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에서도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방법...낙관의 근육 만들기
포로수용소에서도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방법...낙관의 근육 만들기
  • 신순규
  • 승인 2016.09.03 0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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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시각장애 애널리스트 신순규의 [마음으로 보는 세상]
신순규 ⓒ <뉴스 M>

나는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책, 신문, 잡지, 팟캐스트 등에서 많은 이들의 드문 스토리와 생각을 듣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스토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좀처럼 나의 머릿속을 그리고 마음속을 떠나지 않을 이야기 하나를, 미국에서 최고 인기를 자랑하는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This American Life)’이라는 팟캐스트에서 얼마 전에 접하게 되었다.

‘걸가이드’라는 단체는 미국이나 다른 여러 나라에 있는 걸스카우트와 비슷하다. 이 걸가이드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던 제이니 햄튼(Janie Hampton)은 런던에 있는 걸가이드 본부에서 어느 날 작은 노트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걸가이드 한 명이 자신의 걸가이드 활동을 기록한 일기장이었다. 제이니가 거기서 읽은 것 중 이런 기록은 한 여자 아이의 일기장에서 나올 법한 말이었다.

“오늘은 뛰어놀기, 매듭 만들기 등 재미있는 놀이를 많이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느 날 불렀다는 이 노래의 가사는 제이니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We might have been shipped to Timbuktu.
(팀북투에 보내진 것도 아니고)
We might have been shipped to Kalamazoo.
(칼라마주에 보내진 것도 아니지)
It's not repatriation, nor is it yet starvation.
(그렇다고 귀환도 아니고, 아직은 굶는 것도 아니야)
It's simply concentration in Chefoo.”
(그냥 즈푸에 수용된 것뿐이지)

제이니는 이 이상한 노래 가사를 시작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한 귀중한 스토리를 알아내게 된다. 그 이야기는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던 1941년 12월 7일 직후에 시작되었다. 중국에 있는 한 외국인 학교를 일본 군인들이 점령했고, 미국이나 유럽 출신 학생들 약 150명과 그들의 선생님들을 즈푸에 있는 웨이셴 포로수용소에 감금했던 것이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전쟁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자, 같이 감금될 선생님들은 한 가지 지혜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아이들을 위해 책, 종이, 악기, 걸가이드 유니폼 등을 챙겼다. 그리고 이것들을 이용해 거의 4년 가까운 세월의 감금이란 현실을,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추억이 많은 어린 시절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들은 아이들에게 걸가이드가 추구해야 할 일을 계속 시켰다. 하루에 적어도 한 번씩 착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항상 돕고, 걸가이드들이 노력해서 취득할 수 있는 공훈 배지를 하나둘씩 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걸가이드다운 예의범절을 계속 고집했다.

예를 들어, 가축에게 먹이는 옥수수로 만든 죽 같은 음식을 비누 그릇이나 깡통에 담아 먹을 때도, 식사 매너를 잊지 말 것을 가르쳤다. 음식이 아무리 역겨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고, 입에 음식이 있을 때는 말을 하지 않을 것 등을 가르쳤다. 버킹엄 궁전에 사는 공주나 웨이셴 포로수용소에 사는 그들이나 같은 식탁 매너를 지켜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자주 해야 했던 노동 역시 게임으로 바꿔서 아이들로 하여금 고생이 아니라 경쟁심에 초점을 맞추게 했다. 예를 들어, 추운 겨울에는 군인들이 쓰다 남은 연탄 찌꺼기를 가져다 흙과 물 등을 섞어서 그들만이 쓸 수 있는 연탄을 만들었다. 그것을 난로에 넣어서 불을 지펴 추운 겨울을 견뎠다. 그런데 누가 만든 연탄이 제일 난로를 뜨겁게 하는지를 측정해서 아이들에게 공훈 배지를 주었다고 한다. 미국 뉴저지에 사는 메리 프리바잇(Mary Previte)은 그녀와 그녀의 친구 마조리가 난로를 제일 뜨겁게 하는 경기를 이기곤 했다면서 그녀의 수용소 생활을 회상했다.

또 메리는 그들이 수용소에서 불렀던 많은 노래들을 기억하면서 기자와의 인터뷰 중 일곱 번이나 노래를 불렀다. 82세가 된 그녀는 물론 제이니가 발견한 노래도 알고 있었다. 1942년 크리스마스에 그들이 지어 부른 노래라면서 그 곡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불렀다. 이처럼 그들은 많은 것을 노래로 표현하면서, 또 노래로 위로를 받았다. “하나님이 곁에 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힘.” “무슨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등의 메시지를 노래로 항상 불렀다. “내가 안전하다.”라는 생각을 마치 마음속에 새기고 새기기 위해…….

꼭 여름캠프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메리는 그녀와 친구들이 처해 있던 환경을 설명했다. 무장 군인들, 방벽, 전화된 철망, 총검 훈련, 사나운 개 등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들이 거기에 놀러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그저 어른들이 그들의 동심을 지켜 주기 위해 노력했던 결실로, 그들은 거의 4년이란 세월을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삶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과 비교될 경험은 나의 기억에 없다. 그래도 제일 가까운 기억은 약 7년 동안 계속됐던 회사에서의 힘든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한동안 떠오르는 스타로 윗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나는, 주식 시장에서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던 2000년부터 점차 그것을 잃기 시작했다. 연봉에 거의 반이 되는 보너스가 없어져 버린 2001년부터는 경제적으로도 힘든 생활이 시작됐다. 월가에서 보너스는 돈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너스는 회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명백하게 보여 준다. 즉 보너스가 없다는 것은 “너가 우리 회사를 떠나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표현인 것이다.

“너는 있거나 말거나하는 사람이야”란 취급은 견딜 수 없이 어려운 혼란을 가져다준다. 이 경험에서 나는 자살 충동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내 속마음을 다 보여 주지 못한 채 몇 년을 견뎌야만 했다. 급할 때는 카드빚을 내기도 하고, 집을 담보로 하는 융자를 집의 가치보다 더 많은 액수로 올리기도 했다. 불어나기만 하는 빚 액수를 보면서, 이 상황에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을 자주 했다.

사람들은 나를 낙관적이라고들 한다. 나 역시 내가 아주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가 그 7년 동안의 힘든 나날들과 내 삶에 있어 다른 어려움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원래 낙관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걸가이드들이 수용소에서 그랬듯이, 나는 하루하루 내가 해야 할 일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노래로 그랬듯이, 나 역시 내가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나 자신에게, 또 다른 이들에게 계속 말해 왔다.

운동을 계속 하다 보면 운동에 소질이 없는 사람도 운동을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게 된다. 운동에 필요한 근육과 스킬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계속 낙관을 고집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낙관의 근육과 버릇 역시 생기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이것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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