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나를 블랙리스트에 넣어 다오 !”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나를 블랙리스트에 넣어 다오 !”
  • 지유석
  • 승인 2016.10.17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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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론] ‘블랙리스트’ 나도는 2016년 대한민국, 좌표를 묻다

위험한 지식이 담긴 책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리라고 

이 정권이 명령하여, 곳곳에서
황소들이 끙끙대며 책이 실린 수레를
화형장으로 끌고 왔을 때, 가장 뛰어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추방된 어떤 시인이 분서목록을 들여다 보다가 
자기의 책들이 누락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화가 나서 나는 듯이
책상으로 달려가, 집권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 그는 신속한 필치로 써내려갔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 ! 
그렇게 해다오 ! 나의 책을 남겨 놓지 말아 다오 ! 
나의 책들 속에서 언제나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너희들이 나를 거짓말쟁이처럼 취급한단 말이냐 !

나는 너희들에게 명령한다.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

위에 적은 시는 희곡 <코카서스의 백묵원>으로 잘 알려진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가 1938년 쓴 시 ‘분서’(원제 : Die Bücherverbrennung)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저항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9400; Independent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브레히트의 생애와 문학세계, 그리고 당시의 정치상황을 되돌아 봐야 한다. 1933년 ‘나치’라는 약어로 익숙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권력 장악에 성공한다. 이후 독일엔 국가주의의 광풍이 몰아닥쳤다. 이 광풍은 문학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문화 공보성 장관 괴벨스는 금서목록을 작성한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작가 토마스 만, 체코 출신 프란츠 카프카 등 유대인 저자의 책과 반나치 정서를 부추길 ‘우려’가 있는 책들이 대거 포함됐다. 단, 하인리히 하이네의 ‘로렐라이’는 수많은 독일인들이 애창하고 있어 끝내 금지시키지는 못했다. 

괴벨스는 목록 작성에 그치지 않고, 1933년 5월10일 베를린 포츠담 광장을 비롯, 모든 대학도시에서 금서에 오른 책을 불태웠다. 훗날 유대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1989년 작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십자군>에서 이 장면을 끼워 넣어 나치를 비꼰다. 

한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일찍부터 시를 사회참여를 독려하는 수단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정보를 제공하고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나치가 그의 작품을 순순이 읽히게 할 이유는 없었다.  결국 그의 시 역시 불에 타는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나치의 마수를 피해 망명길에 오른다. 프라하, 빈, 취리히를 거쳐 정착한 곳은 덴마크의 스벤보르. 위의 시 ‘분서’는 브레히트가 덴마크 망명 기간 중 쓴 시로, 인간의 머릿속마저 통제하려는 파시즘에 맞서 작가의 자의식을 지키려는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문화·예술인들은 궁핍한 시대의 영혼 

문인, 그리고 지식인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고통을 짊어지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못된 권력일수록 문인·지식인을 강도 높게 탄압했다. 

브레히트보다 앞선 세기를 산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는 특유의 모순과 독설로 봉건적 귀족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독일을 질타하는 한편, 브루조아 시민혁명을 고취했다. 이로 인해 하이네는 당국의 감시를 피해 프랑스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독일 당국은 망명 중인 하이네의 작품에 대해 출판금지 명령을 내리는 한편, 그의 작품활동도 금지시켰다. 그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앞서 적었듯 나치 역시 그의 작품을 금서목록에 올리고 불태웠다. 하이네는 이런 앞날을 내다보기라도 한 듯 이렇게 적었다.

“책을 불사르는 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다. 결국 인간을 불태우게 된다.”

하이네는 서정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련의 저항시로 시민혁명의 기운을 고취해 독일 당국으로부터 판금조치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9400; Google Image

2016년 10월 대한민국에서는 블랙리스트란 괴문서가 떠돌아다닌다. 그동안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소문으로만 전해졌다. 그러던 것이 시인인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이 지난 10일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지원하지 않기로 한 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며 9,473명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세월호 시행령 폐기선언 문화예술인 594인, 문재인 후보지지 선언 6517인, 박원순 후보지지 선언 1608인 등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 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싹수가 노랬다. 지난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후 선관위는 문인 137명을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해당 사건을 공안1부에 배당했다. 이들 문인들이 “우리 젊은 시인과 소설가들은 조금이라도 삶의 고통이 덜어질 수 있는 세상, 그래서 조금이라도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을 바란다. 그 출발이 정권교체에 있음을 절실히 공감한다”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냈다는 게 이유였다. 

문인의 일이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유유자적하게 글이나(?) 쓰는 게 아니다. 문인, 예술인, 지식인 등은 붓을 무기 삼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적 과제를 온 몸으로 짊어져야 하는 존재들이다. 이런 이유로 현 대통령이나 정부 여당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해서, 혹은 세월호 참사처럼 정권이 불편해 하는 쟁점에 기울어져 있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지목돼 관리 받고 공론의 장에서 공공연히 배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보다 현 정부가 파시즘 치하에서나 행할 법한 블랙리스트를 기획한 일 자체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허무는 심각한 범죄 행위다. 

차라리 고맙다. 제 구실을 못하는 문인, 지식인, 예술인이 누구인지 판가름할 기준을 정부 스스로 마련해 줬으니 말이다. 문화 예술계에 있으면서 만약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지 않는다면 브레히트의 시 ‘분서’에 등장하는 시인처럼 어서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달라고 조르고 떼쓰라. 그렇지 않으면 이 되먹지 못한 정부에 빌붙어, 현실을 외면한 채 달달한 말만 뱉어낸 비겁자로 기억할 것이니 말이다. 

문인은 궁핍한 시대의 영혼이다. 불의한 권력에 눈 감은 문인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그러니 혹시라도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으면 어서 블랙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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