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기 흔들어도, 미국은 한국 돕지 않는다
성조기 흔들어도, 미국은 한국 돕지 않는다
  • 김종성
  • 승인 2017.01.12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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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팽창 아닌 축소 선택할 상황 놓인 트럼프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특검 사무실 앞에 대형 성조기가 나타났다. 지난 7일 탄핵을 반대하는 맞불집회 참가자들이 코엑스 앞에서부터 성조기를 맞들고 특검 사무실 쪽으로 행진했던 것이다.

미국 국민도 아니면서 성조기를 신주 단지 모시듯 하는 맞불집회 참가자들의 입장에서는, 지금처럼 고립무원인 상황에서 미국이라도 와서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대형 성조기를 함께 맞든 그들의 심리 저변에는 미국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미합중국을 이끌 새로운 대통령은 그런 기대에 부응할 여력이 없다. 트럼프가 최우선적으로 급하게 처리할 일은 다름 아닌 IS(이슬람 국가) 문제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불구가 된 미국>이란 저서에서 "이제는 진지하게 대응에 나설 때가 되었다"며 "IS와 싸우려면 지상 병력을 투입해야 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트럼프가 자국의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대상은 이처럼 IS이지 촛불집회는 아니다.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한둘이 아니다. 이란과의 핵 협상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고 있고, 북한 김정은에 대해서도 '적개심 반, 호기심 반'의 관심을 갖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는 무역 문제 때문에 경쟁심을 품고 있다. 동맹국 일본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유로 감정이 좋지 않다.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게 또 있다. 멕시코와의 국경을 통해 대규모로 유입되는 불법 입국자들이다. 이들을 차단하기 위해 국경선에 장벽이라도 쌓겠다는 게 그의 공언이다. 그는 이 비용을 어떻게든 멕시코에서 뜯어내겠다고 다짐한다. 자국이 필요해서 국경 장벽을 쌓겠다면서 비용은 멕시코에서 뜯어내겠다는 것이다. 이런 억지를 부리려면 신경 쓸 게 여간 많지 않을 것이다. 맞불집회 참가자들한테 신경을 기울이자면, 2017년이 훌쩍 지나가버릴 것이다. 

한국에 대한 트럼프의 관심사는 오직 '이것'

물론 트럼프가 한국에 대해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은 아니다. 그는 주한미군 주둔비용의 한국측 분담 비율을 인상하는 데 관심이 많다. <불구가 된 미국>에서 그는 미군이 최고의 전력을 갖추려면 "필요한 일부 비용을 사우디·한국·독일·일본·영국에 넘겨야 한다"면서 "우리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으니 비용을 나누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방위비 분담 문제를 놓고 한국뿐 아니라 사우디·독일·일본·영국과도 신경전을 벌어야 하니, 트럼프가 박 대통령의 임기 보장을 위해 한국 문제에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트럼프의 머릿속에서 박 대통령 문제가 후순위로 밀려 있기 때문에, 맞불집회 참가자들이 트럼프의 관심을 끌려면 이만저만 노력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2016년 7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을 하는 트럼프.ⓒ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한국 문제가 순위 상으로 밀린다는 점 외에, 트럼프가 한국 문제에 개입하기 힘들 것임을 추론케 하는 또 다른 자료가 있다. 그것은 지난 241년간 미국 역사의 흐름이다. 대외 팽창이라는 관점에서 미국 역사의 흐름을 3단계로 살펴보면, 앞으로는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이 있는 서쪽을 지향하기보다는 도로 동쪽으로 물러날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대외팽창이란 관점에서 볼 때, 미국 역사의 제1단계는 독립을 선언한 1776년부터 110년 뒤인 1886년까지다. 이 시기에 미국은 대서양 쪽인 대륙 동부에서 태평양 쪽인 대륙 서부로 영향력을 팽창했다. 

이때 미국의 주적은 아메리카 원주민, 이른바 인디언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영향력은 대륙 내부에 국한돼 있었다. 이런 미국의 상황을 대외전략 측면에서 공식화한 사람이 제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다. 그가 1823년에 천명한 먼로주의는 일종의 외교적 고립주의로서 미국의 영향력을 아메리카대륙 내부에 국한시키는 것이었다. 

제1단계 때인 1854년에 미국이 태평양 건너 일본까지 가서 강제로 국교를 체결한 일은 있다. 하지만 먼로주의를 깨는 일은 아니었다. 이것은 미국의 영향력을 아시아로 확대하기 위한 게 아니라, 북태평양에서 활동하는 미국 포경선들이 비상시에 일본에 정박해서 식량 및 원료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럽 열강이 아시아·아프리카를 상대로 식민지 개척에 열중하던 시절에, 이처럼 미국은 인디언과의 전쟁 때문에 아메리카대륙 내부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아시아·아프리카 문제에 대해 공정한 제3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아시아·아프리카 쪽에서 미국의 이미지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1880년에 조선 외교관 김홍집을 위해 집필한 <조선책략>에서 "미국은 언제나 정의를 숭상하는 나라"라며 "남의 영토를 탐내지 않고 남의 백성을 탐내지 않으며 남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는다"고 극찬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미국의 악행이 아메리카대륙 내에서 인디언을 상대로만 벌어지고 있었기에, 대륙 바깥에는 미국의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1890년대부터 태평양 지역 침략에 착수한 미국

아메리카 원주민, 이른바 인디언.ⓒ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미국과 인디언의 전쟁이 대략적으로 마무리된 해는 1886년이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2년 뒤였다. 이로써 미국대륙 전역이 미합중국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태평양 연안도 미국 수중에 완전히 들어갔다. 이렇게 태평양 동쪽 연안을 확보하게 되자 미국은 팽창의 제2단계로 돌입했다. 태평양 쪽을 향해 서진(西進)을 개시한 것이다. 

미국 역사가 제2단계로 접어들기 직전인 1885년, 독일에서 포도 농사를 하던 드룸프(Drumpf)라는 청년이 집을 떠나 배를 타고 뉴욕에 정착했다. 독일인과 유대인의 갈등을 잘 알고 있는 드룸프는 미국에서 자주 접하는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고자 자기 성을 트럼프(Trump)로 바꾸었다. 독일인임을 숨기고자 한 것이다. 

바로 이 드룸프가 트럼프 차기 대통령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의 콤플렉스를 이어받은 트럼프도 한동안 자기 집안이 독일인임을 숨겼다. 유대인에 대한 공포를 무릅쓰고 드룸프가 미국에 정착한 것은 당시의 미국이 팽창의 제2단계로 접어들던 대약진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1880년에 황준헌은 "미국은 남의 영토를 탐내지 않는다"고 썼지만, 미국은 1890년대부터 태평양 지역에 대한 대대적 침략에 착수했다. 1898년에는 하와이왕국과 필리핀과 괌을 연달아 점령하고 1899년에는 태평양 남부의 사모아섬과 괌 동북쪽의 웨이크섬을 확보했다. 

태평양 주요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이 거대한 바다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한 미국은 이를 굳힐 목적으로 1905년 까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응원하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응원하는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 지배를 훼방하지 않도록 하고자 일본의 조선 침략을 응원했던 것이다. 

그 후로도 태평양에 대한 지배권 굳히기에 몰두하던 미국은 1941년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1945년에 진정한 의미의 세계 최강국에 등극했다. 이로써 미국의 영향력 팽창은 제3단계에 돌입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서쪽의 아시아·태평양뿐 아니라 동쪽의 유럽을 향해서도 전 방위적인 영향력 팽창에 나섰다. 서진(西進)만 하던 미국이 동진(東進)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미국이 3단계에 접어든 직후인 1946년에 도널드 트럼프가 출생했다. 

미국이 제3단계에 진입한 지 얼마 뒤인 1950년 부산 시내에 상륙한 미군. 부산시 서구 부민동의 임시수도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트럼프의 할아버지는 제2단계로 접어들기 직전에 미국에 정착하고 트럼프 본인은 3단계가 개시된 직후에 미국에서 출생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이 집안은 미국 대외팽창과 흐름을 함께한 집안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성장하고 돈을 버는 동안에 미국의 국력은 많이 쇠약해졌다. 과거의 몽골제국은 기본적으로 서쪽을 향한 영향력 팽창에 큰 비중을 둔 데 반해, 미합중국은 서쪽과 동쪽에 비슷한 비중을 두다 보니 금세 지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패전과 1969년 닉슨 독트린(아시아·태평양 문제에 가급적 개입 않겠다는 선언) 이후로 현저하게 약해졌다. 그 후로도 세계 제국의 위상은 여전히 유지했지만, 예전보다 현저히 약해진 탓에 지금은 중동 지역을 상대하기에도 숨이 벅찰 정도다. 그래서 지금의 미국은 제3단계를 접고 제4단계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회귀'를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아직은 제3단계이지만, 조만간 제4단계 선택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기운은 트럼프한테서도 감지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이라며 그때처럼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겠노라고 큰소리치지만, 정작 그가 지향하는 것은 과거의 먼로주의와 비슷한 것이다. 먼로주의와 꼭 같지는 않지만, 미국대륙 바깥으로의 영향력 팽창을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 점은 대선 유세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사담 후세인이 지금 이라크에 있었다면 세계가 더 안전했을 것"이라면서 미국의 이라크전쟁 개전을 비판했다. 또 "시리아에 IS도 있고 아사드 대통령도 있는데, 왜 둘이 그냥 싸우게 놔두지 않느냐"며 "(둘이서 싸우도록 한 뒤에) 우리는 나머지 이익만 챙기면 된다"고 말했다. 

또 2016년 4월에 있었던 위스콘신주 유세에서는 "북한과 일본이 싸우면 끔찍한 일이겠지만, 그들이 하겠다면 그들끼리 하는 것"이라면서 "행운을 빈다. 알아서 잘 즐기라"고 말했다. 동맹국인 일본이 북한과 싸운다 해도 중립자적 입장을 취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발언들에서 드러나듯이, 트럼프는 제1단계 때의 먼로주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겉으로는 전 세계를 상대로 당장에라도 한판 벌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현재 경제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영향력 팽창을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국가전략으로 공고해지면, 그때부터 미국 역사는 제4단계 '도로 미국 땅으로'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렇게 트럼프와 미국은 영향력 팽창이 아니라 영향력 축소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 강남에서 일부 한국인들이 성조기를 흔들어댄다 해도 한국을 도울 수 없는 게 미국의 처지다. 한국에서 휘날리는 성조기를 보며 잠시 마음이 짠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의 미국은 행동에 나설 만한 형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맞불집회에서 성조기를 흔들 바에야, 차라리 일장기를 흔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베 신조 총리는 현재의 임기가 끝나는 2018년 이전에 일본의 대외팽창을 위한 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뒤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성황리에 치를 계획을 품고 있다. 아베 신조 같으면, 서울 도심에서 일장기가 휘날리면, 마음이 감동해서 행동을 고려할 가능성이 아주 조금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트럼프는 아니다. 트럼프와 미국은 지금 갖고 있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간 벌여놓은 일들을 정리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래서 맞불집회를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다. 그런 트럼프와 미국에 심적 부담만 안기는 것은 동맹국 국민들이 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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