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도깨비 딸, 민주주의 회복을 노래하다
뉴욕의 도깨비 딸, 민주주의 회복을 노래하다
  • 경소영
  • 승인 2017.01.15 0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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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재즈 보컬리스트 전송이 씨 (1)
지난 해 11월 뉴욕 플러싱에서 열린 3차 '박근혜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집회 현장. (사진/ dami choi 제공)

[뉴스 M (뉴욕) = 경소영 기자] 지난해 11월, ‘박근혜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3차 집회가 열린 날이었다. 플러싱 지역에 300여 명의 한인이 모였다. 몹시 추운 날씨에도 두 시간가량 목청 높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집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여성이 피아노 앞에 마이크를 대고 섰다. 금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겨울바람에 휘날렸다.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전인권의 '걱정 말아요 그대', 이승환, 이효리, 전인권의 '길가에 버려지다' 세 곡을 연달아 불렀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목소리에 집에 가려던 이들도 멈춰 섰다. 그의 노래는 따뜻한 온기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주었다. 그런데 가만있자, 잘 들어보니 보통 실력이 아니다. 혹시 가수인 건가.

박근혜 퇴진 집회에서 노래하는 재즈 보컬리스트 전송이 씨. (사진/ dami choi 제공)

역시나 알고 보니 그는 재즈 보컬리스트였다. 그것도 뉴욕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인 뮤지션이었던 것이다. 이름은 전송이, 주변에서 ‘천송이’(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여주인공 이름)라고 놀린다고 너스레를 떨며 대중을 사로잡은 그가 활짝 웃었다. 목소리만큼이나 매력적인 그의 미소에 흠뻑 빠졌다. 

“저희 부모님도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 고통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노래를 듣느라 잠시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말투로 집회에 나온 소회를 밝히며, 그는 스치듯이 부모님 이야기를 했다. ‘누구든 가슴 아픈 사연 하나쯤 안고 살아가지 않나’라고 내게 오히려 되묻는 듯, 다시 한 번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뉴욕에서 살아가는 한인 뮤지션이야 셀 수 없이 많겠지만, 집회 현장에 나와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사연 있는’ 재즈 보컬리스트는 그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날은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졌다. 박근혜 퇴진이 이뤄지지 않으면 또 만나겠지 싶었다. 

깊은 인상을 남긴 전송이 씨를 다시 만난 건 작년 12월 31일, 바로 며칠 전이다. 뉴욕과 뉴저지 지역 진보단체 ‘희망세상’ 송년회에서 제대로 인사를 나누었다. 집회 때는 멀리서 지켜만 봤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 활기차고 밝았다. 모임에서 그의 노래를 다시 들을 기회가 왔다. ‘거위의 꿈’을 열창했다.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이 가사를 꿈을 향해 달려나가는 젊은 뮤지션, 바로 전송이 씨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미국 땅에서 한인으로, 음악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사연’과 ‘꿈’은 과연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자연스럽게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유투브에서 그의 공연 영상을 검색해 봤다. 첫 번째로 나오는 영상 제목은 바로 ‘정선 아리랑’, 아리랑 특유의 ‘한’의 정서는 그대로 살리면서 재즈풍으로 세련되게 편곡했다. 곡이 매우 좋아 반복해서 듣다보니, 어느새 뮤지션 ‘전송이’의 팬이 되었다. 

약속한 날이 왔다. 맨해튼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자마자 ‘정선 아리랑’ 영상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했는지 한참 이야기 나누었다. ‘편곡은 대체 누가 그렇게 멋지게 했느냐’라는 호들갑스러운 질문에 그는 수줍게 ‘제가 했어요’라고 말했다. 

밴드는 모두 외국인 친구들이었는데 한국어 가사 그대로 노래도 불렀다. 편곡 하고 밴드를 이끄는 것 역시 그의 몫이다. 놀라웠다. 도대체 혼자서 몇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인가. 그야말로 요새 유행하는 ‘신이 내린 재능에 축복을!’ 이라고 외치며 건배하고 싶었다. 

세계적인 재즈클럽 Blue Note New York에서 공연하는 전송이 씨.

전송이 씨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 8년간 클래식 현대 음악 작곡, 재즈 보컬을 전공한 후 미국에 건너와 보스턴 버클리 음대를 다닌 예술계의 재원이다. 졸업 후에는 다양한 활동을 하며 뉴욕에서 재즈 보컬리스트로 살아간다.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홀로 생활한 지 벌써 13년이나 되었다며 웃는 전송이 씨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하다. 

그가 경험한 유럽과 미국, 한국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더불어 정부에 탄압받은 부모님의 사연과 그의 인생 이야기도 궁금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지난 해 ‘박근혜 퇴진’ 집회 때 피아노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부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어떤 심정으로 참여했나.

다른 예술 분야보다 음악 하는 유학생이나 아티스트들은 집회에 잘 참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본인이 하는 예술에 심취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나도 학생일 때에는 시국 관련 일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 신분을 벗어나 이번 국정농단 사건을 접하게 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집회에 나가기 전에도 SNS를 통해 ‘음악인 시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소극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마침 지인을 통해 뉴욕 플러싱에서 ‘박근혜 퇴진’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음악 공연으로 참여하겠다고 주최 측에 연락했다.

한국에서의 촛불 집회를 보니 부모님 세대의 무서운 ‘데모’와 달리 평화롭게 진행되는 것을 보았다. 그걸 보면서 이곳 뉴욕에서도 그렇게 평화로운 집회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플러싱 집회 때 한인들이 하나 된 마음으로 즐겁고 평화로운 분위기여서 매우 감동했다. 이날의 감동을 마음에 담아 노래했다. 

전송이 씨는 한국에서의 국정농단 사건을 보며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박근혜 퇴진 집회 주최 측에 직접 연락해 공연을 자청했다. ⓒ<뉴스 M> 경소영

부모님에게 특별한 정치적 사연이 있다고 들었다. 지난 집회에서 부모님 이야기를 살짝 했던 것을 기억한다. 

부모님 두 분 다 영어 교사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속했다. 89년 강원도 태백에서 일할 때, 태백지부 초창기 멤버였다. 조합원이면서 태백 지부장이었다. 태백 지역에서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 세 명이 해직되었는데, 그중 두 명이 우리 부모님이다. 

부모님 해직 이후, 힘든 생활이 시작됐다. 전교조 지부에서 걷는 회비로 도움을 받고, 부모님은 개인 과외를 조금씩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다행히 5년의 해직 기간을 지내고 복직했다.

부모님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정치’라는 것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해직되었을 때는 많이 어려서 힘든 것을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흘러 자라면서 부모님이 직면했던 문제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어린 나이여서 일상이 평화롭다고 느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 해직당한 상황을 두고 부모님은 ‘우린 잘살고 있다. 뭔가 잘못을 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했다.

부모님이 해직된 상태에서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살던 지역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데, 그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도깨비(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교사를 지칭)의 딸이 학교에 들어온다고 하니 비상에 걸린 것이다.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 ‘나를 어떤 교사가 맡을 것인가’를 두고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결국 나는 1, 2, 3학년 모두 학년 주임 교사가 담임하는 반에 배정됐다. 전학을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웃기지만 웃지 못할 에피소드다. 

전교조 활동가인 부모님에게 교육받고 자라오다가 유럽으로 유학을 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그리고 유럽에서 경험한 교육은 어떠했는지 미국이나 한국과 비교를 한다면 어떤가.

부모님은 자라면서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교육을 잘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점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동생과 나에게는 예술을 접할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부모님은 나의 음악적 재능을 미리 알고 최대한 살려주고 싶어 했다. 외국에서 자유롭게 공부해보지 않겠냐고 먼저 제안한 것도 부모님이다. 그래서 도전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4년간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다.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있다. 한국에서 받아온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 있다가 유럽 학교에 가니 완전히 달랐다. ‘넌 이거 해, 저거 해’라고 지시받은 대로 공부 잘 해왔는데, 유럽에는 그런 지침이 없었다. 아무 것도 주지 않더라. 스스로 선생님에게 가서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질문하러 가야하는데, 정작 나는 내가 무엇을 알고 싶은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송이야, 너는 무엇을 하고 싶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매우 힘들었다.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깨우쳐서 결과를 얻어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 음악을 많이 들으면서 내가 어떤 소리, 음악을 좋아하는지 찾는 과정을 거쳤다. 사실 유학 가기 전에 찾았어야 했는데, 그저 나는 나의 음악적 재능만을 믿고 간 거다. ‘어떤 음악을 하고 싶다’라는 고민을 한 것이 아니라 주입식 음악 수업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전송이 씨는 유학을 가서,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음악을 찾는데만 1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뉴스 M> 경소영

엄청난 자신과의 싸움 끝에 결국 1년 뒤,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서 선생님에게 가져갔다. 그랬더니 처음으로 ‘정말 좋다’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음악 공부는 시작되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음악을 찾는 과정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재즈’를 알게 되었고, 클래식 작곡에서 재즈 보컬로 전향했다.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음악을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클래식 공부도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었다. 지금 재즈를 하면서 도움이 많이 된다.  

8년간 유럽에서 공부를 마치고 재즈의 고향 미국으로 건너와서 버클리 음대에 갔다. 유럽보다 미국은 학비가 엄청나게 비싸다. 다행히 장학금을 받게 되어 경제적인 부담은 줄었다. 학업 분위기도 굉장히 다르다. 유럽 학교는 오로지 학생 중심이다. 학생 수도 50명 내외로 매우 적어, 인간 중심적인 교육이 가능하다.

반면, 버클리는 학생이 5천 명이다. 사람보다는 돈 중심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버클 리가 매우 좋은 학교이지만, 학생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부담이 크다. 내가 발로 뛰어야 교수와의 관계도 맺을 수 있다. 그래야 그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존재를 알 수 있고, 참여도 가능해진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고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유럽에서는 자기 PR(홍보)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미국에서는 자기 PR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생각도 새롭게 들 것 같다. 외국인으로서 트럼프 정부에 대한 걱정도 있을 듯한데 어떤가.

요즘 음악 하는 사람 사이에 ‘남묘호렌게쿄(창가학회)’라는 종교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재즈 뮤지션 중에 ‘허비 핸콕’이라는 유명인이 있다. 허비 핸콕이 하버드에서 6번의 강연을 했는데, 그중 한 강연이 그 종교에 관한 것이었다. 친구를 따라 남묘호렌게쿄 모임에 한 번 가보았다. 경전을 외우고 기도를 하는 것까지는 다른 종교와 비슷했다. 그런데 특이한 건 영상으로 그 종교의 신도가 된 사람의 간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간증의 핵심은 ‘이 종교를 믿어서 자신은 미국에 오게 된 것이고 곧 구원을 받았다’라는 것이다. 

사실 인도, 멕시코 등에서 건너온 히스패닉 계는 미국에서도 낮은 임금을 받는 일을 주로 하며 힘들게 사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라도 미국에 정착한 것이 잘된 일이라는 착각을 심어주고 있었다. 종교뿐 아니라 각종 화려한 광고판만 보더라도 척박한 미국의 현실은 가린 채 반짝반짝한 이미지만 부각하고 있다.

한편, 트럼프 정부의 문제는 트럼프라는 인물이 하는 모든 말이 일반화된다는 것이다. 그가 한 장애인 차별, 인종 차별, 여성 비하 등 발언들로 인해 그런 차별들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처음 당선되었을 때 미국 곳곳에서 유색 인종에 대한 폭행이 일어났다. ‘이래도 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트럼프의 존재 자체가 이른바 ‘차별에 대한 합법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무서운 점이다. 

그의 음악 이야기는 2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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