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주의의 실종, 그저 부끄럽다
인도주의의 실종, 그저 부끄럽다
  • 지유석
  • 승인 2016.10.01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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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 어 베터 월드], 그리고 고 백남기 농민

환자를 치료하는 병동은 가장 인도주의적인 공간이다. 아니, 인도주의적이어야 한다. 한 인간의 생명은 정치, 종교, 문화, 인종을 초월해 그 자체로 숭고하다. 그렇기에 그토록 소중한 생명을 치료하는 공간은 숭고함이 보장되어야 한다.

덴마크 영화 <인 어 베터 월드>(2010. 원제 In a Better World)는 병상의 숭고함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겪는 심적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연출자 수사네 비르는 안톤, 마리안느, 엘리아스, 크리스티안 등 네 주인공의 감정 동선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영화 <인 어 베러 월드>의 한 장면. 주인공 안톤은 의사다.

이 가운데 안톤은 의사다. 그는 외도로 인해 아내 마리안느와 별거 중이다. 별거의 아픔을 잊기 위해 그는 정기적으로 아프리카로 의료 봉사를 떠난다. 그런데 아프리카 현지 사정은 살벌하다. 지역 군벌은 주민들을 가혹하게 다룬다. 심지어 한 임산부의 배를 가르기도 하는 등 극악무도하기 이를 데 없다. 이를 본 안톤은 넋을 잃는다.

그러던 차, 지역 군벌이 심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온다. 이 군벌은 안톤에게 진료를 부탁한다. 진료를 잘 해주면 두둑한 대가를 약속하면서. 안톤을 돕던 현지 의료진들은 이 군벌의 제안에 혀를 내두른다. 그리곤 안톤에게 군벌을 돌려보내라고 압력을 가한다.

안톤이 의료 봉사를 떠난 아프리카의 한 지역은 군벌이 장악하고 악행을 펼치는 곳이다. 군벌에게 괴롭힘 당하는 이들은 여성, 어린이 등 약자들이다. 그런 군벌이 심한 부상을 입고 병원을 찾는다. 안톤은 치료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한다.
지역 군벌의 모습

안톤은 한 인간으로서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군벌이었기에 모른 척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서의 본분, 즉 병든 이를 고치는 역할에 충실하기로 결정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그래서 안톤은 군벌을 진료한 후에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안톤은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군벌과 결탁하는 대신 진료 이상의 대가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안톤은 병상이 인도주의적인 공간임을 강조하며 군벌을 호위하던 무장경호원을 돌려 보냈다. 비록 초라한 병동이었지만 안톤은 이곳에 인도주의가 지켜져야 함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인간의 생명에 끼어든 정치적 판단 

지난 25일 고 백남기 농민이 숨을 거뒀다. 그런데 고인이 누워있던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발급한 사망진단서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병원측은 고인의 사망원인을 병사로 기록했다. 병사라니, 고인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316일 동안 의식불명에 있다가 숨졌다.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 사실은 그를 진료해온 서울대병원 의료진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런 의료진들이 왜 고인의 사인을 병사라고 기록했을까? 혹시 고인의 죽음이 정권에 부담을 줄까봐 정권이 압력을 가했을까? 외압이 사실이라고 해도, 한 인간의 죽음에 의료진이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도입부에서 꺼낸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면, 병동은 한 인간의 생사가 오가는 공간이다. 그리고 의료진은 자신의 모든 의학지식을 동원해 한 생명을 살려야 한다. 물론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사례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때엔 최대한 이 생명이 이 땅에서 어떤 이유로 생을 마감했는지 정직하게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백남기 농민 분향소.

그러나 이 정권에서는 이런 인도적 원칙은 통하지 않는다. 목숨 걸고 40일 넘게 단식한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몸을 가누지 못해 병원에 입원하자 보수단체 소속 사람들이 항의전화를 했단다. 이 자들이 했던 말이 기막히다. 

"저 나쁜 놈 얼른 내보내라"

아무리 살인마여도 치료 받을 권리는 있는 법이다. 하물며 자식 잃은 아빠가 자식이 죽은 이유를 알고 싶다며 생사를 넘나든 단식을 했는데, 의료지원 조차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 역시 정치적 판단이 개입한 부끄러운 사례로 남게 됐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한 인간의 죽음에 조차 볼썽 사나운 논란이 불거지게 됐는지, 그저 인간으로서 부끄럽기만 하다. 

오늘 다시 <인 어 베터 월드>를 꺼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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