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미국의 희망과 미래가 있었다’
‘그 곳에 미국의 희망과 미래가 있었다’
  • 안치용
  • 승인 2016.07.30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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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기자의 민주당 필라델피아 전당대회 참관기

민주당 전당대회 개막일인 지난달 25일 월요일, 설레는 마음으로 필라델피아를 찾았다. 오전 9시 뉴욕 맨해튼을 출발,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찌는 듯한 더위가 1주일이상 계속되면서 고속도로도 계란이라도 익힐 듯한 열기로 가득했다. 계란을 탁 떨어뜨리면 지글지글 할 듯한 더위다.

뉴저지 턴파이크는 예상외로 시원하게 뚫렸다. 뉴욕에서 필라델피아까지는 약 100마일, 신나게 한 시간 남짓 질주한 뒤 휴게소에 들렀다. 남들은 화장실에 가고 싶다지만 나는 담배 한가치가 더 급했다. 기름을 넣고 담배 한대 피운 뒤 던킨에서 ‘에그앤치즈’의 조그만 샌드위치를 하나씩 먹으며 다시 출발,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니 40마일이 남았단다.

전당대회 취재를 위해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친구에게 카톡을 했더니 우리가 막 떠나온 휴게소에 도착했단다. 금요일까지 닷새간 머문단다. 고생문이 훤하다. 나는 순전히 ‘구경차’ 라고 다짐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났지만 그래도 웬일인지 긴장이 감돈다. 첫날만 구경하고 다음날 다시 돌아오는 일정이지만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전당대회를 본다는 설렘도 잠시, 어김없이 직업 근성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휴게소를 떠난 지 한 시간도 채 안 돼 필라델피아 시가지로 진입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유서 깊은 도시임을 뽐내듯 필라델피아는 반듯한 계획 도시가 아니라 골목 같은 좁은 길과 벽돌로 된 도로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미셀 오바마 지지 연설

테러 대비 물샐틈없는 경비와 통제

필라델피아로 접어들고 다운타운이 가까워질수록 곳곳에 경찰차들이 눈에 띈다. 방탄조끼까지 착용한 완전무장 상태다. 미국에서 ‘내노라’하는 정치인들이 모두 모이고 민주당에 단골로 거액을 기부하는 거부들이 모두 모인다. 테러범이 노리기에는 더 없이 좋은 타깃이기에 물샐틈없는 경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크리덴셜’이라고 불리는 전당대회 입장권을 픽업하는 일이다. 이 일대의 차량 통행이 모두 통제됐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우리가 도착한 오전 11시에는 차량 통행이 자유로웠다. 아직 경찰이 전면 통제에 나서기 전이었던 것이다. 필라델피아컨벤션센터 맞은 편에 자리한 전당대회 준비본부 2층에서 크리덴셜을 픽업했다.

입장권 외에도 각각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티켓과 전당대회장 VIP 라운지 입장권, 전당대회 조직 내 각 위원회가 발급하는 카드, 지지자들에게 무료 식사를 대접하는 HAPPY HOUR 초대권 등 픽업한 카드도 한 아름이다. 전당대회 입장권에는 바코드가 찍혀 있고 입장할 수 있는 요일이 크게 적혀 있다. 월, 화, 수, 목 나흘간 각각 입장권이 다르다.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지지자들을 초대하기 위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한명이라도 더 많은 기부자를 초청해 생색을 내려는 것이다. 한 뭉치의 입장권과 티켓 등을 각각 나눈 뒤 목걸이가 달린 비닐봉투에 차곡차곡 넣었다. 크리덴셜을 하나씩 목에 걸었다. ‘OK LET’S GO’, 이제 출발이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질서정연한 참석자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부부를 약 20년간 후원해 온 ‘친구’가 이번 나의 필라 행을 주선했다. 부모에 이어 2대째 그들을 돕고 있다. 오랫동안 클린턴 부부를 지원했고, 명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다년간 연방의원의 보좌관생활을 거쳤기에 민주당, 특히 클린턴 부부의 이너서클로 불릴 만큼 각별하다. 또 속칭 ‘빠꾸미’다.

힐러리 캠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훤하게 알고 있다. 따라서 전당대회와 함께 열리는 각 부속 세미나중 어떤 행사가 한인들, 아시안들에게 필요한 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우리는 호텔로 가서 짐부터 풀고 싶었지만, 그 같은 장미빛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미 이 ‘빠꾸미’가 빡빡한 일정을 짜놓은 것이다. 전당대회만큼 한 장소에서 한꺼번에 좋은 모임이 열리는 행사가 없다는 것이다. 좋은 모임에 참석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당장 출동, ‘강행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안퍼시픽아일랜더스아메리칸[APIA]컨퍼런스가 낮 12시에 힐튼호텔에서 열린다고 한다. 힐튼호텔은 도심에서 2.2마일 정도 떨어진 델라웨어 강가에 있다. 2.2마일이라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려 20분을 가야 한다. 차를 주차하고 들어가니 금속 탐지기가 우리를 맞았다. 금속 탐지기를 통과하니 건장한 남성이 휴대용 금속 탐지기를 들이댄다.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모임의 취지는 아시안들의 투표성향 등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하고 아시안들의 정치력을 어떻게 향상시킬까 하는 것이다. 낮 12시가 됐지만 전당대회 첫날이어서인지 불과 20-30명정도만 모였다. 참석을 약속한 사람은 550명이 넘었다고 했지만 아직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가보다. 특히 한국인은 우리 일행 4명이 전부였다. 푸짐한 음식이 차려진 채 간단한 리셉션이 열렸다. 전당대회 중 어디를 가나 먹을 것은 풍성하다. 좀 기부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모두가 무료다. 표를 얻고, 솔직히는 돈을 더 기부받기 위해 대접을 해주는 것이다.

아시안 정치인들 대부분 참석, 한인은 없어

일반 참석자들은 많지 않았지만 아시안계 주요 정치인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일본계인 데이빗 이게 하와이 주지사가 참석했다. 알로아란 짧은 인사를 통해 하와이에서 온 사람이구나 짐작했지만 그 소박한 모습에 하와이 주지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에드워드 리 샌프란시스코 시장 부부도 참석했다. 그들 역시 소박했다. 부인은 한국의 시골 여인을 연상시킬 정도로 촌스러운 원피스 차림이다.

이들은 모두 이민 역사가 짧은 아시안이 미국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치참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리가 간단하게 요기하기 위해 이것저것 먹고 있을 때 후덕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의 중국계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것저것 연식 먹어가면서 어디에서 왔는지, 이번 선거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아시안계 정치인의 미래는 어떨지 열심히 설명했다.

잠시 뒤 자그마한 체구의 한 백인 중년 남성이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차근히 읽어보니 ‘아 이상하다 여성의 이름인데’, 알고 보니 이 남성은 중국 여성의 남편이었고 이 여성은 캘리포니아주 민주당의 컨트롤러 베티 리였다. 좋은 팔자다. ‘나도 집사람 명함이나 들고 졸졸 따라다녔으면 좋으련만’ 엉뚱한 생각이 들자 스스로도 쑥스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의원이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주 민주당 수뇌부였던 것이다. 우리는 에드워드 리 샌프란시스코시장부부, 베티 리 민주당 콘트롤러 부부에게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으로 주하원의원 출마를 선언한 한인 여성 제인 김에 대해 물었다. 에드워드 리 시장은 제인을 아주 잘 안다고 밝히며 이번 선거에서 당선될 것이라고 말했고 베티 리 컨트롤러는 제인이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반가운 소식이다. 뉴욕 출신의 한인 이민2세 제인 김이 또 다른 역사를 쓸 날이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제인의 아버지를 잘 알기에 더 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유리천정깨기' 세미나 메들린 올브라이트 감동 연설

미처 APIA 세미나가 끝나기도 전에 벌써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1시에 수퍼팩이 주최하는 세미나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유리천정깨기’라는 제목의 세미나다. 이 세미나는 로위스호텔에서 열린단다. 이곳은 원래 우리가 출발했던 지역에 있는 호텔이다. 다시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힐튼호텔로 올 때 워낙 교통체증이 심했기에 차를 가지고 가면 주차시간 등으로 세미나 시간에 제때 도착하기 힘들다. 우버를 부르기로 했다.

미리 우버를 불러놓고 APIA 세미나에 최대한 참석하다 우버 도착 연락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후버를 타고 로위스호텔로 달려갔더니 이곳은 뉴욕 출신 민주당 대의원들의 숙소였다. 이곳은 힐튼보다 더욱 경비가 삼엄했다. 슈퍼팩이 주최한 유리천정깨기 세미나의 연사는 메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었다. 특히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호주의 첫 여성총리를 역임한 줄리아 질라드가 참석한 것이다. 호주의 전총리가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까지 온 것을 보고 호주와 미국이 얼마나 가까운 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이른바 ‘FIVE EYES’를 실감케 된 것이다.

‘화이브 아이스’란 미국 국가안보국 전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비밀문서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기밀정보든 아낌없 나누는 5개의 나라를 의미한다. 바로 미국과 캐나다, 영국, 뉴질랜드, 호주 등 5개국이다.

호주 전 총리가 ‘불원천리’하고 미국까지 달려온 것은 바로 이 같은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체코 출신 이민자로 올해 79살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을 지냈고 2000년대 초 북한을 방문, 김정일과 담판을 벌인 여걸이다.

내년이면 팔순이 될 이 여걸이 또렷한 목소리로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후보지명 의미를 설명했다. 여성에게 보이지 않는 장벽, 즉 유리천정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역사적 순간이며 올해 선거를 계기로 여성에게는 다른 세상이 열릴 것으로 전망했다. 질라드 총리 또한 여성의 사회진출이 보다 안정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역설했다. 가족에 더 큰 가치를 둔 세상을 만듦으로서 건강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갑자기 유명한 사람들을 보니 ‘촌놈’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행사사진을 찍고 싶다는 ‘직업근성’이 발동했다. 순전히 ‘구경차’ 유람차 왔는데도 그놈의 직업근성은 병이다. 좀 더 가까이 가서 행사 사진을 찍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계면쩍어 앞으로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전투 역량’이 많이 약화된 것이다.

마이크 혼다. 그레이스 맹등 아시안계 정치인들 참석

이 세미나에서 또 한사람의 방청객이 눈에 띄였다. 바로 그가 입은 티셔츠 때문이었다.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는 ‘AUSSIE FOR HILLARY’였다. 즉 ‘힐러리를 지원하는 호주인’ 이런 뜻의 문구다. 세미나 뒤 이 남성에게 ‘과감하게’ 접근, ‘너 질라드 총리 아들이지 이실직고해’고 했더니 ‘아니, 저분은 우리 총리님이시고 나는 그저 힐러리를 지지하기 위해 민주당 전당 대회에 참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시드니에서 달려왔다는 이 남성은 사진 좀 찍자고 했더니, 건강한 가슴에 더 힘을 불끈 주고 ‘식스팩’을 강조하며 티셔츠를 찍게 해주는 성의를 보였다.

유리천정깨기’ 세미나 – 왼쪽서 두번째가 줄리아 질라드 전 호주총리, 세번째로 메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이렇게 자칭 타칭 민주당, 특히 힐러리에 정통한 우리의 안내자 ‘친구’는 힐러리 선거 캠프 내부를 설명했다. 힐러리를 지하는 수퍼팩이 4개가 있고 이 4개의 수퍼팩을 전직 언론인 출신이 콘트롤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열렬한 클린턴 반대자에서 2000년대 초반 힐러리교 신봉자로 변했다고 한다. 수퍼팩은 힐러리의 돈줄이므로 그 어느 단체보다도 입김이 크다. 그래서 수퍼팩 행사에는 거물급들이 줄줄이 참석한다는 것이다.  

공화당에는 천만달러, 2천만달러등 정기적으로 거액을 기부하는 거부들이 많지만 민주당은 1백만달러, 2백만달러 모아주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한인들도 1백만달러정도, 아니 50만달러만 모아줘도 큰 소리를 칠 수 있고 한인 커뮤니티의 애로사항을 해결에 달라는 요구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정치의 역학관계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중서부의 한 작은 주 주지사 후보는 뉴욕에 들러 민주당 인사들에게 ‘1만 5000달러나 2만 달러만 도와주면 선거에 이길 수 있다. 기부자를 찾아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2만 달러라면 한국 돈 2천 400만 원 정도다. 그 돈만 있으면 주지사 선거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주지사 선거나 연방상하원 선거 등에 출마한 인사들은 반드시 정치자금 모금을 위해 뉴욕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 어느 지역에 출마하든 돈이 많은 뉴욕에서 모금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뉴욕은 유력한 정치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고 적은 돈으로 인연을 쌓을 수 있는 정치 1번지인 셈이다. 한국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들이 언급하는 액수는 그야말로 푼돈이다. 요즘 우리가 그토록 강조하는 저비용 고효율이 가능하다. 미국 정치 내부를 꿰뚫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퍼팩 세미나가 끝나고 저마다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질라드 호주 전 총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다. 한국인들은 삐죽삐죽하고 사진찍기를 망설이는 반면 미국인들은 결사적으로 사진찍기에 나선다. 이 행사도 한국인은 우리 일행 4명뿐이었다. 수퍼팩 행사는 참석자를 까다롭게 체크하기 때문에 입장권을 얻기도 힘들다지만 그래도 한국인들의 관심이 너무나 적다는 점이 아쉬웠다.

수퍼팩 뒤 오후 3시 다시 힐튼호텔로 달려갔다. 역시 우버를 불렀다. 이때는 이미 필라델피아 도심지의 주요도로에 대한 교통 통제가 시작됐다. 메인 간선도로는 전면 통제하고 갓길로 돌아가도록 했다. 우버와 만나는 것도 힘들었다. 우버와 교신 끝에 로위스호텔 바로 앞으로 오기는 힘들다고 판단, 차량번호를 받은 뒤 호텔 인접 도로의 코너로 가서 기가 막히게 ‘접선’에 성공했다.

한 치의 갭도 없이. 오후 3시 행사는 APIA의 파티라고 했다. 행사 참석자들이 음식과 음료,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란다. 낮 12시 세미나에 30여명이 참석한 반면, 이 파티에는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2백명정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저마다 먹을 것을 한 접시 가득 담아들고 맥주를 한 병씩 들고 쉴 새없이 재잘 거렸다.

이 파티에는 마이크 혼다, 그레이스 맹 등 아시안계 정치인, 아시안계 배우들이 참석했고 특히 차기 캘리포니아주지사로 유력한 존 창도 자리를 함께 했다. 캘리포니아에 아시안계 인구가 많아 당선이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짧은 스포츠 머리, 너그러운 인상 속에서도 또랑또랑한 눈이 안경너머에서 빛나고 있었다. 우리 안내자와는 이미 친숙한 사이였나 보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도 10여분동안 줄기차게, 그 뒤 우리와도 소개시켜줘서 즐겁게 손을 마주잡고 흔들었다.

이 파티에는 아시안계 2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중국인 일색이었다. 인도인들도 10여명에 그쳤고 한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중국판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민주당 측에서 10인조 밴드와 가수 2명을 동원, 풍악을 울렸다. 아시안계 표를 잡기 위함이다. 그렇게 풍악을 울려대는 데도 나가서 춤을 즐기는 사람은 2-3명에 불과했다. 오히려 풍악을 울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아시안계도 이제 춤도 좀 추고 놀 줄도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 스친다, 놀고 춤추는 것도 교류인 것이다.

화씨 97도의 찌는 날씨에도 정장 차림까지

파티장을 가까스로 벗어난 시작이 거의 5시께, 이제 호텔에 들어가서 체크인을 하고 전당대회장으로 향해야 한다. 이제는 호텔로 가야 하기 때문에 우버가 아니라 주차해 둔 차량을 찾아왔다. 다시 다운타운, 시청 앞으로 가는 것이다. 동으로 뛰고, 서로 뛰고 하면서 필라델피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홈리스가 많다는 것이다. 이 교차로에도 홈리스, 저 교차로에도 홈리스, 교차로마다 홈리스가 동냥에 나선다. 그만큼 경제가 어려운 것이다.

호텔로 들어가서 체크인을 하고 저녁을 먹고 전당대회로 가기로 ‘모의’가 됐다. 하지만 숙소로 정한 호텔로 돌아가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호텔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은 전당대회장으로 향했다는 소식이다. 또 대형 TV여러 대가 설치된 로비는 웅성거리고 있었다.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최근 실시된 3개의 여론조사에서 모두 힐러리 클린턴을 앞질렀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전당대회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우리는 일단 방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 모처럼 정장을 입었지만 혹시나 해서 반바지도 챙겼다. 하지만 입을 틈이 없었다. 이날 필라델피아의 기온은 화씨 97도, 그야말로 푹푹 찌는 날씨, 한국인이 가벼운 복장으로 돌아다니면 한국인 전체 욕 먹일 수도 있다는 말에 그 더운 날 넥타이를 맨 채 바쁘게 뺑뺑이를 돌았더니 머리 속이 하얘진다.

전당대회장에 갈 때는 캐주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더니 기왕 고생했는데 정장으로 가잔다. 그냥 가방만 놓고 일행과 교신, 어느 식당으로 갈까 또 모의를 했지만 불발에 그쳤다. 시간이 없었다. 거창한 만찬은 호텔 1층으로 내려와 조그만 바에서 치킨 몇 조각 먹는 것으로 대체됐다. 조금이라도 빨리 전당대회장으로 가야할 판이다. 민주당과 필라델피아시 당국은 각 호텔 등 시내 주요 지점에서 전당대회가 열리는 시외곽의 웰스파고센터까지 30분 간격으로 셔틀버스를 운영했다. 무료다. 셔틀버스 마지막 출발이 오후 7시라고 한다. 군것질 하고 일어서니 6시 35분, 5분만 빨랐으면 6시30분 셔틀을 타는데 하고 안타까워하는 순간, 셔틀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희소에, 부리나케 달려가니 셔틀이 막 정차한 모양이다.

갑작스런 폭우에 우왕좌왕 질주로 넉다운

그런데 놀라운 것은 현직 경찰이 오늘은 셔틀버스로 운행되는 이 시내버스의 차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탄조끼까지 착용한 경찰이 입장권을 일일이 체크한 뒤에야 탑승을 허용했다. ‘아 경찰이 셔틀버스 탑승객을 미리 검색하는 구나’했더니 이게 웬일, 승객들이 모두 탄 뒤 경찰도 우리 셔틀버스에 올라타는 것이다. 알고 봤더니 셔틀마다 경찰을 배치, 전당대회 기간 동안 차장 역할을 하며 사전에 미심쩍은 사람들을 스크린하는 것이었다.

또 수시로 무전을 주고받으며 셔틀버스의 경로를 지시했다. 필라델피아 시청에서 웰스파고센터까지는 약 8마일, 차가 안 막히면 15분에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이날은 1시간 20분이 걸렸다. 더구나 가는 도중 사단이 났다. 막 출발해 몇 블록을 가는데 갑자기 양동이를 쏟는 듯 폭우가 시작됐다. ‘와이퍼를 켜도 소용이 없다’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 지를 마치 시범을 보여주는 듯 했다. ‘지나가려는 소나기’라는 하는 희망은 이내 절망으로 변했다.

차가 가면 갈수록 마치 비가 따라오듯 비는 더 퍼붓는 것이다. 교통 통제가 심한 상황에서 집중호우까지 내리니 더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상 셔틀버스 외에는 전당대회장 진입이 불가능하다. ‘아니 이게 이렇게 먼가’하는 사이에 다리도 건너고 하이웨이도 달렸다. 멀리 웰스파고센터의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어렴풋이 보인다. 아직도 너무나 멀었다. 그러다가 그냥 멈춰 서버렸다. 셔틀버스가 장사진을 이루며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서 족히 30분정도 기다린 것 같다.

마침내 웰스파고센터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수라장이었다. 밖에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다. 전당대회장에 들어가려면 텐트를 친 가건물에서 다시 몸수색을 받아야 하는데, 버스 주차된 곳에서 족히 30미터는 됐다. 너나 할 것 없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젖 먹던 힘까지 내서 하얀색 텐트로 미친 듯이 달렸다. 이곳에서 몸수색을 전담하는 팀은 SS로 알려진 백악관 비밀경호국 요원들, 각 후보들의 경호를 백악관 경호팀이 전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흰색 천막안은 이미 물로 흥건했다. 제발 신발만 벗지 말았으면 했는데 다행히도 신발을 벗으라는 요구는 없었다.

질리브란드 뉴욕 상원의원의 논리 정연한 연설

이 몸수색을 통과하니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천막에서 웰스파고센터 출입문까지 약 70미터는 되는 듯 했다. 또 질주가 시작됐다. 이제는 즐거운 질주였다. 이 비만 피하면 ‘드디어 입장이다’라는 생각으로 달렸다. 질주를 마치고 입구의 처마 밑에 도착하니 바로 입장하기 보다는 담배 한대가 그리웠다. 일행 중 나보다 뒤에 오는 사람도 있었다. 백미터 달리기 19초인 내가 광란의 질주를 했기 때문이다.

몇 명이 담배를 피우는 틈에 끼여 나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았다. ‘에이 이제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 모르는데, 빗줄기를 바라보며 여유있게 한대 피우자’ 거드름을 피웠더니 돌발사태 발생, 일행과 이산가족이 돼버리고 말았다. 전당대회장 내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어디에 누가 있는지, 또 전혀 생소한 장소에서 어디를 포스트로 정해서 만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에이’ 하면서 한쪽에 서서 여기저기 쳐다보고 서 있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길 잃은 탕아’를 향한 구조의 손길이 다가 왔다. 일행의 전화였다. 몇 층 몇 구역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VIP라운지로 갔다. 고액기부자들과 그들의 손님만 입장된다는 VIP라운지, 연단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고 술과 음식들이 무제한으로 공급됐다. ‘아 이런 별천지가 있구나’ 싶었다. 전당대회장은 관중석 꼭대기까지 민주당 지지자들로 가득했다. 그나마 3층의 꼭대기는 경사가 거의 70도에 가까워 한발만 잘못 디뎌도 큰 사고가 날 것처럼 보였지만 그곳도 물샐틈없이 꽉 들어찼다. 연단 바로 아래 플로어와 1층은 50개주에서 온 대의원이 자리 잡았다. 그 위에 전면이 유리로 된 VIP라운지가 있고 그 위로 2,3층의 관중석이 있었다.

전당대회장은 오후 개막과 더불어 쉴 사이도 없이 찬조연설자들의 연설이 계속 됐다. 따라서 맨 처음 1-2시간에 배정된 찬조연설자들은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연설을 하고 돌아가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막 8시가 넘었을 무렵, 그래도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때였다. TV를 통해 가끔 본 연방상하원의원과 주지사들이 줄줄이 연단에 올랐다. 그 유력한 정치인들에게 할애된 찬조연설시간도 3분에서 5분정도가 고작이었다.

크리스틴 질리브란드 뉴욕주출신 연방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 메사추세츠출신 연방상원의원등도 연단에 올랐다. 힐러리 클린턴의 뒤를 이어 뉴욕주 연방상원으로 선출된 질리브란드가 애교가 많고 매력적인 여인임을 이날 처음 알게 됐다. 연설내내 시종일관 애교 띤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논리를 하나하나 관철해 가는 모습이 이상적이었다.

코리 부커 20분간 연설 차세대 주자 선점

사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대통령 영부인 미셀 오바마 여사와 클린턴 전 장관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다. 혹시 9시 정도가 되면 미셀이 나오려나 했는데 순진한 기대였다. 이날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또 한명의 주인공은 오후 9시 40분께 등단한 코리 부커 뉴저지주 출신 연방상원의원이었다.

코리 부커에게는 이례적으로 약 20분에 가까운 시간이 배정됐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강렬한 인상의 코리 부커는 메르난데스 상원의원이 부패에 연관돼 물러남으로써 뉴욕 시장에서 단숨에 연방상원의원이 된 인물이다. 코리 부커는 ‘WE WILL RISE’ ‘우리는 일어설 것’ 이라는 말로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촉구했다. ‘STILL I RISE’ 나는 아직도 일어서 있다. 미국, 우리 모두 일어설 것이다’라는 말로 청중을 감동시켰다. 코리 부커에게 20분의 연설이 허용된 것은 그가 민주당의 차기 주자임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그의 연설은 대통령 영부인 미셀 오바마의 바로 앞이었다. 8년 뒤 민주당의 차기 대선주자가 누가 될지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미셀 오바마가 등단한 것은 코리 부커의 연설이 끝나고 2-3분가량의 동영상이 상영된 뒤인 10시4분께 였다. 단정한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이 여성은 ‘I AM WITH HER’라는 말로 8년전 비록 남편의 경쟁자였지만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자격을 갖춘 사람은 힐러리 클린턴뿐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녀는 처음 백악관에 온 겨울날 아침, 7살과 10살난 딸들이 총을 찬 건장한 남성들이 둘러싼 SUV에 타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그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견딜까 고민할 때 힐러리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었다고 밝혔다. 미셀은 특히 ‘우리 자녀에게 롤 모델이 되고 그들의 삶을 이끌어갈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한다’며 힐러리가 그 당사자라고 역설했다. 또 힐러리를 친구라며 힐러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할 때는 기립박수를 치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샌더스 연설’에 못 잊을 감동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날 최대의 감동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었다. 미셀의 연설 뒤 존 에프 케네디 3세 등의 연설이 이어진 뒤 밤 10시 50분쯤 마침내 샌더스 의원이 등단했다. 이날 샌더스 의원은 힐러리 클린턴이 반드시 미국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실상은 마치 그 자신의 선거 유세나 다름없었다. 백발노병은 이날 그의 연설을 통해 자신의 평소 생각을 남김없이 털어놓음으로써 힐러리 클린턴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미국을 이끌어야 하는지 강력한 주문을 한 셈이 됐다. 샌더스의 연설은 그의 경선이 결국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그의 생각만큼은 미 국민들의 가슴에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샌더스는 ‘THIS ELECTION, THIS ELECTION’을 부르짖으며 이번 선거는 이런 이런 것들을 없애야 한다, 종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40년동안에 걸친 중산층의 쇠락, 빈곤 속에 살고 있는 4700만명의 현실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반드시 끝장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낱낱이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정치 자금을 기부한 8백만명의 평균 기부액이 얼마였냐고 질문했고 27달러라는 답변이 이어졌다.

이때 전당대회장 카메라가 잡은 동영상은 샌더스 지지자들이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이었다. 특히 샌더스가 그의 생각을 하나 하나 말할 때 전당대회장에는 ‘우’하며 야유하는 듯한 반응이 나타나기도 했다. 작았지만 분명히 ‘우우’하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는 ‘반드시, 반드시 힐러리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감정에 복 받힌 듯 연설말미에는 ‘THIS ELECTION, THIS ELECTION’ 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한동안,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말문을 이어가지 못했다. 가슴속 응어리가 터진 것이다. 그는 민주당전국위원회가 불공정 경선을 했다는 이메일이 공개되자 ‘분하고 슬프다’고 말했었다.

이날 그의 목메임은 바로 이같은 심정의 우발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 목메임은 많은 미국민들보다 연설보다 더 큰 감동을 전했다. 그의 이 목매임은 아직도 미국사회가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을 웅변한다.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가라는 노병의 외침이다. 그러면서 그는 힐러리 클린턴에게 그 임무를 맡긴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 진심을 다해 토해내는 그의 사자후는 미 국민들의 영혼을 울린 명연설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미국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제시했다는 점만으로도 미국사회를 가장 발전시킨 정치인 중의 한 명으로 남을 것이다. 이번 대선 경선 과정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을 통틀어 진정한 승자는 버니 샌더스이며, 우리들 마음에 가장 빛나는 별로 자리 잡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불평과 빈곤의 종식 그리고 홈리스

샌더스의 연설로 전당대회 첫날은 막이 내리고 12시께 호텔로 들어와 1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나 피곤한 날이었다. 좋은 구경도 체력이 모자라 못하겠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려왔지만 모두의 마음에는 샌더스의 목매임이 남았다. 가까스로 침대에 몸은 뉘였지만 샌더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고 그의 목매임이 눈에 선하다. 룰루랄라 신나게 돌아다닌 필라델피아의 하루는 내 인생에 잊지 못할 하루로 각인되게 됐다.

나는 민주당도, 공화당도 아니지만 샌더스의 연설만은 가슴에 남는다. ‘종식’, ‘종식’. ‘종식’, 불평등과 빈곤의 종식, 샌더스의 외침에 필라델피아 곳곳을 메운 홈리스가 오버랩 된다. 세상에 내한 몸 누일 곳이 없단 말인가. 내 생활이 허용하는 만큼만, 내 형편 만큼만 아주 조금만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그러면 느리지만 세상은 바뀐다. 만물은 연관돼 있으므로…

<필라델피아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 안치용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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