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오! 목사는 성직자입니다
아니오! 목사는 성직자입니다
  • 김기현
  • 승인 2008.03.0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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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종교인 과세 논란에 관한 TV 토론을 우연찮게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중 특정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호화 생활이 집중적으로 부각된 다음이라 세금도 안내면서 그런 생활을 한다는 따가운 질책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분이 목사는 다른 직업과 달리 성스러운 일을 하는 성직자이고, 교회는 사업체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노동자나 회사의 기준으로 세금을 매길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굳이 세금을 내는 것에 반대는 하지 않지만, 그런 기준을 목회자에게 들이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 이후, 인터넷 신문인 <뉴스앤조이>에 ‘목사가 성직자인가?: 목사직에 대한 지나친 우월의식이 가져온 사태 비판합니다’는 글이 실렸습니다. 구구절절이 옳은 지적이었습니다. 성직은 구약적 개념에 불과한 것이고, 관리집사도 성직인데 그렇게 대우하지 않지 않느냐, 종교개혁의 이상이 ‘전 신자 제사장 원리’-그런데 아쉽게도 이분은 만인 제사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시더군요-에 어긋나며, 교회가 성전이 되고, 목사가 성직자가 된 것이 신학적 무지의 소치로 한국 교회의 타락의 주요한 한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위의 두 경우를 보면서 한쪽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참 능청스럽게 잘도 하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연코 목사는 성직자가 아닙니다. 그건 성경적이지도 않고, 종교 개혁적 이상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한 침례교회에서는 목사를 ‘성직자’라고 하지 않고 ‘목회자’라고 합니다. 아마 많은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공식적 명칭은 목회자이면서도 강단이나 은연중에 성직자라고 말하고, 호칭하는 것은 몸에 밴 습관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차제에 그런 언어 습관은 고쳐지면 좋겠습니다.

반면 반론 글에 달리 이의가 없습니다. 흠 잡을 데 없이 적절하고 정확한 지적입니다. 더하거나 감하고 싶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뭔가 아쉬움이 있습니다. 목사를 “목사는 성직자가 아닙니다”라는 규정으로 목사란 직무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뭔가를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뭔가를 하는 사람으로 설명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 목사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존재이기에 성직자가 아닌지를 근원에서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피는 것이 필요한 듯해서 몇 자 적어봅니다.

목사란 어떤 존재인가

저는 먼저 목사가 직면한 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목사의 위치와 존재감은 헨리 나우엔의 경험이 잘 대변해줍니다. 그는 한때 배에서 선상 신부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상처 입은 치유자>, 두란노, 116~117쪽) 배가 긴박한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선장은 자신과 마주친 나우엔 신부를 향해 저리 비키라고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고는 곧 신부님이 필요하니 함께 있어달라고 말합니다. 이를 두고 나우엔은 “고통스러운 아이러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역자는 환대를 받기도 하고,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그의 유명한 ‘상처 입은 사역자’라는 개념은 여기서 싹틉니다. 그가 말하는 상처는 ‘외로움’입니다. 사역자로, 한 인격으로, 한 형제와 자매로 인정을 받기보다는 각자의 사정과 필요에 따라 대우 받는다는 것,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사역자를 절실히 요구하지만, 어느 선에서는 금을 확실히 긋고는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는 사인을 강력하게 보낼 때, 사역자들은 그 주변을 맴돌면서 부질없는 외로움에 빠져듭니다. 나우엔이 비록 그 외로움이 사역자로 하여금 사역자답게 한다고 했지만, 어쨌든 외로움이 사역자를 계속해서 후벼 파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학이 학문의 여왕이던 중세도 아닌 마당에, 선박과 운항에 관한 문외한인 사역자로서 불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과 마르바 던은 한 걸음 더 나가서 아예 대놓고 목회자는 ‘불필요한 존재’(unnecessary pastor)라고 선언합니다. 세 가지 점에서 불필요한 존재입니다.(<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좋은씨앗, 16~18쪽) 우리 문화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불필요합니다. 이는 위의 나우엔 이야기와 대동소이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가치관의 핵심인 성공이나 특권의 잣대로 보면 목사는 불필요한 존재입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교인들의 요구와 주장과는 별개의 존재입니다. 목사를 목양자가 아니라 전문가요, 관리자, CEO가 되기를 원하는 교인들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희한하게도 목회자 스스로 CEO라고 말하고, 교회를 이득과 이윤을 추구하는 경영학적 측면에서 교회가 자꾸 증식과 증대, 확장과 확대만을 지향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외롭지 않으려다가,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버둥거리다 더 외로워지고 더 불필요해졌습니다. 더 초라해졌습니다. 세상에서 불필요한 존재가 됨으로 하나님에게는 필요한 존재가 되고, 세상에서는 외로울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꾼이 되어야 마땅하거늘 그러질 못합니다. 무익한 종(눅 17:10)이 되기보다는 유익한 종이 되려고 합니다.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를 긍정하고 싶어 합니다. 긍정의 힘을 믿어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하여튼,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쓴 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제 모습을 두고 오늘 아내에게서 충고를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목사직의 개념이 모든 주의 제자들의 정체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도 발견합니다. 주님도 외로우셨고, 건축의 전문가들이 보고 형편없다고 버린 돌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디 목사만 외롭나요. 교인들도 쓸쓸하고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자신의 외로움으로 타인의 외로움을 치유하고, 세속의 표준으로 볼 때 불필요한 존재가 됨으로 도리어 그리스도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에 일반 교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그토록 극렬히 저항해 마지않던 가톨릭의 이중윤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면 교회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보아야 합니다. 그는 교회를 ‘집’과 ‘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동적입니다. 그럼에도 양자는 유기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어느 하나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다 같이 집과 몸의 일부입니다. 하여,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우열을 가리는 것은 바울의 은유를 이해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집이요, 몸이라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다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일을 한다는 점에서 ‘기능론적으로’ 다 다릅니다. 

때문에 목사와 교인은 주 안에서 동일합니다. 다 함께 하나님나라의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목사는 성직자여서 교인들과는 뭔가 다른 존재, 남다른 권위를 갖고 있고, 그에 합당한 존경을 당연시 하는 것은 교회의 비밀을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고, 그것을 당연시 여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높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정면 부정입니다.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는 하나님나라의 도치된 세계관을 제대로 훈련하지 못한 탓입니다.

목사에게 둘러 씌어졌던 신성의 아우라가 벗겨졌다고 해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법이 원천적으로 잘못된 것이어서 주 안에서 모두 동등하고, 동일하다고 해서 목사에 대한 존중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잘못입니다. 분명히 기능적으로 교회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중요한 일을 합니다. 그러니 목회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컨대, 아나뱁티스트들은 목사를 별 다른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복종을 엄격히 가르칩니다. 신앙은 복종이기 때문입니다. 

이 양면을 사도 베드로는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권면을 합니다. 베드로는 장로, 곧 목회자들에게 - 침례교회에서는 신약의 장로를 목사라고 해석합니다. -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면서 경제적인 관점을 따라 해서는 안 되고, 어찌하든지 간에 공동체의 본이 되라고 당부합니다. 동시에 젊은이들에게 권면하기를 목회자에게 순종하고 겸손하라고 가르칩니다(벧전 5:1~6). 권위주의의 해체를 곧 권위의 부정으로 혼동하기 쉬운 것은, 그리고 그것이 젊은이들에게 많이 보이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가 봅니다. 

지금까지 목사란 어떤 존재인지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몇 영적 스승들의 가르침으로 목사라는 직분을 이해할 때, 오늘 목사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론으로 볼 때, 존재 자체가 아니라 기능적으로 다르다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전 신자 제사장 원리로 모든 신자가 제사장입니다. 즉, 신자들의 모든 일상은 예배이자 제사 행위이고,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니 모든 신자는 성직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목회자는 성직자입니다.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목사‘도’ 제사장입니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니까요. 

모든 신자는 성직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대한기독교서회)에서 마르틴 루터가 수도원으로 갔던 것과 다시 세속으로 돌아온 연유를 해설합니다(28~31쪽).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고자 한 열망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그것을 소수의 특별한 몇 사람의 행위로 제한한 것은 결국 루터가 나중에 강력히 근절하고자 했던 가톨릭적 자기 공로 사상이 침투할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수도원도 세상이고, 경건의 모양을 한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마지막 남은 자기애를 버리기 위해 루터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본회퍼는 종교개혁의 핵심을 이신칭의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종교 개혁적 선언은 죄 사유에 의한 세상의 의인도 성결도 아니다”(30쪽). 그러면 무엇인가요? 곧 바로 본회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세속적 직업이 의롭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루터에게 있어서 오직 그 직업에 의한 세상에의 항의가 아주 날카로울 때 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속적 직업을 예수를 따름으로 수행할 때 그것은 복음에 의하여 새 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목사만 성직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요, 성도가 하는 일은 모두 성직입니다.

한번은 성경번역선교회 소속 선교사님을 모셔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일오전 예배였습니다. 이분이 강단에서 던진 첫 마디는 이랬습니다. “신학교도 나오지 않아서 안수 받지 않는 제가 강단에, 그것도 주일오전 예배에 서 있다는 것이 참 이상하네요.” 그분의 설교가 끝난 다음에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목사가 아닌 성도들이 강단에 서서 설교도 할 수 있고, 간증도 할 수 있는 것은 강단이 거룩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외 없이 성도들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누구나 설 수 있고, 설교도 할 수 있습니다.”

조심스레 에둘러 왔던 것을 툭 털어놓고 말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를 성직자로 간주하는 것은 탑에서의 깊은 영적 체험 이전의 가톨릭적 루터의 모습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성직자라고, 일반 노동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라고 하는 분들은 수도원을 나오고 있는 과정의 루터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목사가 성직자가 아니라면, 누가 제사장입니까? 마지막으로 세상으로 나온 루터는 말합니다. 직업에 의한 세상에의 항의가 아주 날카로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제 아무도 성직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이제 모두가 성직자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뱅뱅 맴도는 목회자들, 그래서 세상에 대한 감이 떨어지는 목회자들보다 누구보다도 세상을 가장 강하게 느끼고, 세상으로부터 위협의 한 가운데 거하고, 그래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과 맞붙어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성도들이 성직자입니다. 그러니 목사들이 제발 우리는 성직자야라고 말하기를 그쳐야 하겠습니다. 성도들도 이제는 우리가 성직자라고 말해야 할 때입니다. 거친 세상 한복판에서 말입니다. 날카로운 항의자로 세상 한가운데로 뛰어들며 말입니다.

김기현 목사 / 부산 수정로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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