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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한대수의 인생과 노래 그리고 세 번째 뉴욕[인터뷰] 한국의 '밥 딜런', 자본주의와 현실 음악으로 말하련다
한국의 ‘밥 딜런’. 40년 넘게 노래하며 한국 포크록의 대부로 지낸 한대수를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곤 한다. 그의 가사는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시였고, 함께 ‘행복의 나라로’ 나아가게 하는 노래였다. 그렇게 한국 저항 음악의 상징으로 불렸던 한대수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환갑이 다 되어 얻은 9살 딸 양호의 교육을 위해서 말이다. 딸을 지극히 위하는 아빠, 한국의 ‘밥 딜런’ 한대수를 <뉴스 M>이 만나 보았다. -기자 말

[뉴스 M = 유영 기자] 이제는 많은 이에게 알려진 이야기가 되었지만, 한대수의 삶은 음악만큼 강렬하고 기구했다. 그가 뉴욕에 세 번 정착해야 했던 것도 기구한 삶 때문이다. 한대수가 처음으로 뉴욕에 온 건 10대 중반 시절이었다. 실종되었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뉴욕에 왔던 10대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한대수가 태어나고 얼마 후, 그의 아버지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어린 아들과 아내를 두고 떠난 유학길이었다. 연세대 신학대학원 원장이었던 할아버지가 일본이 핵에 망하는 것을 보고, 한국도 핵을 가져야 다시 나라를 뺏기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 아버지에게 핵물리학 공부를 강권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대수가 7살 되던 해에 실종된다. 

얼마 후, 그의 어머니마저 그의 곁을 떠난다. 젊은 나이였던 어머니를 그냥 볼 수 없었던 할아버지가 재가를 허락했다. 어린 한대수는 그렇게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 신세가 되었다. 그를 보살피고 사랑해 주었던 조부모에게 엄마, 아빠라고 부르고 싶다고 조를 정도로 부모의 사랑에 굶주렸다. 한대수는 이 시기를 ‘외로움’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부모가 모두 떠나 고아 아닌 고아가 된 한대수는 이 시기를 ‘외로움’으로 기억한다. ⓒ<뉴스 M> 경소영 기자

외로움은 10대에 더 심해진다. 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러 미국으로 건너간 시기였다. 아버지는 미국인 여성과 결혼한 상황이었고, 둘 사이에는 9명의 자녀가 있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그가 2층 방 침실에서 내려오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 역시 내려가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새어머니와 배다른 형제와만 어색하고 힘든 게 아니었다. 사업으로 바쁜 아버지를 거의 만나지 못해 관계는 어색했고, 외로움에 힘겨웠다. 그는 그 시기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이상한 게 한둘이 아녔어. 핵물리학자가 되겠다고 코넬대학교로 진학한 아버지가 출판업에 종사하는 것은 물론 우리말을 잊은 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 게다가 아버지는 이상하리만큼 우리말을 기억하지 못했어. 20대에 미국으로 넘어온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영어 발음이 완벽했어. 흔히 말하는 제스처도 너무 미국인 같은 거야. 

그런 아버지와 아무런 것도 함께하지 못했어.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게 있었거든. 아버지를 만나면 무엇을 한다는 생각 말이야. 같이 밥을 먹는다든지, 볼에 뽀뽀한다든지, 영화를 보러 간다든지. 그런데 정말 하나도 해보지 못했어. 아버지는 너무 바쁜 사람이었거든.

뉴욕 지역에서 활동하는 출판업의 중요한 사업가였어. 맨해튼에 전경련 같은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활동하는 사람만 출입하는 사교 클럽이 있었어. 아버지는 그곳에 매일 나가서 다른 사업가들과 만나서 식사하고 들어오는 거야. 정말 얼굴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바빴지.” 

뉴욕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던 한대수의 모습

그의 외로움과 방황은 뉴욕 어디에서도 해결할 수 없었다. 친구 사귀기도 어려웠던 탓이다. 당시 롱아일랜드에서 다니던 학교에는 한대수와 중국 학생 두 명을 제외하면 소수민족이 없었다. 1960년대 미국은 유색인종과 백인이 어울리기 쉽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10대의 한대수를 위로한 건 ‘시’와 ‘노래’였다. 그는 아버지 집 2층 방에 틀어박혀 매일 노래를 만들고, 시를 썼다. 한대수의 대표곡 ‘행복의 나라’, ‘그날까지’ 등은 이 시기 작사, 작곡한 노래였다. 

한국으로 돌아오다

할아버지의 권유로 한대수는 뉴햄프셔대학 수의학과에 진학한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과목이었다. 농장을 소유한 할아버지가 “수의학을 마쳐야 농장을 물려주겠다”며, 입학을 강제해 별수 없이 입학했다. 하지만 전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해부학을 공부하는데, 도저히 수업에 참여할 수 없었다. 결국 이 과정을 모두 포기한다. 미래에 받을 유산보다, 지금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일이 하고 싶었다. 

뉴욕으로 돌아와 사진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실제 아버지 역할을 했던 할아버지는 사진은 공부가 아니라며, 다른 학문을 공부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에서 유학 비용을 끊는 강수까지 두었다. 하지만 한대수는 사진이 좋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맨해튼에서 가장 집값이 저렴했던 이스트 빌리지로 집을 옮기고, 돈을 벌어가며 공부했다. 당시 이스트 빌리지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마약상들도 많았고, 쿠바 혁명가들도 거주했다. 거기에 빈민가였다. “쥐와 함께 살았다”고 기억할 정도로 위생도 좋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진 일로 먹고살던 한대수를 다시 한국으로 불러들인 건 어머니였다. 뉴욕에 사업차 방문한 외삼촌이 그를 찾았고, 사는 환경을 보고 경악했다. 한국으로 돌아간 외삼촌은 어머니에게 “누님, 저렇게 살다가 대수 죽어요”라고 했다. 어머니는 즉시 그에게 돌아오라고 권유했다. 

한국에서 가수로 데뷔했을 당시 한대수.

일과 관계 등 모든 것을 뉴욕에 두고 온 그에게 한국 역시 외로운 곳이었다. 그는 뉴욕에서 사진 일을 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쎄시봉’이었다. 당시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등은 팝송을 번안해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뉴욕에서 온 그는 유독 순수 우리말 자작곡을 불렀다. 거기에 ‘히피’ 스타일인 그는 단번에 주목받는다. 

“하루 만에 TV에 데뷔했어. 전국에서 다 봤어. 하모니카 들고 머리 긴 남자가 나와 노래를 하니까 주목을 받았지. 그러다가 이름이 알려지고 인기가 오르니까, 정부에서 검열하기 시작했어. 가사 분석하니, 히피스럽고 퇴폐적이다, 막 그러는 거지.  

당시에는 5개년 경제 계획을 진행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 오니까 불편한 거야. 히피 정신, 마약, 프리섹스 막 가져다 붙이고 그런 거지. 결국 정부에서 단속했어. 음반도 다 압수당하고 힘들었지. 나만 그런 건 아니었지. 신중현 씨, 김민기 씨, 글 잘 쓰는 그분들도 다 검열에 몰수에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 훌륭한 가수, 작곡가들인데 묶인 거지.” 

다시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음악으로

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한대수는 첫 아내와 뉴욕으로 건너온다. 두 번째 뉴욕 정착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아내는 유명 백화점 쇼윈도 디스플레이 설치하는 디자이너로 일한다. 그는 광고 사진 등 사진 일과 함께 밴드를 조직한다. 밴드를 시작한 건 아내의 권유였다. “한국에서 못한다고 하니, 어쩌면 미국에서 세계적으로 활동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며, 그를 응원하고 지원했다. 

하지만 밴드는 2년 만에 해체한다. 그동안 번 돈을 모두 쏟았지만, 정식 음반 계약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음악은 접어야겠다 생각했다. 실제로 이후로 기타를 잡지 않았다. 그리고 1988년, 20년간 함께 산 첫 아내와 이혼한다. 이후 같은 아파트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1992년 결혼한다. 어쩌면 그렇게 그의 음악은 멈추고, 영영 끝날지도 몰랐다. 

22살 연하의 아내 옥산나와 환갑이 다 되어 얻은 딸 양호. ⓒ<뉴스 M> 경소영 기자

그가 다시 음악을 하게 된 일은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일어났다. 1997년, 일본 록스타 카르멘 마키가 후쿠오카 공연에 초대했다. 초대받은 당시 한대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초대에 응했다. 다시 음악을 할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20년 만의 일이었다. 

“내가 기타를 놓은 지 20년은 된 것 같다고 했어. 기타 줄도 다 녹슬었다고 말이지. 그런데 카르멘 마키는 ‘꼭 한대수가 와야 한다’고 하는 거야. 고맙기도 하고, 정말 좋더라고. 그래서 한국에서 당시 최고 세션이 누구인지 수소문했지. 그래서 김도균, 이장우 등이 꼽혔지. 그래서 이들을 모아서 연습실 대여료가 뉴욕 절반도 안 되는 캐나다로 건너갔어. 초대한 사람들이 10개월 먼저 연락해 주어서 가능했지.” 

그렇게 그의 음악은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다시 활동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일본 공연을 하고 나니, 한국 방송사에서 계속 연락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잊힌 그의 음악이 대중 속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정착해서 지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아내의 알코올 중독 증상이 심해졌다. 물론 치료를 받아 나아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다시 알코올 중독 증상이 나타났다. 중독과 치료가 반복되는 어려운 기간이었다. 그러다 지난 2007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갑자기 아빠가 되었다. 딸 양호가 태어난 것이다. 

9살 딸 양호와 지내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말하는 한대수. ⓒ<뉴스 M> 경소영 기자

현재 한대수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3번째 뉴욕이다. 라디오 DJ로 활동하고, 음반을 내고, 책도 쓰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바로 딸 양호 때문이다. 한국의 살인적인 교육 체계에 아이를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조금 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을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러게 뉴욕으로 돌아온 게 3개월 전이다. 

“아직 짐 풀고 있지 뭐. 이것도 많이 푼 거야. 너무 힘들어. (웃음)”

세 번째 뉴욕 정착을 시작한 한대수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그가 한국의 밥 딜런이라는 평가도 받았는데,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과연 그가 생각하는 노랫말, 음악, 남은 목표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선배 예술가로서 한국 대중문화, 음악 발전을 보면서 감회가 드는지?

68년 데뷔했을 때보다 한국의 대중문화, 음악이 많이 발전했어. 하지만 아직 똑같은 문제가 있어. 음악가들이 4, 50년씩 노력해도 대박 난 한두 명 빼고 생활이 안 되니. 그래서 다 음식점 차리고, 다른 데 눈 돌리는 거야. 음악가들은 그러면 안 되잖아. 그게 음악 발전의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해. 순두부 가게를 해도 그게 쉬운가. 얼마나 어려워. 

변화가 없어. 이유가 뭔가 하면, 음악 듣는 인구가 너무 없어서 그래. 앨범 내면 안 팔려. 그게 음악 발전의 방해라고 생각해. 시장이 없는 거지. 근데 그에 비해 일본은 히트 한 곡으로 살 수 있어. 일본만 하더라도 1억4000만 인구에 락 듣는 사람이 많아. 비틀스가 아시아에서 한 공연도 도쿄가 유일할 정도야. 부러워.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노랫말도 문학으로 인정받았다.

밥 딜런은 락계의 모든 후배 가수들한테 많은 영향을 주었지. 락 음악에 그런 가사를 쓴 사람이 없었거든. 그의 노래는 그야말로 시야. 심지어 비틀스도 밥 딜런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 비틀스가 그를 만나고 가사가 더 시적으로 철학적으로 변했거든. 나도 많은 영향을 받았어. 

근데 한편으로는 문학계에서는 많은 불만이 있을 것이라고 봐. 노벨문학상은 최고의 문학상 아닌가. T.S.엘리엇 등 문학 거장들이 받는 상을 록스타가 받은 거잖아. 사실 밥 딜런은 이미 그래미도 탔고, 오바마 대통령이 주는 상도 타는 등 음악계에서 주는 상도 충분히 받았어. 그래서 ‘굳이 문학상까지’ 이런 생각이 들어.

여행과 음악 관련 서적이 꼽힌 그의 책장. ⓒ<뉴스 M> 경소영 기자

최근 음악의 노랫말은 어떻게 평가하나.

요새 노랫말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랩 음악이 아닐까. 물론 기본적으로 유치한 것이 대부분인 것 같고, 정리도 안 되고 분노만 내뱉는 것 같아. 밥 딜런 같이 화가 나도 잘 내재화하고, 시적으로 잘 정리하지는 못하지만 들어보면 랩은 그게 문화인 게지.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이 시대와 체제에 저항하는 내용도 담겼고 말이야. 잘 발전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뉴욕 정착은 잘 되고 있나.

너무 힘들어. 맨해튼도 아닌데, 방값이 2000달러가 넘어. 12년 전보다 세배 이상 오른 것 같아. 너무 심하게 올랐어. 뉴요커들 너무 고생해. 봉급은 비슷한데 말이야. 상위 1%의 돈에 욕심이 심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실제 뉴욕에 사는 이들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어. ‘모든 뉴요커, 존경합니다.’ 너무너무 어려운 도시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거야. 아파트 방 하나 구하는데도 한 달 걸렸어. 서류 보내고, 통장 보여주어야 해. 테러리스트 문제로 돈이 어디에서 오냐, 확인하는 게 중요하니까. 

맨해튼 나가면 옛날 뉴욕 생각나고 좋기는 해. 그래도 지하철 타면 너무 우울한 사람들이 많이 보여. 다들 이번 달 방값 어떻게 하나 고민한다고 해. 거기에 이민자라면 비자 고민, 영주권 고민까지 하잖아. 모두 그러한 고민으로 힘겹게 하루하루 보내는 것 같아.

하지만 자녀교육은 200% 만족해. 상당히 자유롭고. 숙제는 주는데 심하게 주진 않아. 여유가 있어.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는 것도 너무 좋아.

언디서도 유쾌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한대수. 그는 뉴욕에서 어렵고 우울하게 지내는 많은 사람을 보며,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악을 생각한다. 그런 상황도 음악으로 이야기해 풀어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뉴스 M> 경소영 기자

아이를 낳고 자본주의를 알았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의미인가.

아내랑 둘이 사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아. 근데 아이를 낳고 보니, 돈이 보이더라고. 미국에서는 대부분 수술해서 낳아. 그것부터 엄청난 돈이지. 2만 달러 정도 하거든.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지. 거기에 아이를 키우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돈이 있잖아. 그래서 음악만 가지곤 안 되겠다. 직장 생활을 이래서 하는구나 생각했어. 

그러다 고맙게도 일할 기회를 얻었어. <아리랑TV>에서 DJ를 했지. 매일 출근했어. 하루도 빠지면 안 됐어. 그걸 5년 동안 했어. <CBS>에서 아침프로도 7년 했고. 그 두 방송국 덕분에 양호를 잘 키웠지. 고정수입 없이 공연 수입과 음반으로는 절대 못 키우는 거지.

뉴욕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나?

아직 짐 풀고 있어. 여전히 20박스는 남은 것 같지만, 이것도 많이 한 거야. 그리고 아이 학교 다녀오면 함께 숙제해. 아직 영어가 능숙하지 못하니까 도움이 많이 필요해. 그리고 내가 요리해서 아내랑 아이 먹여야 해서 바빠. 우리 아내는 결혼 첫날 ‘사실 음식을 할 줄 모른다’고 했어. 내가 잘하니 걱정 말라고 했거든. 그렇게 지금까지 지내고 있어. 

여전히 해결 안 된 게 많아. 전기랑 인터넷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어. 워낙 월세가 비싼 동네라 수입이 있어야 해. 작든 크든. 불리한 건 내가 너무 나이가 들었어. 한인 방송 같은 곳에서 라디오 DJ를 하고 싶어. 교포들과 소통하고, 문화 정보도 나누고, 좋은 음악도 틀고 싶어. 음악도 계속하고 싶어. 내년에 칠순인데, 기념해서 콘서트를 미주에서 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 한국에 있는 좋은 음악가들 불러서 말이지.

지난 2015년 발매한 한대수의 14집 앨범. 지난해 12월에는 데뷔 47주년 기념 콘서트를 LG 아트센터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공연에 기대감이 큰 것 같다. 어떻게 진행할 예정인가. 

전인권, 강산에, 호란. 신대철, 김도균 같은 한국의 대가들과 함께하면 어떨까 생각해. 뉴욕 맨해튼에 있는 수준 높은 공연장에서 하고 싶어. 교포들이 80% 오면, 20%는 뉴요커들이 오길 바라. <뉴욕타임스> 등 지역 신문에도 다뤄지도록 한인 음악인들의 축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해.

음악도 계속 만들어 가려고 해. 현실에 대해 말해보고 싶어. 화폐 지폐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번에 뉴욕에 다시 돌아와서 너무 충격을 받았어. 임대료가 해도 너무해. 사람들이 임대료 때문에 죽어 나가. 이러한 충격과 경험을 담아 자본주의와 현실적인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 하고 싶어.

유영  young2@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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