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부인, 뉴욕 교회에서 첫 간증 집회
망치부인, 뉴욕 교회에서 첫 간증 집회
  • 유영
  • 승인 2016.10.02 13:05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민주화 도운 뉴욕우리교회에서 금요 집회 특별 강사로 초대

‘망치부인’의 첫 시사 간증 집회가 뉴욕에서 열렸다. 망치부인 이경선 씨는 정치 시사 분야 개인 방송 진행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첫 간증 집회는 뉴욕우리교회에서 진행됐다. 뉴욕우리교회 조원태 목사는 현재 정의를 두고 설교하며 교인들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번  집회는 개인 구원을 넘어 교회가 이 시대에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일환으로 준비됐다. 

뉴욕우리교회의 전신인 포레스트힐교회는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한인 교회이기도 하다. 교인들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사람들 앞에 서서 다시 연설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고 김 전 대통령은 망명 생활 중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없어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교인들은 그가 간증 집회를 빌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고 김 전 대통령은 3000여 명이 모인 장소에서 그 유명한 ‘현해탄 간증’을 했다. 

'망치부인' 이경선 씨의 첫 간증 집회가 뉴욕우리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집회는 외부에 많이 알리지 않았지만, 교인과 망치부인 방송 청취자 등 70여 명이 모였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망치부인은 간증에 앞서 민주화의 유서가 깊은 교회에서 간증할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영광이라고 밝혔다. 장소도 장소지만, 교회 강대상에 서서 무언가 이야기하는 게 처음이라 무척 떨린다고도 했다. 실제로 망치부인이 교회에서 이러한 집회를 열고, 간증과 시사를 이야기한 건 처음이다. 

간증에 앞서 망치부인은 자신이 별명으로 사용하는 ‘망치’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했다. 망치부인이라고 하면 큰 해머 등 과격한 이미지를 떠올려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망치는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이 탈출에 사용한 작은 망치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만약 망치가 버려지지 않았다면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공은 19년 동안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갇혀 있었다. 그리고 이 작은 망치로 아무도 모르게 탈출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탈주에서 이 망치를 버린다. 이 이미지를 생각했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상황에서 탈주하는 도구로 내 방송과 말이 사용되기 바란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나는 잊히고 버려지기 바라는 마음이다.” 

자신이 생각한 망치는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이 탈출에 사용한 작은 망치라고 말했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개인 시사 방송 진행자로 준비되기까지

망치부인은 먼저 하나님을 믿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어린 시절 동네에 민간요법 등으로 아이들을 괴롭히던 할머니에게 무당이 되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말하자 그 길로 교회에 나갔다. 이후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때가 8살이었다. 이후 30년이 넘도록 새벽기도에 나가시며 자녀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리고 먼저 예수를 영접한 언니의 권유로 영접 기도를 했고, 그날 이후 예수를 구주로 삼고 살았다. 언니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서 목회하는 형부와 결혼해 사모로 살고 있다. 그러니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괜찮다.” 

그는 이후 삶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개인 방송 진행자로 살 가능성을 경험하게 했다고 말했다. 

“정말 어린 시절,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 그 장면을 직접 티비로 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티비가 나오지 않는 모습도 말이다. 이후 생방송에 딜레이 방식이 도입되었다고 들었다. 그날 아버지는 전쟁이 날까 흰 티가 다 젖도록 뛰어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공산당이 싫어 월남한 분이었다. 전쟁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전쟁을 극도로 두려워 하고 걱정했다. 

몇 년 후,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이 그였기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종신제인 줄 알았다. 많은 사람이 울었는데, 대학생 언니도 울었다. 대학생 데모를 걱정해 정부가 휴교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는 왜 휴교령이 안 내릴까 함께 울었다. 9일 동안 티비 정규 방송을 중단했다. 처음에는 참았다.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이 죽어도 그렇지 어떻게 2주 동안 캔디를 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반 정부 발언을 처음했다. 

언니는 공부에 매인 사람이었다. 어느날 광주에서 군인들이 국민을 도륙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스를 유심히 보았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언니가 미친 줄 알았다. 며칠 후 ‘MBC’에서 간첩이 내려와서 진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12살에 뉴스를 믿지 않게 됐다. 그 이후로 뉴스를 보지 않게 되었다. 

6.10항쟁을 경험하면서 다시 뉴스를 보게 되었다. 어머니가 심장병이 있었는데, 서울대병원에서 연세대병원으로 옮겼다. 그 시기 이한열 열사가 죽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매일같이 집회가 열렸고, 경찰과 대치했다. 

대학에 가서 학생 운동을 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던 현대사를 배워 눈이 뒤집혔다. 하지만 운동권 선배들은 대부분 무신론자였다. 그래서 절반만 운동권에 걸친 사람이 되었다. 한총련이 일어날 때,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결정되는 것을 보았다. 난 사람들에게 몇 년 안에 무너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정말 힘을 잃었다. 

운동권에 회의하며, 삶의 목표를 잃었다. 자살하려고 했다. 그때 언니가 이제 그만 방황하고 교회로 돌아오라고 이야기했다. 그동안 언니를 우습게 보았는데, 그날 그 말씀은 권위가 있었다. 그래서 교회로 대학생 때부터 나가지 않았던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됐다. 이후 저명한 선교사님들이 번갈아 가며 나를 돌봐주는 경험을 했다. 분노에 차 있고, 자살하려고 했던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간이었다.”

망치부인은 자신이 시사적인 내용으로 개인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인도하셨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이후 망치부인은 결혼하고 아이도 낳는다. 당시 남편이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상황이라 학생들에게 사회탐구를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남편은 집안일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풍을 맞았다. 그래서 외국계 은행으로 일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절세를 명목으로 탈세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돈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같은 모습이 될 것 같아 그곳에서 나왔다. 

1000만 원을 벌어, 500만 원을 쓰던 시기였다고 한다. 씀씀이를 줄이기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3개월을 아무것도 쓰지 않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지갑도 두고 다니고, 걸었고, 얻어 먹었다. 그러다 김근태 의원 선거 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인터넷을 접했다. 그리고 2달 만에 김근태 의원 선거 홈페이지 제작 업무를 맡았다. 

“당시 인터넷을 접하면서 이곳에서 다른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흐름을 쭉 지켜보았다. 그렇게 지내다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다. 김근태 의원을 위한 전국 조직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다 졸음운전으로 죽을 뻔 했다. 이후 인생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날 죽었다고 고백했다. 가면 가고, 서라면 선다고 함께 말이다.”

백남기 농민과 세월호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슬퍼하는 교인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개인 시사 방송 진행자가 되다

망치부인은 우리나라에서 개인 방송이 생소했던 2008년부터 정치 시사 분야로 영상 방송을 했다. 당시 인터넷 라디오 형식으로 올라오는 방송은 있었지만, 정치 박사들이 진행해 언어가 민중과 괴리했다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저자거리에서 짐을 나르는 이가 들어도 공감하고 이해할 언어를 사용해 방송하겠다고 생각했다. 방송에서 자주 사용하는 욕은 이를 염두하고 외우고 연습한 것이다.

“당시 인터넷에는 한국이 왜 일본에서 독립했느냐는 말이 인터넷에 많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익명성에 근거한 사람들이 욕을 많이 했다. 당시 욕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응어리가 많아 그러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야기를 들으니 어려운 상황과 환경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회에서 배우고 경험한 마음을 만지는 말들로 함께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저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욕하는 건 네가 아니라 자기한테 하는 거야. 너한테 멋진 아버지가 될 수 없어서 너에게 그런 말하는 거야.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거야. 사람들이 많이 공감해 주었고, 함께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다. 

유쾌한 내용과 가슴 아픈 현실을 간증으로 나눈 망치부인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웃고 눈물 흘리며, 현재 우리 상황과 하나님나라를 고민했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이후 누군가 나를 욕하면 그 친구들이 나서서 막아준다. 국정원 직원이 우리 딸을 납치하고 성폭행한 후, 토막살해 하겠다는 말을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이 정보를 모아주었다. 그것으로 국정원 직원이 그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의 고발로 국정원 직원이 해고당하는 일이 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다. 

아프리카 TV에서 방송하면서 엉뚱한 말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 민노당과 유시민의 당이 합당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하면 조직이 드러나고 이정희가 가장 먼저 피해자가 된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한 이야기였다. 이 말을 하고 후회했다. 방송을 닫아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다음해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 외에도 그런 일은 많았다. 지난 총선 때는 문재인 대표가 호남 방문을 결정했을 때, 반대한다고 했다. 이 일로 분명 대선에 큰 걸림돌이 될 일을 만난다고 이야기했다.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런데 호남에 가서 대표 사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총선에서 호남은 졌고, 사퇴해야 했다. 

새누리가 이기고, 더민주가 질 것이라고 할 때도 반대로 이야기했다. 이긴다고 했고, 더민주가 일당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소야대까지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하고 하늘을 보며, 하나님에게 따졌다. 방송 중에 하나님 이야기를 가끔하게 된다. 그래서 시청자들도 비판하기도 한다. 망치부인은 잘 나가다 꼭 이상한 이야기한다고 말이다. 하나님이 정치적 예측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게 정말 아니다. 정말 당황스럽다.”

망치부인은 가끔 방송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기도 해 예언하듯 여러 이야기를 하게 된다고 했다. 더불어 중간중간 하나님과 기독교적 이야기를 해서 청취자들이 불평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한국교회, 개혁 필요하다

망치부인은 한국교회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특히 금권 중심, 목사 중심으로 변한 교회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했다. 특히 한국 교인들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발언을 볼 때 더욱 안타깝다고 말했다. 

“교회 권사님 장로님을 중심으로 카톡으로 이상한 문제를 자주 돌린다. 독재 시절을 당연히 여기듯 말하며, 하나님도 독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을 인정하라고 한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나온다’고 명시했다. 이는 순종해야 할 권력이 민의에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민주주의자는 하나님을 부정한다. 아이들에게 사회를 가르치던 시절, 민주주의는 천부인권 사상에서 시작된 자유와 평등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천부인권은 하나님을 존재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있어서 모두가 존엄하다. 하나님이 없으니 형식과 제도, 투쟁만 남았다. 

망치부인이 집회한다는 소식을 교회에서는 주변에 알리지 않았지만,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았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90년대부터 십자가 보다 헌금이 한국교회 중심이 된 것 같다. 이후, 한국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교회마저 탐욕을 따르는 모습을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을 뽑을 때,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이명박 전과 14범이라고 폭로했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이명박 장로를 뽑았다. 아파트 값 지켜줄 거라고 말이다. 그렇지 못했다. 이후, 박근혜 찍었다. 아버지처럼 경제 살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다. 심지어 경제 위기 이야기가 크게 나온다. 무서운 전쟁 무기로 중국, 러시아 압박도 심해졌다. 

많은 사람이 이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사야 말씀을 통해 읽게 하셨다.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실체를 보게했고, 박정희 신화도 무너질 것이다. 미국에서 할 말이 있다고 보내주셨다. 미국으로 초대해 준 장로께서 영어로 통역까지 해준다. 다음 월요일 유엔 본부 앞에 가서 세계 평화를 이야기할 것이고, 금요일에는 백악관 앞에서 가서 이야기할 것이다.”

망치부인의 간증 후, 조원태 목사는 예언자적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망치부인의 간증을 마치자 조원태 목사는 감사 인사와 함께 짧은 논평을 했다. 

“교회로써도 상당히 이례적인 시도였다. 예언자적 정신을 가진 이가 드문 시대다. 우리는 말하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사건이 일어나고, 사람이 모이게 하느냐에 집중하는 시대에 산다.성직자로 불리는 이들이 시대의 변조된 면죄부를 판매해 교회 권력을 쌓으려고 한다. 저도 못지않게 그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물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언자는 자기가 한 말이 어떻게 이루어지거나 결과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청중이 듣느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떤 말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예언자적 정신을 가진 사람이 서기 어렵다. 이 정신이 이 자리에 앉은 모두에게 풍요한 말로 영혼의 곳간에 쌓이기를 바란다.”

'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을 함께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망치부인. 그는 가난한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하나님나라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발로로 보편적 복지 국가가 되기를 소망했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조선협객 2016-10-15 10:03:58
ㅎㅎ 이런 훌륭한 분과 또 기사가 있다니!!! 정치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신앙적 양심으로 김대중 선생에게 우리 기독인들은 사죄해야한다고 믿어서 잠시 도운 일이 있었는데... 광주의거 1주년 사진전을 워싱톤 디씨에서 할때 가서 뵌적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운 곳에 이런 훌륭한 한인 교회가 있었다니... 한국민주주의에 큰 기여를 한 교회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그 이름을 빛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모닝커피 2016-10-05 22:52:25
망치부인이 첫번째 간증한 일이 무슨 뉴스꺼리가 되나요?
ㅋㅋ 뉴스가 그리 없는가 보네

모닝커피 2016-10-05 22:51:44
망치부인이 첫번째 간증한 일이 무슨 뉴스꺼리가 되나요?
ㅋㅋ 뉴스가 그리 없는가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