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의 공화당이 트럼프의 공화당이 되기까지 (2/3)
링컨의 공화당이 트럼프의 공화당이 되기까지 (2/3)
  • ingppoo
  • 승인 2016.07.2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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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수화된 공화당, 보수적인 남부에서 지지기반을 넓히다

6) 혁신주의와 뉴딜에 반대했던 공화당

오늘날 공화당이 정부의 규제를 비롯해 소위 큰 정부를 대단히 싫어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압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독점 자본가와 부의 집중, 그로 인한 정치 부패를 척결하자는 혁신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공화당 유력 인사들 가운데는 혁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꼽을 수 있죠.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공화당은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 거의 모든 개혁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나섭니다. 정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질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죠. 1920년대 다시 집권한 공화당 정권은 명백히 친기업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기업이 번영하면 국가도, 국민도 덩달아 잘살게 되리라는 믿음은 당시 공화당을 지탱하는 뼈대와도 같았습니다.

1920년대 전반적으로는 이런 친기업 정책이 잘 굴러가는 듯했지만, 1929년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대공황이 왔습니다. 공화당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은 민주당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방 정부의 규모와 역할을 늘려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고 직접 일자리를 창출하는 식으로 대공황을 극복해 나갑니다. 잘 알려진 뉴딜 정책이죠.

프랭클린 루스벨트 집권기에 정부 지출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도. (출처: 리빙 뉴딜 프로젝트, UC 버클리)

의회에 남은 공화당 의원들은 정부의 개입에 대체로 반대하긴 했지만, 정책을 바꾸기에는 숫자가 부족했습니다.

 

7) 남부의 민주당원들과 공통분모를 찾아낸 1960년대 공화당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은 민주당 내에서도 균열을 일으켰는데, 특히 남부 민주당원들은 정부의 역할이 커지는 것도, 뉴딜 정책과 함께 노동조합의 힘이 세지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부 민주당원들과 공화당 사이에는 더 큰 정부, 더 센 노조를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1947년, 향후 20여 년간 미국 정치 지형을 뒤바꾼 정치 연합이 탄생합니다. 공화당의 로버트 태프트(Robert A. Taft) 상원의원이 부유한 남부 민주당원들과 손을 잡은 겁니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역시 뉴딜에서 시작된 정부 개입과 노조에 대한 반대였는데, 남부 민주당원들은 높은 세금과 뉴딜 정책과 함께 도입된 인권 법안을 특히 싫어했습니다. 이들의 연합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법안이 태프트-하틀리 법안으로, 각 주 정부에 “일할 권리에 관한 법안(right-to-work laws)”을 따로 제정해 자동으로 노조에 가입되는 걸 막은 법안입니다. (옮긴이: 고용과 함께 자동으로 노조에 가입되는 클로즈드샵(closed shops)을 금지한 것이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로, 최근에도 공공 부문 노조를 약화시키려는 미국 공화당 주지사들이 태프트-하틀리 법안을 모태로 아직 남아 있는 “일할 권리에 관한 법안”을 인용했습니다)

배리 히르스치(Barry Hirsch), 데이비드 맥퍼슨(David Macpherson), 웨인 브로만(Wayne Vroman), 1964년 주별 노조 조직률 추정치 (출처: 복스)

이 법안은 갈수록 세를 불리던 노동조합의 쇠퇴를 불렀습니다. 민주당의 입김이 세게 작용한 남부와 중서부 내륙 주에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아졌고, 이는 선거에서 공화당에 도움이 됐습니다.

 

8) 흑인 유권자들, 공화당을 외면하기 시작하다

남북전쟁 이후 반세기 가까이 흑인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뉴딜 정책의 쇠퇴와 함께 공화당에 대한 지지도 점차 옅어졌는데, 인종 문제가 다시 미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이미 흑인 유권자 가운데 민주당원의 숫자가 공화당원보다 두 배나 많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부는 오랫동안 (보수적인 백인)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공화당이 흑인 인권의 대변자를 자처하며 흑인 유권자를 끌어안기에 더 유리했던 위치를 점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어쨌든 피부색에 따라 학생을 차별하던 학교에 다니는 흑인 학생을 보호하고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하라는 대법원의 명령을 집행하기 위해 경찰도 아닌 군대를 파견한 것도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었습니다.

하지만 1964년 민권법에 서명한 대통령은 민주당의 린든 존슨이었습니다. 공화당 의원들도 의회에서 적잖은 수가 이 법안에 찬성하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해 존슨에 맞서 대선에 도전했던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후보가 정부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한다며 민권법에 반대해 공화당은 흑인 인권 개선을 막아서는 세력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집니다.

결국, 흑인 유권자 대다수가 공화당을 떠났고, 이때부터 흑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민주당이 80% 이상을 득표하는 건 흔한 일이 됐습니다.

 

9) 남부에 지지기반을 굳힌 공화당,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

민권법에 서명한 뒤 존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장기적으로 남부를 공화당에 내주게 생겼군요.”

실제로 같은 해 스트롬 서몬드 상원의원은 당적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꾸면서 지역구 유권자들의 민심에 따른 결정이라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정당에 대한 지지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특히 남부 백인들이 열성적인 민주당원에서 열성적인 공화당원으로 바뀌는 과정은 대단히 점진적이었습니다.

인종이 중요한 변수였지만, 다른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먼저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낙태 반대를 비롯한 “문화 전쟁” 이슈 아래 집결해 보수적인 사회 운동의 한 축을 맡았고, 자연히 보수적인 정당과 합이 맞습니다. 큰 정부에 대한 의혹과 노조에 대한 경계심이 남부 곳곳에 퍼지고 있었는데, 로널드 레이건 같은 정치인은 이런 정서를 효과적으로 공략하며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겠다는 구호를 내세워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이후로도 한동안 민주당은 하원에서 다수당 지위를 유지하는 데 전통적인 남부 민주당원의 지지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1994년, 마침내 공화당이 1955년 이후 거의 40년 만에 처음으로 하원 다수당이 됩니다. 남부 선거구 곳곳에서 이변이 잇달아 일어난 것이 주효했습니다.

이후 현재까지 22년 가운데 공화당이 다수당이었던 기간은 18년으로 두 차례 선거를 제외하고 공화당은 한 번도 하원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하원은 갈수록 공화당 정치의 거점과도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특히 남부 백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공화당은 전국 선거는 물론 지방 선거에서도 우위를 점합니다. 이로 인해 공화당의 정책은 다시 한 번 전통적인 백인 유권자들의 가치관에 맞게 보수적인 방향으로 굳어지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복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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