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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면 속 점이 아닌, 인간입니다”리뷰] 켄 로치 감독의 신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

흔히 엄청난 규모의 영화를 잘 만들어 큰 돈을 벌어들이는 감독 앞엔 ’거장’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이렇게 따지면 영국 출신의 켄 로치 감독은 거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는 소소한 이야기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나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큰 그림’을 보여준다. 

그의 1995년작 <랜드 앤 프리덤>에서는 순수한 열정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무정부주의자들의 투쟁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과도 같았던 스페인 내전의 난맥상을 드러낸다. 2006년 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테디와 데이미언 형제의 갈등을 투시경 삼아 아일랜드의 비극을 재조명한다. 그의 신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역시 감독 자신이 추구해 온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다.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실업자 신세다. 목수 경력 40년이지만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러다보니 당장 생계가 문제다. 가스, 전기 등 공공요금 부담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블레이크는 정부의 지원에 기대려 한다. 그러나 정부의 복지혜택을 받으려면 여러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가장 먼저 닥친 난관은 인터넷이다. 정부가 모든 복지혜택 신청을 인터넷으로만 받도록 시스템을 구축해 놓아서다. 공사판 노동에 익숙한 블레이크에게 인터넷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넘사벽’이다. 

켄 로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인간을 소외시키는 관료주의와 영국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정책의 허점을 제대로 짚어 낸다. &#9400; 영화사 진진

블레이크는 옆집 사는 젊은 이웃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신청양식 접수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이력서 작성을 위한 강좌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하는가 하면, 일정시간 이상 구직활동을 해야 하고 증빙자료를 남겨 담당관청에 제출해야 한다. 담당 주치의는 블레이크의 심장 질환이 회복되지 않아 당장 노동은 불가능하다는 소견을 냈다. 블레이크도 이로 인해 구직활동이 탐탁치 않지만 지역 노동청은 이 모든 상황을 간단히 묵살한다. 

켄 로치의 연출은 바로 이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블레이크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블레어 집권 이후 영국 정부의 노동정책을 살펴 보아야 한다. 토니 블레어의 전임자인 마가렛 대처는 이른바 ‘대처리즘’을 앞세워 복지지출을 대폭 삭감했고,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시장과 기업의 힘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커졌다.

‘일자리를 위한 복지’, 노동자들에겐 ‘그림의 떡’

블레어는 대처의 장기집권을 끝내면서 ‘제3의 길’을 들고 나왔다. 대처리즘이 ‘작은 정부와 시장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라면 ‘제3의 길’은 ‘역동적인 시장경제와 일자리를 향한 복지’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대처 시대의 신자유주의는 유지하되, 적극적인 구직활동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선별적으로 복지혜택을 주겠다는 말이다. 

이 같은 정책기조에 따라 블레어 집권 이후 교육, 보건, 사회보장에 대한 정부 지출은 늘어났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정부가 ‘일자리를 향한 복지’란 미명으로 복잡한 관료적 장치를 만들어 노동자의 복지혜택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로부터 실업급여를 받아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려는 블레이크에게 정부가 까다로운 신청양식과 교육 참가, 일정 시간 이상의 구직활동을 요구했듯이 말이다. 

블레이크는 온갖 관료적 요구사항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모든 신청절차를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지방 노동청 사무소에서 알게 된 싱글맘 케이티의 권유로 실업급여 신청 항소심 심리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번엔 지병인 심장병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의 심장이 곧 있을 심리에 대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케이티는 그가 이 세상에 외치고자했던 외침을 대신 전한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약 1시간 40분 가량의 짧은 러닝타임, 그리고 영국의 소도시 뉴캐슬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다. 연출자인 켄 로치는 소품과도 같은 작품에 인간을 소외시키는 관료주의, 그리고 블레어 이후 영국 정부가 추구해온 노동정책의 한계를 제대로 짚어낸다. 이런 면에서 켄 로치 감독은 진정한 거장이다.

켄 로치 감독의 신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 &#9400; 영화사 진진

지유석  luke.wyclif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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