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 뉴욕과 서울에서 자유의 상징이 되다
'포스트잇', 뉴욕과 서울에서 자유의 상징이 되다
  • 유영
  • 승인 2016.11.26 0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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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뉴욕) = 유영 기자] ’포스트잇’. 메모하기 위해 가장 널리 쓰이는 제품이다. 학교와 사무실 등 메모가 필요한 곳에서 많이 사용한다. 사람들은 이 제품을 주로 기억하기 위해, 짧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용한다.

우리 신문사도 문구류 중 ‘포스트잇’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동료 기자는 취재하는 사안과 인터뷰할 인물, 다른 업무 등을 가득 적어 모니터 옆에 붙여둔다. 심지어 인터넷으로 알게 된 새로운 정보와 기획 거리도 적어 둔다. 많은 직장인이 이러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6년은 ‘포스트잇’에게도 특별한 해인 것 같다. 개인 업무를 넘어 우리 사회가 강하게 반성하고, 안타까웠던 일들을 담은 기록지로 쓰였으니 말이다.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오났다. 

먼저, 한국에서는 모든 사람을 경악하게 한 ‘여대생 살인 사건’ 피해자 추모에 쓰였다. 지난 5월 강남역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가 드러났다. 대다수 남성과 소수 여성이 ‘조현병’ 환자의 일탈로 규정했지만, “여성만 노렸다”고 한 범인의 말은 혐오범죄를 추론하기 충분했다.

한국 사회는 들끓었다. 특히 여성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여 혐오범죄를 멈춰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말은 포스트잇에 이렇게 남겨졌다.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절대 이 죽음이 억울하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잠재적 가해자라서 듣기 싫은가요. 나는 ‘잠재적 피해자’라서 무섭습니다.” 

인터넷이 발전하고 해시태그 문화가 유행하기에, 사람들이 현장에 나와 직접 기록한 메모는 다른 의미가 있다. 집회나 시위처럼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성들은 혐오 범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증언했다. 이 증언을 담은 포스트잇은 소수자를 향한 폭력을 기억하는 기록으로 남았다.

같은 5월, 포스트잇은 다시 추모의 도구가 되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중 열차에 끼어 숨진 정비용역업체 노동자 김 모 씨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스크린도어 수리 중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는 처음이 아니었다. 2013년, 2015년에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망한 노동자가 20살도 안 된 10대였던 까닭이다.

그는 가난해도 사회 일원이 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꿈이 있었다. 하청 업체였던 회사가 서울메트로 자회사가 된다는 이야기가 오갔고, 고용승계가 이뤄질 수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럼 공기업 정규직 직원이 될 기회를 얻는다. 

이 꿈을 이루기에 사회는 너무 가혹했다. 사람보다는 돈을 아끼는 게 늘 앞선다. 하청 업체, 싸게 용역을 주어 이뤄진 업무에서 가장 먼저 빠진 ‘개념’은 바로 ‘안전’이다.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인원이 안전도 돌보지 못한 채 일해야 했다. 몇 번이나 같은 일이 일어났지만, 이를 막는 제도와 인력은 보강되지 못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포스트잇을 붙였다. 이번에는 피어보지도 못한 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하며, 우리 사회의 아픈 단면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회가 변화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짧은 글에 담았다. 

이러한 현상은 ‘공감’에서 나타난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에 공감한다. 그리고 함께 분노한다. 없어야 했을 혐오와 죽음, 이를 방치한 허망함이 포스트잇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됐다.

이는 우리가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포스트잇은 이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11월, 미국은 대선 결과로 혼란스럽다. 많은 시민이 시쳇말로 ‘멘붕’을 경험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미국 사회가 부정했던 소수자 차별을 강하게 내재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특히, 백인들을 중심으로 한 인종차별과 여성혐오가 여전하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많은 인종이 혼재한 뉴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백인 여성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더 많이 투표했지만, 남성들은 트럼프를 찍었다. 유색인종은 미국 전체 주에서 힐러리를 더 지지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백인들은 10여 개 주를 제외한 40여 개 주에서 트럼프를 더 많이 지지했다. 

선거 결과의 문제는 바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웃 관계에서부터 조금씩 말이다. 한 한인은 최근 이러한 글을 SNS에 올렸다. 

“이전에는 조깅하면서 흑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가기 무서웠는데, 이제는 백인들 사이를 지나가기가 두렵다.” 

물론 모든 백인이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든 흑인이 범죄자라는 건 아니지만,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건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유색인종 혐오를 표현해 왔다. 이제 ‘모든 백인이 그렇지 않지만, 백인들이 모여 있으면 무섭다’는 말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이러한 뉴욕 사회에도 ‘포스트잇’은 사회적 약자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연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는 역 중 하나인 유니언 스퀘어 지하철역 환승구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인종혐오, 여성혐오를 안타깝게 여기는 많은 미국인이 연대하는 글을 남긴다. 

미국 유니언 스퀘어 지하철역 환승구에 붙은 포스트잇. 인종차별과 여성혐오, 소수자 혐오와 맞서나가자는 메시지가 가득 담겼다. ⓒ<뉴스 M> 경소영

이들은 이곳에 메모를 남기고, 대화하고, 안아주며, 위로한다. 한 백인 여성은 메모를 남긴 흑인 여성에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한다. 흑인 여성은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백인 여성을 안아준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이며, 위로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다. 

글에도 이러한 마음이 담겼다. 트럼프를 조롱하고 욕하는 문구부터, 혐오를 멈추고 사랑하자고 당부하는 말, 이웃을 믿을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프다는 한탄까지 다양한 마음이 담긴다. 소수자 차별과 살인을 멈추어야 한다고 적은 이들도 있다.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히스패닉 여성. ⓒ<뉴스 M> 경소영

미국의 대표적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저서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에서 이런 말은 했다. 

“한 국가의 합법성을 좌우하는 것은 ‘민족 자결의 원칙’이 아니다. 정의와 평화(샬롬)를 강조하며, 모든 시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 일부 시민과 민족을 위한 나라는 합법성이 없다.”

국가의 합법성은 모두를 위한 나라를 이뤄가는 것이다. 평화는 평등한 관계를 이루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점차 혐오를 부추기며, 일부를 위한 정치를 추구한다. 안타까운 건 이러한 움직임이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자본 세력에 반동한 결과라고 분석되는 현실이다. 내가 가난하고 힘들어진 이유를 약자 탓으로 돌린다는 의미다. 

혐오를 부추기는 일은 합법적 국가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합법적 국가를 이루기 위한 진정한 반동은 포스트잇을 통한 연대에서 드러난다. 이는 한국과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포스트잇'은 그저 상징에 불과하다. 시민들이 진정한 자유인으로 그들의 거리로 나서고 있다는 상징 말이다.

그렇게 연약한 종이에 감긴 기억은 우리가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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