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피해 할머니 중심으로 다시 합의하라
시론] 피해 할머니 중심으로 다시 합의하라
  • 지유석
  • 승인 2016.12.30 0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 1년, “불가역적 협약은 없다”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을 담은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충분히 택하지 않았다.”

[뉴스 M (서울) = 지유석 기자] 올해 3월 UN 여성차별 철폐위원회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아래 위안부 합의)에 대해 내린 지적이다. 이 같은 지적에도 한일 양국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다 최순실 국정농단이 드러나고 뒤이어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운영 동력을 상실하면서 위안부 합의가 새삼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양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즉각 폐기를 외치고 있다. 야권 차기 대권주자들 역시 ‘재협상’ 내지 ‘폐기’로 입장을 정했다. 반면 일본은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요미우리>, <아사히>, <니혼케이자이> 등 일본 주요 언론들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초기부터 위안부 합의, 그리고 지난 달 체결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이행이 불투명하게 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를 내왔다. 박 대통령이 지난 달 29일 제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임기단축을 언급하자 이 같은 목소리는 더욱 노골화됐다. 이러자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다음 날인 30일 정례 기자회견을 통해 “국가 간 합의 내용이니 각국 정부가 합의를 성실히 이행해 가는 게 중요하다”며 진화에 나섰다. 

일본은 무엇보다 ‘최종적’, 그리고 ‘불가역적’이라는 합의문 문구 뒤로 숨는 양상이다. 스가 관방장관은 위안부 합의 1주년인 28일 재차 “양국 국민과 전 세계에 명확히 약속했고, 양 정상도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로 (중략) 책임을 갖고 이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앞서 아베 총리는 올해 1월 ‘위안부 합의에 나온 총리의 사죄 표현을 한 번만 말해달라’는 오가타 린타로 민진당 의원의 요구에 “같은 문제를 계속 말하라고 요구하면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끝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책임을 갖고 이 문제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라며 거절했다.

12.28위안부 합의 체결 직후인 지난 해 12월30일 한 대학생이 합의 무효를 외치고 있다. ⓒ 지유석

곧장 휴지조각 된 독소 불가침 조약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보자. 한일 위안부 합의는 ‘불가역적’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무엇보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국제협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정치 무대는 각국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이다. 조약, 협정 등을 아우르는 모든 국제협약은 이 같은 이해충돌의 산물이다. 그리고 조약은 국가간 이해관계가 맞으면 맺어지지만, 이해가 틀어지면 곧장 휴지조각 되기 일쑤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1939년 나치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여러모로 괴이한 조합이었다.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다. 더구나 게르만의 유전자 속엔 슬라브족에 대한 우월의식이 각인돼 있었다. 스탈린 역시 히틀러의 전체주의를 투쟁으로 극복해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기로 약속했다. 뿐만 아니라 한쪽이 제3국의 공격을 받을 시 제3국 원조 금지, 상호간 정보교환 ·협의,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에도 합의했다. 

물과 기름 같았던 나치 독일과 볼셰비키 러시아의 밀월은 1930년대 국제정치의 산물이었다. 불가침 조약 한 해 전, 영국은 독일과 뮌헨협정을 체결했다. 이때 영국은 체코의 주데텐 지방을 할양해 달라는 독일의 요구를 들어줬다. 이 역시 전략적 이해의 산물이다. 

영국은 내심 히틀러의 등장을 반겼다. 볼셰비키 혁명의 확산을 막으려면보다 강력한 독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금세기 초까지 영국은 러시아의 동진남하를 막는데 국운을 걸다시피 했다. 그런데 숙적 러시아가 1917년 볼셰비키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영국이 불경한 볼셰비키의 확장을 막고자 독일을 완충지대로 이용하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만약 구프로이센 귀족 출신의 보수 엘리트가 이끄는 독일이었다면 영국의 전략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통적인 세력게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영국 패권을 쳐부수고 세계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국은 이 같은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히틀러의 야욕을 제대로 간파한 이는 윈스턴 처칠이 유일했다. 

한편 소련 역시 히틀러의 독일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영국, 프랑스와 접촉해 동맹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가 볼셰비키를 불온시한데다, 발트 3국의 할양문제를 영국이 거절하면서 이 같은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히틀러 역시 전세계 지배를 꿈꿨지만 소련의 참전 가능성은 부담스러웠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이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만났고, 결국 독소 불가침 조약이라는 괴이한 결합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독일과 소련의 밀월은 오래가지 않았다. 독일은 유럽과 영국을 초토화시켰다. 히틀러는 자신을 얻었는지 1941년 불가침 조약을 무시하고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패퇴하면서 히틀러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말이다. 

독소 불가침 조약은 극단적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지적했듯 국가간 협약은 시시각각 변하는 이해충돌의 와중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폐기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위안부 합의, 조약으로 볼 수 없다 

다시 위안부 합의로 돌아가보자. 위안부는 일단 서명문서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문서화된 조약이나 협정으로 보기 어렵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JTBC뉴스룸> 팩트체크에 따르면 일본 측 역시 조약으로 여기지 않는 모양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정치학과 교수는 팩트체크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국회에서 (결정)한 것도 10억 엔 지출을 위한 합의이기 때문에 (작년의 한일 합의를) 한일간의 문서화된 조약이나 협정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무엇보다 위안부 합의는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의 입장이 원천 배제돼 있다. 피해할머니들은 위안부 합의 직후, 피해 당사자의 요구가 반영된 ‘정의로운’ 해결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그러다 경술국치일인 지난 8월29일 위안부 피해할머니 12명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각 1억원 씩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정부에 위안부 피해 구제를 포기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게다가 이 합의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의 산물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아시아로의 회귀를 기치로 내걸고 중국 견제에 적극 나섰다. 이 같은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한일 양국의 협력이 선결조건이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가 한일간 협력의 걸림돌이었다. 이에 미국은 다각도로 압력을 넣어 12.28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JTBC뉴스룸 팩트체크는 한일 위안부 합의가 불가역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 JTBC뉴스룸 화면 갈무리

다시 말하지만 불가역적인 조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안부 합의는 피해 당사자의 의사가 무시됐고, 오로지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관철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UN 여성차별 철폐위원회가 지적한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새해엔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이 이뤄진다. 설사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 탄핵을 기각해도, 국정운영 동력을 회복하기는 어려울 공산이 크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해 볼 때 위안부 합의는 물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등 이 정권이 추진한 안보 현안 해결은 차기 정부의 몫으로 넘어가게 됐다. 

누가 차기 정부의 수반이 되든, 위안부 합의는 바로 잡아야 한다. ‘불가역’이라는 수사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 피해 할머니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이분들의 목소리가 충실히 반영되도록 노력해 주기 바란다. 졸속 합의는 한 번으로 족하다. 이번 한 번의 졸속 합의로도 피해 할머니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으니까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