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물결의 선언, '나/우리는 인간이다!'
촛불 물결의 선언, '나/우리는 인간이다!'
  • 강남순
  • 승인 2016.11.09 0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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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은 강남순 교수의 페이스북에 있는 글입니다. 강남순 교수 허락을 받고 글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지난 11월 5일, 촛불의 물결이 광화문과 한국 곳곳을 가득 채웠다. 그 촛불들이 담고 있는 절절한 메시지, 그것은 '나/우리는 인간이다'라는 선언이다. 그 촛불의 물결은 국가/제도들이 나/우리의 인간됨을 다층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물결이며 선언인 것이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누구이든 또는 어떠한 이유에서이든, 촛불을 드는 순간, 한 개별인들은 그리고 그 개별인들이 모인 집단은 '나/우리는 인간이다'라는 당당한 선언을 하는 것이다.

지난 11월 5일 20만(주최 측 추산)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을 향해 모였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촛불을 들고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사진/ YGSU캡쳐)

그런데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복잡한 것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생존적 조건을 충족하는 '밥' 만으로 그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어찌보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한 끊임없는 번민과 투쟁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인간됨의 의미는 언제나 ‘자유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인가. 많은 영화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 잘 곳이 마련되어 있어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그리는 그 영화들 속에서 아마 자신이 느끼는 감옥으로부터 자유를 향한 탈출을 시도하는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인간됨의 자유로부터 막고 있는가.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오래전에 본 적이 있다. 은행원이었던 주인공 앤디(Andy Dufresne)는 어느 날 방송으로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름다운 듀엣의 아리아를 크게 튼다. 온 감옥에 돌연히 그 아리아가 가득 차는 그 순간의 그 이미지가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사방 철망과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감옥에 살면서도, 자신들의 자유가 어떻게 제한되고 있는가를 망각하며 그 감옥생활에 길들여져 매일 매일 지내던 사람들, 자신들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며 쳇바퀴 도는 감옥에서의 삶을 그런대로 만족스럽게 살던 사람들이, 뜻밖에 한 없이 높고 길게 그리고 너무나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듀엣의 아리아를 듣는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불현듯 깨닫는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 감옥 안에서 주어진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아리아를 듣는 순간, 모두 일손을 멈추고 아리아에 귀기울이고 있다.

감옥의 이곳 저곳에서 큰 불평없이 잡담을 나누며 주어진 일들을 하고 있던 그들이, 그 일상의 궤도에 균열을 내며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그 아리아를 듣는 순간 모두가 일손을 멈추고 숨을 죽이고, 그 아리아에 귀기울인다. 그 돌연한 침묵의 순간은 감옥에서도 큰 문제없이 만족하며 살아가던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사실상 '한없는 허구적 삶'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자신들의 삶이 사방 벽으로 둘려 쌓인 지독한 '부자유의 삶'이라는 것을 마주보게 하는 순간이 된다. 자신들이 상실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였던 그 자유의 삶, 인간으로서의 자유함의 삶, 그 자유가 무엇인가를 흘깃 보게 되는 놀라운 '순간의 경험(glimpse experience)'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일손을 놓고 아리아를 향해 온통 집중하는 그 사람들의 눈에는 자유에의 갈망이 절절히 담겨 있다. 벽을 넘어서서 자유롭게 울려 퍼지는 아리아를 들으며 사람들은 비로소 그 감옥 너머의 자유에 대한 목마름을 돌연히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에의 갈망을 지닌 사람들의 순전한 모습은 어디에서든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그 장면에서 느꼈다. 주인공과 가깝게 지내던 친구 레드(Ellis Boyd ‘Red’ Redding)는 이런 말을 한다.

“이 감옥에 사방 있는 벽들은 우습단 말야. 처음에는 그 벽들이 증오스럽지. 그런데 그 다음에는 조금씩 익숙해져.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오히려 그 벽들에 기대어 살게 된다는 거야. 그것이 제도화 (institutionalized) 된다는 거지...”

우리 삶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감옥들’이 있다. 그 감옥이 상징하는 그 제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듯 당연하게 그 제도들을 받아들이며, 대부분의 우리는 매일 매일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감옥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듀엣의 아리아처럼 우리 일상의 공간을 넘어서게 하는 그 무엇을 만났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인간됨을 가로막고 있는가를 불현듯 보게 된다.

‘감옥성‘이란, 그 제도들이 주는 표면적 편안함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나마 그런 것들이라도 없다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지도 모른다며 안심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그것이 사적이든 공적공간이든- 특정한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이기적 욕심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경우에 언제나 그 핵심적 특성으로 자리잡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들은 인간의 다양한 살아있음의 표현들, 인간됨의 양식들을 정형화된 틀 속에 넣어버린다.

마치 감옥의 벽들이 처음에는 증오스럽지만, 점점 조금씩 익숙해지게 되고, 시간이 한참 지나면 오히려 그 증오했던 벽들에 기대어 살게 된다는 감옥에서의 삶으로부터 단호히 자유를 찾아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영화속에 등장하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에는 이러한 제도들의 감옥성에 대하여 저항하며, 인간됨의 자유를 갈망하던 이들이 끊임없이 출현하곤 하였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다양한 벽들에 오히려 점점 편안함을 느끼며 그 벽에 기대어 사는 삶에 길들여지는 우리에게, 우리가 상실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연히, 정말 돌연히 깨닫게 해주는 그 아름다운 자유의 노래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러한 자유의 노래는 인간됨의 삶을 향한 절절한 갈망을 지닌 사람에게만 비로소 들리는 노래라는 것이다. '나/우리는 인간이다'라는 선언은, 이 자유의 노래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이며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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