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잊을 수 없는 순간들
2016년 잊을 수 없는 순간들
  • 지유석
  • 승인 2016.12.28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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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되짚어본 사회·교계 10대 뉴스 (1)
2016년이 저물어 갑니다. 올해는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이 불거졌고, 그래서 국민들은 추운 겨울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국정농단이 불거지기 전에도 정말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혼돈으로 가득했던 2016년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되돌아봅니다. - 편집자 주 

1) 최순실 국정농단, 뒤이은 1000만 촛불 

2016년 연말 대한민국은 초유의 스캔들에 휩싸였다. 그동안 실체가 가려져왔던 ‘권력서열 1위’ 최순실의 존재가 10월24일 JTBC뉴스룸 보도로 확인된 것이다. 최순실은 비선실세로 군림하며 사실상 국정을 주물렀고, 그의 존재 앞에서 대의 민주주의를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은 휴지조각으로 전락했다. 

국정농단이 드러난 이후 시민들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0월29일 제1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 2만을 시작으로 2차 20만, 3차 100만, 4차 95만, 5차 190만, 6차 232만 등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가결되기까지 광장의 시민 숫자는 가파르게 늘어났다. 국회에서 박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된 이후 열린 세 차례의 촛불집회에서도 50~60만의 시민이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밝혔다. 주최측인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은 연말까지 누적인원 1,000만을 돌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광장의 시민들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비선실세에게 내준 박 대통령을 강력 규탄했다. 규탄의 목소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을 무조건 두둔해온 새누리당을 향해, 그리고 비선실세에게 800억 가까운 거금을 ‘쾌척’한 재벌을 향해, 박 대통령에게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를 씌운 언론을 향해 해체하라고 외쳤다. 

무엇보다 시민들은 평화를 선택했다. 9차례에 이르는 집회 동안 한 명의 연행자도 발생하지 않았고, 혹시라도 불상사가 우려되는 상황이 불거지면 집단지성을 발휘해 상황을 통제했다. 2016년 광장의 시민들은 위대했다. 

최순실 국정농단이 불거지면서 연말까지 1천만 가까운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사진은 지난 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던 제8차 범국민행동. Ⓒ지유석

2) 박근혜 대통령 탄핵 

최순실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 동력을 급격하게 잃기 시작해 결국 지난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됐다. 박 대통령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탄핵 소추안 국회 상정을 막으려 했다. 특히 제3차 대국민담화에서 “임기 단축 등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고 해 정치권의 분열을 노렸다. 

그러나 광장의 시민들은 박 대통령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국정농단이 드러난 즉시 박 대통령의 통치가 하루라도 더 계속되면 안된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했고, 여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동안 쟁점현안이 불거질 때 마다 여야간, 그리고 정파-계파간 이해득실을 분주히 따지던 정치권은 이번만큼은 광장을 외면할 수 없었다. 

민심의 물결은 탄핵 소추를 앞두고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특히 시민들은 새누리당 의원들을 집중 압박했다. 탄핵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은 새누리당 의원들의 연락처가 소셜 미디어에 노출됐고, 시민들은 쉴 새 없이 문자 메시지와 항의전화를 걸어 탄핵 가결을 촉구했다. 결국 9일 국회에선 찬성 234 대 반대 56의 압도적인 표차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이날 시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국회 앞에 나와 탄핵을 촉구했고, 탄핵 가결 소식이 전해지자 일제히 환호했다.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표결이 이뤄지던 9일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국회로 나와 탄핵 가결을 촉구했다. Ⓒ지유석

3)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등 ‘불통’ 행정  

박근혜 정부는 지난 해 말부터 폭주하기 시작했다. 11월 역사교과서 국정화,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등 논란이 분분한 정책들이 결정됐다. 이 같은 폭주는 올 한해 가속도가 붙었다. 정부는 먼저 2월 돌연 개성공단 폐쇄 조치를 단행했다. “우리가 지급한 달러 대부분이 북한 주민들의 생활 향상에 쓰이지 않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노동당 지도부에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게 이유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7월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강행했다. 당장 사드 레이더 배치 예정지로 성주 성산포대가 선정되자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러자 정부는 한 발 물러서 제3예정지를 언급했고, 이에 김천과 가까운 초전면 롯데 골프장이 급부상했다. 이번엔 김천 시민들과 원불교계가 들고 일어났다. 동북아 정세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특히 직접 영향을 받을 중국은 내심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고, 급기야 연말엔 한류 금지와 중국 진출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압박으로 보복을 가했다. 

이 같은 폭주는 최순실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도 멈출 줄 몰랐다. 지난 달 23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강행처리한 것이다. 이 협정은 특히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 때문에 이전 정부에서도 추진하지 못했는데, 박근혜 정권은 이를 끝내 관철시켰다. 

박근혜 정권의 폭주엔 개신교, 특히 보수 개신교계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국정농단이 드러나기 전 한기총, 한교연 등 보수 기독교계 연합체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개성공단폐쇄, 사드 등의 쟁점 현안에 정부 입장을 대변하다시피 하며 환영입장을 밝혔다. 한국교회언론회의 경우, 현장 검토본이 나오기도 전에 ‘국정역사교과서만큼은 지키자’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7월 정부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강행했다. 이러자 성주, 김천, 그리고 원불교계가 즉각 반발에 나섰고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집회를 잇달아 열었다. 사진은 10월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One Peace 종교, 시민 평화결사’. Ⓒ지유석

4) 재점화한 세월호 7시간 의혹

박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무 정지 되면서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의 행적 역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세월호 참사 직후 박 대통령은 7시간 동안 행적이 묘연했고, 이후 사라진 7시간과 관련해 수많은 추측과 음모가 고개를 들었다. 

세월호 참사 문제가 본격 재조명된 시점은 올해 6월이었다.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6월 말 정부에 의해 강제종료될 위기에 처해 있었고, 이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특조위 활동기간 보장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정부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뜻에 아랑곳없이 특조위 활동을 종료시켰다. 이에 맞서 특조위 이석태 위원장을 시작으로 무기한 단식농성이 시작됐다. 시민들도 동조단식에 동참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진상규명은 그렇게 희미해지나 했다. 

최순실 국정농단은 세월호 참사, 특히 7시간 행적 논란을 재점화시켰다. 먼저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가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SBS 시사고발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는 지난 달 19일 방송을 통해 관련 의혹을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다급한 나머지 홈페이지에 ‘이것이 팩트다’는 메뉴를 개설해 해명에 나섰다. 그러나 JTBC 등 거의 모든 언론들이 검증에 나선 결과 허점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어 세월호 참사 당일, 피부미용 주사를 맞았다는 정황과 머리손질을 했다는 보도가 JTBC와 <한겨레신문>을 통해 잇달아 불거졌다. 급기야 26일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인 정호성 전 청와대부속비서관의 입에서 “세월호 참사 전후 대통령 일정이 빽빽했지만, 유독 그날(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 일정 비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국민 304명의 안위가 위태롭던 순간, 대통령이 아무 공식 일정이 없었고 피부미용이나 머리손질 등 ‘여성으로서 사생활’에 시간을 보냈다는 정황이 드러난 이상 박 대통령은 직무를 유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지난 6월 정부는 세월호 특조위를 강제 해산했다. 이러자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특조위 활동 마지막날인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조위 활동 보장을 촉구했다. Ⓒ지유석

5) 지하철 구의역 사망 사건 

지난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9-4번 출입문에서 스크린 도어 보수 작업을 하던 19세 노동자 김 모 군이 들어오는 전동차에 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원인을 따져본 결과 희생된 김 군은 7개월 동안 용역업체에서 일하며 격무에 시달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그가 잡았던 유일한 끈이었다. 

그의 가방에선 컵라면이 발견됐다. 식사도 제때 챙겨 먹지 못했음을 생생히 증언하는 유품이었다. 그럼에도 서울메트로 측은 처음엔 ‘2인1조 근무규칙’ 위반을 들어 희생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유가족과 합의를 시도했다가 여론의 반발에 밀려 한 발 물러섰다. 

김군의 죽음은 11%가 넘는 실업난에 시달리며 연애, 결혼, 출산, 내집마련 등 기본 생존은 물론 인간관계, 꿈마저 포기를 강요당하는 대한민국 청년들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준 단면이었다.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는 19세의 노동자가 스크린도어 수리작업을 하다 지하철에 치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진은 사건이 일어난 지하철 2호선 구의역 9-4번 출구. Ⓒ지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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