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선의 새로운 출발
이지선의 새로운 출발
  • 김종희
  • 승인 2008.03.19 10:48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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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언제 만나도 늘 한결같은 사람, 그러면서도 만날 때마다 한 걸음 두 걸음 진보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변함없지만 동시에 그새 한 단계 껑충 진보해 있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기쁨을 주는 사람이 그리 흔하지 않다. 흔하지 않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책을 통해 만나는 한비야 씨는 그런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다.

먼저 그는 한결같다. 절망과 탄식밖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을 제 집 앞마당처럼 돌아다니는 한비야 씨에게는 ‘긍정 바이러스’라는 게 있는 것 같다고들 한다. 지금도 여전히 늘 빠르게 말하고 바쁘게 살고 있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웃고 지낸다. 내가 원하는 곳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살고, 그러다가 그곳에서 죽기를 희망하는 마음도 한결같다.

▲ 오지 탐험가에서 긴급 구호 활동가로 변신하더니, 앞으로는 흥건하게 젖은 마룻바닥을 걸레질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수도꼭지를 잠그는 일을 하겠다고, 또 다른 변신을 예언(?)한 한비야 씨.

그런데 그는 꾸준히 진보한다. 그가 써낸 책을 보고 그가 하는 말을 들을 때 그의 진보를 느낄 수 있다. 30대 중반에 외국계 홍보 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훌쩍 오지로 떠났다가 7년이 넘어서 돌아왔다. 그동안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돌았다. 그가 발로 쓴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유명세와 돈을 대가로 받았다.

진짜 보상은 유명세와 돈이 아니었다. 오지를 가기 전이랑 오지를 간 후의 그의 삶이 똑같을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 같은 범인(凡人)이야 잠시 혼란스러워하고 죄의식을 느끼다가 이내 현실에 적응해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한비야 씨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게 바로 보상이다. 오지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은 우리가 도시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다른 사람과의 다른 만남은 그로 하여금 다른 미래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4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긴급 구호 현장을 누비게 되었다.

걸레질로 해결되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 실린 ‘수도꼭지 잠그는’ 얘기가 가물가물 떠오른다. 그가 보기에 긴급 구호 활동은 물로 흥건하게 젖은 마룻바닥을 걸레로 훔치는 일이다. 아무리 훔치고 또 훔쳐도 마룻바닥은 계속 젖는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누군가가 수도꼭지를 열어놓은 것이 아닌가. 바닥을 걸레로 훔치는 일도 시급하지만, 수도꼭지를 잠그는 일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세계 곳곳의 참사 현장을 가보라. 꼭 한둘의 고약한 악동 같은 녀석이 여기 저기 수도꼭지를 열어놓아서 물이 콸콸 쏟아지도록 하고 있다.

이 대목을 읽고 “저런 사람이 정치를 하거나 유엔 사무총장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2006년 여름 문화평론가 김갑수 씨가 한비야 씨를 만나서 나눈 대화의 일부를 <한겨레> 칼럼에 옮긴 적이 있다.

“… 뜻밖의 말을 들었다. 앞으로 유엔 난민기구나 국제적십자사 같은 국제기구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국제기구에 대한 한비야의 관심은, 그러니까 통속한 입신출세와는 다른 맥락의 말이다. 그의 본뜻은 현장 경험자가 힘 있는 유력 국제기구에 좀 더 많이 개입해야겠다는 판단이었다. …”

오지 탐험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경험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 속에서 이뤄진 성찰이 그를 구호 활동이라는 공적인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거기서 그는 또 깨달았다. ‘아, 이제는 수도꼭지를 잠그는 일을 해야 하는구나.’ 한비야 씨는 이렇게 계속 진보하고 있었다.

재활상담에서 사회복지로 전공을 바꾼 까닭

작년 3월 이지선 씨를 워싱턴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까지 <지선아 사랑해> <오늘도 행복합니다>를 읽은 적도 없고 그의 간증을 들은 적도 없다. 물론 그는 나의 취향과는 전혀 무관하게 책과 간증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서 유명인물이 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그의 간증을 들으면서, 그동안 수없이 들어보았던 여러 ‘유명인물’들의 ‘닳고 닳은’ 그것과는 좀 다른 맛을 보았다.

간증 내용이야 어디 가겠는가. 청중만 달라질 뿐이지 내용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자가발전을 하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감동 모드를 주기 위해 약간 부풀렸는데, 그게 먹히니까 나중에는 커다란 뻥이 된다. 처음에는 뻥인 줄 뻔히 알면서도 얘기하던 본인도 나중에는 그게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어버린다. 그러면서 닳고 닳은 간증 장사꾼으로 전락하는 경우를 너무나 자주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지선 씨는 좀 달랐다. 간증하는 태도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똑같은 얘기를 수도 없이 했을 텐데, 마치 처음 고백하는 것처럼 얘기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연기를 잘 한다는 뜻이 아니다. 몇 시간 대화를 하면서 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모습도 그대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나서 보는 모습과 책으로 읽는 모습이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 이지선 씨는 보스턴대학교에서 재활상담 전공 석사 과정을 마치고, 올 9월부터는 학교를 옮겨 사회복지 전공 석사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
그로부터 꼭 1년이 지난 올 3월에 보스턴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보스턴대학에서 재활상담을 전공하고 있다. 올해 봄에 석사 과정이 끝나는데,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그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전공을 ‘사회복지’로 바꾸려 한다는 것이다. 이유를 물었는데, 대답이 조금 궁색했다. “재활상담에 대해 한국에서 아직 인식이 잘 안 되어 있다”느니 “진로가 잘 안 보인다”느니. 그 정도 이유를 들어서 전공을 바꿔 다시 공부한다는 것이 이해도 안 되었지만, 사실은 마땅치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다시 물었다.

그는 상담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학문적 깊이도 얇지만, 재활상담으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과 상담해서 그를 개인적으로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 구조, 제도, 이런 것들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활상담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사회복지로 전공을 바꿔서 올해 9월부터 석사 과정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학교도 거의 정해졌다.

“3년이나 공부했는데 막상 졸업할 때가 되니까, 내가 지금까지 뭘 했나 싶더라구요. 잘못 온 것 같기도 하고, 왜 처음부터 사회복지를 선택하지 않았는지 후회도 돼요. 물론 인간관계에 대해 좋은 훈련을 받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휠체어를 타는 친구를 도대체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할 수 있을까요. 하반신 마비가 된 사람에게 상담을 해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다음은 어떡하지요. 그는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를 원하는데, 그냥 계속 상담만 해주나요. 그가 공부하기를 원하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서 미국은 제도적으로 훨씬 발전했고,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느끼기도 했고, 내가 장애인으로 혜택을 받아 보니까 돈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고. 한국의 장애인 정책을 보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제도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애인 문제는 단지 장애인만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나 아이들, 가난한 계층과 같은 마이너리티의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정책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어요.”


그가 전공을 바꾸기로 한 이유를 들으면서 한비야 씨 생각이 났다. 한비야 씨가 걸레질을 하다가 수도꼭지를 고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대답이었다.

그저 개인의 신앙적 문제인 것 같은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따져보면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기독교인은 대통령 선거 때나 국회의원 선거 때 잘 찍어야 하고, 그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 표현이라고, 내가 공연히 열을 내서 얘기했다. 사회복지가 얼마나 정치적인 문제인지 아느냐고 이지선 씨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노무현 정부의 복지 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복지 정책이 같을 수가 있겠냐고도 했다. 살아온 삶의 가치와 철학이 판이하게 다른데 복지 정책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다고 또 흥분해서 말했다.

<지선아 사랑해>를 넘어서야

그는 2003년 ‘희망의 천사’로 나타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5년이 지났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 원하고 있다. 그의 얘기를 듣고 감동과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선아 사랑해> 안에만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이제는 변화의 현장에 참여해야 한다. 사회복지 정책을 공부하는 것은 변화를 위해서 무척 중요하다. 동시에 실천의 장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간 쌓은 ‘실력’과 ‘내공’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어야 한다. 미래에 대한 지금의 고민과 변화의 걸음이 장차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지켜볼 일이다.

그는 내가 들으면 웃을지도 모른다면서, 그리고 기사로 쓰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면서, 별로 비밀스럽지 않은 자신의 비전을 아주 비밀스럽게 얘기했다. 그와 약속했기 때문에 그의 꿈을 여기서 밝힐 수는 없다. 언젠가 제 입으로 말할 거라고 믿는다. 꿈 얘기를 들으면서, 그의 한결같음과 진보 때문에 마음이 즐거워졌다.

▲ 여전히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마음을 잃지 않고 있는 이지선 씨는 8년 전 교통사고 가해자 김 아무개 씨를 용서하기보다는 나를 끔찍스럽게 사랑하셔서 그런 사고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용서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덤이 곧 떨이는 아니다

세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약간의 의도를 담은 질문이었다. 그는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뭔가 쓰기는 쓰고 있는데, 그게 나중에 책이 될지 안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그의 첫 번째 책 <지선아 사랑해>는 2003년 5월에 나왔다. KBS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 이지선 씨 이야기가 소개된 것과 맞물려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두 번째 책 <오늘도 행복합니다>는 2005년 7월에 나왔다. 보스턴에서 재활상담을 공부하던 때였다. 첫 번째 책만큼 호응이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두 권 책의 인세는 이지선 씨가 값비싼 보스턴 생활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두 번째 책은 첫 번째 책만큼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 넘쳐흐르는 걸 주체하지 못해서 담아낸 그릇이 아니었다. 조금은 억지로 채운 그릇과 비슷했다. 두 권을 동시에 읽은 나는 그걸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지선 씨 스스로가 그것을 더 잘 알고 있었다.

한비야 씨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곳을 다녔는지, 공지영 씨가 한 권의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간접 경험을 하고 자료를 뒤지고 수많은 사람을 취재했는지, 소설가 이외수 씨가 단어 하나를 제대로 쓰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즘 기독교계에 읽을 만한 책이 안 나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 권이 일단 뜨면 다시 차서 넘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밑바닥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부전부전 박박 긁어 먹는 출판사의 상술이 도를 넘고 있다. 제목과 내용만 살짝 살짝 바꿔서 재탕, 삼탕하는 책들이 천지에 널브러져 있다.

여기에 말려들어서 마약과 같은 유명세에 중독되어 선 글을 써대다가 결국 독자들에게 버림받는 ‘망가지는 스타’의 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그를 여전히 스타와 영웅, 나아가 상품으로 만들려는 갖은 유혹을 이겨내고 자신을 연마하는 또 다른 고난의 세월을 당분간은 눅진하게 걸어야 한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30이다. 갈 길이 멀다. 그는 자신이 덤으로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덤이라고, 이리 저리 휘둘리면서 거춤거춤 살아갈 일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덤은 ‘막판 떨이’와 비슷하겠지만, 하나님이 주는 덤은 ‘떨이’나 ‘우수리’가 아니다. 옹글게 살아야 한다. 명이 길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은 채워야 할 때다. 우리는 기다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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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2012-02-06 12:07:22
수고...

111 2012-02-06 12:07:13
안녕....

222 2012-02-02 00:57:02
수고...

111 2012-02-01 21:35:47
안녕...

3333 2012-01-31 17:44:40
3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