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둘 여성 영화감독 20인 (5)
기억해둘 여성 영화감독 20인 (5)
  • 양유창
  • 승인 2016.08.23 0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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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 루피노, 웬디 토이, 일레인 메이

시리즈 5회에서는 배우에서 감독이 된 여성 3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모두 연기자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피사체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카메라 뒤에 섰습니다

13. 아이다 루피노

아이다 루피노는 영국의 배우, 가수 겸 감독이자 제작자로 1950년대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활약한 유일한 여성감독입니다. 48년 동안 그녀는 59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8편의 영화를 연출했습니다.

1918년 런던에서 태어난 루피노는 아빠, 엄마, 삼촌 등이 모두 가수나 배우로 자연스럽게 공연이나 영화를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는 원래 극작가가 되려고 했습니다. 7살에 연극 대본을 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빠를 기쁘게 하려고 13살에 로얄 아카데미 드라마 아트 스쿨에 진학했고 거기서 연기로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그녀는 1940년대에 걸쳐 평론가들로부터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여배우 중 한 명"이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녀가 맡은 배역은 대개 센 캐릭터였습니다. 둔감한 가정부를 연기한 영화 <은퇴한 숙녀들>에서는 자신을 막대하는 집주인을 살해하고 그 집으로 정신병이 있는 자신의 자매들을 데려옵니다. 또 <하드 웨이>에서 그녀는 동생마저 파멸시키는 무자비한 여성을 연기해 뉴욕 평단으로부터 호평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배우 생활에 싫증을 느낍니다. 그래서 감독에 도전합니다. 그 과정을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지루했다."

그녀는 남편 콜리어 영과 함께 독립 제작사 '필름메이커스'를 차리고 저예산으로 사회이슈를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관여한 첫 번째 영화는 1949년 엘머 클리프턴 감독이 제작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키자 공동 프로듀서와 공동 작가로 이름을 올린 <낫 원티드>입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감독 역할도 맡았지만 크레딧에는 클리프턴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낫 원티드>는 혼외 임신을 주제로 하고 있었고 개봉 후 꽤 논쟁적인 이슈를 양산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영부인이었던 엘레노어 루스벨트와 토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후 그녀는 정식으로 감독이 됩니다. 데뷔작 <네버 피어>(1949)를 시작으로 강간을 소재로 한 <아웃레이지>(1950), 남자들만 출연하는 필름느와르 <히치하이커>(1953) 등을 만듭니다. 이 영화를 통해 루피노는 필름느와르를 만든 첫 번째 여성감독으로 기록됩니다.

필름메이커스 프로덕션은 총 12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중 6편을 루피노가 감독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연출 욕심이 많았습니다.

<아웃레이지>

루피노는 투자자들을 향해 자신을 '불도저'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촬영장에 있을 때는 배우와 스태프들을 향해 자신을 엄마라고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감독 의자에 이렇게 써붙여 놓았다고 하네요. '우리 모두의 어머니 (Mother of Us All...)'

그녀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영화제작 환경에서 자신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늘 강조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자들은 달라요.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와도 괜찮죠. 휴가 기간에는 항상 아내가 찾아와서 그와 함께 있어요. 하지만 아내의 경우엔 남편에게 이리 와서 옆에 앉아 있으라고 말하기 힘들잖아요."

그녀는 저예산영화로 돈을 벌 방법을 계속해서 찾았습니다. 다른 스튜디오의 세트를 재활용하기도 하고, 그녀의 주치의에게 의사로 잠깐 출연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또 그녀는 대여료를 아끼기 위해 공공장소에서 주로 촬영했고, 촬영 당일 실수를 줄이기 위해 미리 충분한 기술적인 리허설을 했습니다. 요즘 PPL이라고 불리는 것을 거의 처음으로 활용한 것도 루피노입니다. 코카콜라, 캐딜락 등 여러 브랜드가 그녀의 영화에 등장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농담하곤 했습니다.

"여배우로서 내가 가난한 남자의 베티 데이비스였다면, 감독으로서의 나는 가난한 남자의 돈 시겔입니다."

필름메이커스 프로덕션은 1955년 문을 닫습니다. 루피노가 마지막으로 감독한 작품은 1965년 카톨릭 학교의 소녀를 다룬 코미디 <천사들의 소동>입니다. 이후 그녀는 TV 드라마로 넘어가 화려한 경력을 이어갑니다.

루피노는 웨스턴, 초자연, 시트콤, 살인 미스터리, 갱스터 등 다양한 장르의 TV드라마 100여편을 연출했습니다. 이중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환상특급]도 포함됩니다. 그녀는 이 시리즈의 에피소드를 연출한 유일한 여성감독이었습니다. 또 [언터처블] [앨프리드 히치콕 프레즌트] 등 유명 TV시리즈의 에피소드를 연출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페미니즘은 중요하죠. 하지만 남자는 보스 기질을 가진 여자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가끔 나는 카메라맨에게 잘 모르는 것처럼 말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잘 도와주거든요."

하지만 빌리지 보이스의 기자 캐리 리키는 루피노를 현대 페미니스트 영화감독의 한 모델로 인정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루피노는 제작, 연출, 각본을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영화들은 섹슈얼리티, 여성의 독립과 의지 등을 다뤘다."

그녀는 1995년 결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세 번 결혼했고 한 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14. 웬디 토이

웬디 토이는 영국의 무대감독 및 영화감독이자 댄서 및 배우입니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녀는 안무가와 댄서로 커리어를 시작해 장 콕토, 캐롤 리드 감독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녀의 무대 관련 자료는 런던의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947년 뮤지컬 [신부에게 축복을]을 연출하며 무대 뒤에서 창작의 즐거움을 알게 된 그녀는 1950년대 들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80편이 넘는 연극을 연출했고, 수십편의 오페라, 4편의 TV 시리즈, 9편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토이가 만든 첫 번째 영화는 <이방인은 카드를 남기지 않는다>라는 단편영화로 1953년 칸 영화제에서 단편극영화상을 수상합니다. 또 1955년에 만든 <12번째 날>은 오스카 단편영화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녀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영화를 만들었고, 호주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1963년에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1992년 영국 왕실은 그녀의 예술 업적을 기려 그녀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합니다.

그녀는 2010년 9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15. 일레인 메이

<새로운 잎새> 촬영장의 일레인 메이
1962년 뉴욕에서 열린 한 비공식 만찬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만난 일레인 메이와 마이크 니콜스.
일레인 메이와 마이크 니콜스 콤비.

1932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일레인 메이는 코미디언에서 영화감독이 된 여성입니다.

그녀는 1950년대 마이크 니콜스와 함께 즉흥 코미디 연기를 펼쳐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우디 앨런의 영화들을 주로 제작한 잭 롤린스는 두 사람의 연기를 보고 이런 평을 남겼습니다.

"아주 새롭고 신선해서 깜짝 놀랐어요. 어리둥절할 정도로 좋습니다."

메이와 니콜스 콤비는 후대 코미디언들인 스티브 마틴, 빌 머레이, 데이비드 레터맨 등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60년대 들어 갈라섭니다. 매번 똑같은 즉흥연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내려옵니다.

이후 니콜스와 메이는 모두 극을 쓰고 연출하는 길로 들어섭니다.

우선 메이는 몇 편의 희곡을 썼습니다. 작가로써 그녀의 성공작은 1막 구성의 [어댑테이션]입니다.

이후 그녀는 영화 각본을 쓰고 감독 데뷔를 하는데 첫 번째 영화는 1971년작 <새로운 잎새>입니다. 잭 리치의 [그린 하트]를 각색한 컬트 블랙코미디로 메이는 이 영화에서 부유하지만 멍청한 식물학자로 분해 파산한 맨해튼 남성과 로맨스 연기를 펼칩니다. 원래 180분짜리 영화를 파라마운트 스튜디오가 80분으로 짤라 개봉했습니다.

메이의 두번째 영화는 1972년작 <하트브레이크 키드>로 흥행과 비평에서 대성공을 거둡니다. 찰스 그로딘, 시빌 셰퍼드 주연으로 로튼 토마토에서 90%의 신선도 지수를 유지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하트브레이크 키드>

두 편의 코미디를 만든 그녀는 세번째 영화로 범죄 드라마에 도전합니다. <미키와 니키>라는 제목으로 피터 포크와 존 카사베츠가 주연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180만 달러 예산으로 1975년 여름 개봉 예정이었는데 제작이 계속 늦어져 결국 430만 달러를 들여 1976년 겨울에야 개봉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에서 해고당합니다만 재미있게도 네거티브 필름 두 릴을 숨겨놓고 있다가 돌려주는 조건으로 재고용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국 흥행에서 참패하고 이후 메이는 한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합니다.

메이가 재기한 것은 1980년대 톱스타 워렌 비티가 <이슈타르>(1987)의 감독으로 그녀를 지목하면서부터입니다. 그녀는 거의 10년 만에 다시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대부분의 장면을 모로코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이 영화는 그러나 아쉽게도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다시 한 번 실패하고 맙니다.

이후 그녀는 2016년 TV 다큐멘터리 [마이크 니콜스: 아메리칸 마스터]를 만들기 전까지 다시는 감독을 맡지 못합니다.

그녀는 영화 연출을 하지 않을 때에도 각본 작업은 계속했습니다. 아카데미상에 두 번 노미네이트되었는데 <천국이 기다린다>(1978)와 <프라이머리 컬러스>(1998)입니다.

<프라이머리 컬러스>는 마이크 니콜스와 함께 한 영화로 그 이전 1996년 두 사람은 거의 30년 만에 재회해 각각 <버드케이지>의 감독과 각본을 맡아 협업한 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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