급진적 공화당원들

남북 전쟁이 끝난 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흑인 인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웠던 공화당 내 세력들은 특기할 만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는데도 여전히 노예제가 있던 남부 주들에서 흑인들을 노예처럼 다룬다는 보고가 끊이지 않고, 링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앤드루 존슨은 무능했습니다.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서도 특히 흑인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의원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급진파(Radicals)라 불렸습니다.

급진파는 1866년 미국의 첫 인권법 작성을 주도했고, 북부 안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던 흑인 남성 투표권 쟁취를 위해 싸웠습니다. (여성 참정권 논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현재 수정헌법에 명시된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미국 시민으로, 모든 시민은 동등하게 법의 보호를 받는다. 인종에 따라 투표권이 제한되지 아니한다.”는 조항은 공화당의 두 차례 개헌을 통해 삽입된 내용입니다. 공화당은 또 전쟁에 패한 남부 주들이 다시 미국 연방에 들어오려면 최소한 원칙적으로라도 이 조항을 시행하도록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미국 사회에서는 상식이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주장은 당시에는 대단히 급진적인 사상이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흑인이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불행히도 급진파와 그 사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4) 북부 부자들의 정당이 된 공화당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 문제가 공화당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해졌습니다. 북부는 남북 전쟁 이전부터 남부보다 산업화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이 추세는 전쟁 이후 훨씬 더 강화되었습니다. 1860년 미국의 철도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남북 전쟁을 거치며 연방 정부의 정치적 중요성이 훨씬 커졌습니다. 정부가 집행하는 예산도 훨씬 커졌고, 부유해진 사람들과 공화당 정치인 사이의 관계도 중요해졌습니다. 역사학자 헤더 콕스 리처드슨은 공화당이 정책적으로 “아주 부유한 계층을 양성했다.”고 썼습니다.

점차 부유한 금융가, 기업가들이 공화당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 안에서도 의견이 모이지 않는 사안이 많기는 했지만, 부유한 공화당 지도부 백인의 이해관계는 (적어도 남부에 있는 흑인들에게 중요한 사안을 제치고) 공화당의 존재 이유로 자리매김합니다.

5) 남부의 개혁을 포기한 공화당

급진파가 득세했던 잠깐 동안 공화당은 분명 과거 노예였던 흑인 인권 개선에 적잖은 공을 세웠지만, 이는 실제 행동에 옮겨지기보다는 대부분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반동의 흐름을 피하지 못합니다. 실제 남부 많은 주에서 백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급진파가 만들어놓은 법률을 모조리 철폐하는 데 온 힘을 쏟아붓습니다.

이 시점에서 북부의 백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남부의 노예였던 흑인들에게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퍼지고, 사업가들은 사업가대로 정치적인 문제보다 자신의 이권에 집중합니다. 연방 정부가 주 정부의 권한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걸 우려한 지식인들도 남부 기득권 백인들의 반동적인 노력을 수수방관합니다. 결국 (북부 백인들 사이의) 여론마저 연방 정부가 남부 주에 점령군 행세를 하는 데 더 이상 호의적이지 않은 쪽으로 돌아섭니다.

1870년대 중반에 이르러 공화당은 결국 남부의 개혁을 포기합니다. 과거 노예제를 인정했던 남부 주들, 전쟁에서 패한 남부 주들, 다시 미국에 편입된 남부 주들은 인종 문제에 있어 어떤 식의 차별을 두든 간섭받지 않게 된 겁니다. 백인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고, 이들은 앞다투어 주 차원에서 흑인들의 시민권을 부정하는 주 헌법 개정에 착수합니다.

공화당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노예제를 인정하는 주의 확산을 막는 문제”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됐습니다. 창당의 목표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공화당은 남부에서 부활한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에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흑인 인권 문제는 미국 정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복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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