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이 들려주는 '진짜 러브스토리'
알랭 드 보통이 들려주는 '진짜 러브스토리'
  • 황보름
  • 승인 2016.12.24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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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이 건네는 이야기]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라는 '낭만주의'

알랭 드 보통식 러브스토리는 역시나 매력적입니다. 읽는 맛과 깨닫는 맛을 이번에도 한 번에 느낄 수 있었어요. 감각적이고 사려 깊은 문장으로 독자를 유혹하다가 너그럽고 포용적인 자세로 독자의 편견과 고집을 한순간에 깨 주는 보통의 능력은 정말 탁월합니다.

<사랑의 기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소설에서도 보통은 '낭만주의와 결혼의 불협화음'에 천착합니다. 보통은 낭만주의가 불러일으킨 오해 때문에 우리들의 결혼 생활이 너무나 고달파졌다고 말하는데요.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인 라비는 16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이런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이제 라비는 낭만주의 개념들이 재난을 낳는다는 것을 안다." - 본문 중에서

그렇다면 여기서 낭만주의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큰 틀에서 보자면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라는 걸 말합니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사랑이 이다지도 중요할까. 낭만주의는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하다.'

사실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결혼과 사랑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책에서 나오듯 과거에 "사람들은 논리적인 이유로 결혼을 했"습니다. "신부의 토지가 신랑의 토지와 붙어 있거나, 신랑의 가족이 번성하는 농가이거나, 신부의 아버지가 읍의 치안판사이거나, 지켜야 할 성이 있거나"하면 결혼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결혼이 "속물적이고, 착취적이고, 모욕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지요.

이 결과로 낭만주의가 태동하고, 이제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이 됩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절실히 바라고, 본능에 압도되어 서로에게 빠져들고, 결혼이 옳음을 가슴으로 아느냐"가 결혼의 절대 조건이 된 것이지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보자면 감정을 따라 결혼한다고 해서 결혼 생활이 수월해지진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바란 게 컸던 만큼 그 실패는 더 쓰라렸지요.

위에서 언급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라는 문장. 이 문장에 토를 달기는 참 어렵습니다. 결혼에서 사랑이 다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사랑 빠진 결혼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 문장은 어떤가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하다.' 이 문장에는 다양한 의견이 오갈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도 다 압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오히려 우리를 더 사랑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언제고 무너질 수 있는 '얕은' 사랑이 아니라, '깊은' 사랑, 그래서 결코 '깨지지' 않는 사랑을 찾아 헤매게 된것이죠. 내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고, 나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랑은 영원할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사랑과 함께라면 결혼 생활에서 겪게 될 갖은 역경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완전한 사랑의 추구 역시 낭만주의가 불러일으킨 개념이라는 건데요. 영혼의 짝에 대한 비합리적인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 나의 영혼의 짝이 존재하리라는 믿음.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영혼의 짝을 만나면 우리는 마침내 완성될 것이라는 기대 말이에요. 낭만주의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모든 걸 이해하고, 용서해 준다고요. 사랑은 나의 가장 부족하고 숨기고 싶은 부분을 보듬고 채워줄 것이라고요. 내가 어떤 사람이든 사랑은 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요.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강하고 질기지 않죠. 오히려 쉽게 깨지고 쉽게 끊어집니다. 대개는 서서히 사그라들지요. 그래서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사랑의 시작'을 묘사하는 데 거의 모든 페이지를 씁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사랑이 이루어졌다'며 얼른 마무리를 짓지요. 시작한 그 후의 이야기가 별로 로맨틱하지 않다는 걸 작가들도 다 알고 있으니까요.

낭만주의보다는 낭만적 비관주의가 필요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서 '사랑의 시작'은 금방 지나갑니다. 그리고 대개의 러브스토리가 얼버무리고 지나가거나 아예 진입하지도 않는 결혼 생활, 그러니까 '사랑의 과정'에 대부분의 페이지를 할애합니다. 라비와 커스틴은 '사랑의 과정'에서 몇 번이고 사랑을 잃습니다. 실망하고, 절망하고, 웁니다.

결국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며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자 서로를 더 잘 모르게 되는 상황 속으로 빠져듭니다. 두 사람의 현재가 부딪히며 과거가 튀어나오고 미래가 박살 납니다. 아주 사소한 말다툼이 서로의 존재를 뒤흔들고 무릎 꿇고 좌절하게 만들지요. 그리고 보통은 이것이 바로 '진짜' 러브스토리라고 말합니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 본문 중에서

사랑의 막다른 감정에까지 도달한 두 사람. 두 사람은 결혼을 끝내야 할까요. 아닙니다. 보통은 말해요.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건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사랑의 기술이라고요. 사랑을 유발했던 감정이 끝이면 결혼도 끝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리고, 낭만주의가 심어놓은 모든 오해를 버리고, 성숙한 대처와 대화를 통해 관계를 이어나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에는 영혼의 짝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어느 누구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고, 우리는 그 누구와도 결코 '잘 맞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나도 완벽하지 않고 상대도 완벽하지 않으며, 나도 상대를 완전히 받아줄 수 없는 것처럼 상대도 나를 완전히 받아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것.

상대가 까다롭게 구는 건 그 사람이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결혼 생활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되새기며, 인간은 누구나 조금은 미쳤고, 조금은 비정상이며, 또 많이 이기적이고 나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을 받기만을 바라는 건 낭만적인 환상일 뿐 자신 또한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 영화와 소설에 묘사된 러브스토리는 현실의 러브스토리와는 거의 모든 부분이 다르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알랭 드 보통은 말합니다.

"우리를 자주 잘못 인도하는 미적 매체들이 부과한 기대에 따라 우리의 관계를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잘못은 삶이 아닌 예술에 있다. 불화를 일으키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보다 정확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필요가 있다. 시작에만 너무 얽매여 있지 않은 이야기, 완벽한 이해를 약속하지 않은 이야기, 우리의 문제를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려놓고 사랑의 여정에서 거쳐 갈 길이 우울하더라도 희망적임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 본문 중에서

낭만주의가 지나간 곳에 새로 쓰여야 할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일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또 다른 타락한 생명체와 함께 사는 현실에 나 자신을 적응시킬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혼은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 있을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조금은 타락한 나와 역시나 조금은 타락한 당신이 만나, 순간의 스파크에 경도돼 서로를 서로에게 영원히 맡겼으나, 태생적 한계로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 때로는 으르렁거리면서도 구차하고 자질구레한 결혼 생활을 끝까지 이어가 보려는 노력. 결혼 생활에서 필요한 건 자신과 상대를, 그리고 결혼 생활 자체를 그 어떤 환상을 제거한 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 이 소설에서 이 문장이 특히 참 좋더라고요.

"연인이 '완벽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징표에 불과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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