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의 도덕적 해이, 그리고 노동자의 죽음
재벌 총수의 도덕적 해이, 그리고 노동자의 죽음
  • 지유석
  • 승인 2016.07.26 0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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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 스캔들로 다시 떠올리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스캔들로 연일 떠들썩하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송구스럽다면서도 “회장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여서 회사로선 드릴 말씀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총수가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지배구조, 그리고 삼성그룹 비서실이 이 회장의 성매매를 적극 주도한 정황이 <뉴스타파> 보도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이 같은 해명은 궁색해 보인다. 

이런 삼성그룹이 노동자를 어떻게 다뤘을까? 2014년 김태윤 감독의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그룹이 노동자를 다루는 방식의 일단을 생생하게 그린다. 이 영화는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지난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故 황유미 씨의 사연을 모티브로 했다. 

강원도 속초가 고향인 한윤미(박희정)는 고등학교 졸업 후 국내 최대 기업으로 꼽히는 진성반도체에 일자리를 얻는다. 택시 운전을 하는 아빠 한상구(박철민)는 이런 딸이 그저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딸은 몹쓸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온다. 병명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 회사는 위로금을 건네주며 아버지와 딸을 달랜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합의를 압박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합의를 거부한다. 

이 지점에서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직업병 피해자들과 함께 하는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상근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죽어가는 딸 앞에서 삼성이 ‘이걸로 끝내자’고 딸의 병원비로 내민 500만원. (중략) 삼성 이건희 회장이 회사의 비호하에 아무렇지도 않게 벌인 불법 성매매 뉴스를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성매매 여성에게 건낸 500만원, 유미와 유미아빠에게 삼성이 건낸 500만원은 조롱의 돈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언론과 법은 삼성 편이다. 먼저 언론을 보자. 영화에서 아빠 한상구는 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언론사에 일일이 전화를 돌린다. 그러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싸늘한 냉대다. 실제로 수많은 언론사들이 광고매출 타격을 우려해 삼성의 심기를 건드릴 기사는 ‘알아서’ 내린다. 지금 이 회장의 성매매 스캔들 관련 보도도 KBS, MBC, SBS 등 공중파 방송 3사나 조선-중앙-동아 등 주류 매체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법은 더욱 가혹하다. 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인 황상기 씨는 2011년 6월 서울 행정법원으로부터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딸의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5년여의 긴 싸움을 통해 얻은 승리다. 그럼에도 황 씨는 3년을 더 법정 싸움에 매달려야 했다. 2011년 근로복지공단과 삼성반도체는 행정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기 때문이다. 결국 2014년 2심 재판부는 고 황유미 씨의 백혈병이 산재라고 판결했고, 공단은 항고를 포기했다. 

법과 언론, 재벌 하수인? 

소중한 딸을 잃은 아버지가 거대 기업과 법정 공방을 벌여야 한 데에는 기업이 아닌, 노동자가 산재입증을 해야하는 제도 때문이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아버지의 법정 호소를 통해 이 같은 제도적 허점을 짚어낸다. 법정에 선 아버지 한상구는 입증책임을 따지는 재판부를 향해 특유의 강원도 사투리로 이렇게 호소한다. 

“저는 무식하고 못 배워서, 이 재판정에서 무슨 얘길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제 딸내미가 일하던 공장에선, 그냥 암도 아니고 백혈병 환자들이 참 많이 생겼어요. 택시 운전을 하다 보면요, 술 취해서 돈 안내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그 사람들 좇아가서 잡으면 뭐이라 하는지 알아요? 돈 냈다고, 아저씨가 사기 치는 거 아니냐고 잡아떼요. 그러면서 돈 안 낸 증거를 내 놓으라는 거예요. 회사나 공단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산재 신청을 하면요, 우리한테 그 증거를 내 놓으래요. 영업 비밀이라고 자료도 내놓지 않고, 작업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면서 우리한테 증거를 내 놓으라는 법이 세상에 우데 있어요? 근데요, 우리한테 증거 있어요. 여기, 여기, 또 여기, 또 저기, 여기 병든 노동자들의 몸, 가족 잃은 사람들. 이게 우리의 증거에요.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요?”

이 회장이 젊은 여성들과 놀아나는 사이, 삼성 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조건에 내몰리다 하나 둘 목숨을 잃었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삼성과 싸우려 해도 언론과 법이 이들을 지치게 만든다. 이런 부조리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분명한 건, 지금 이 회장과 삼성그룹의 잘못된 행실을 바로잡지 않으면 몇 년 후 이들은 더욱 추악한 추문으로 세상에 나올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2007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준 한 번의 기회를 놓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두 번째 기회다. 삼성, 그리고 삼성을 축으로 한 재벌기업을 사회의 투명한 감시망에 놓아야 한다. 그래야 성추문 스캔들의 여지를 줄이고, 고 황유미 씨 같은 억울한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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