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밤에 들은 고해성사
섣달 그믐밤에 들은 고해성사
  • 이태후
  • 승인 2007.03.07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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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망, 이웃에게 목사로 세움 받는 것

▲ 내가 사는 동네에 아시안들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를 상인으로 알았다가 나중에 목사인 줄 알고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이태후)
“여기서 가게를 하십니까?” 우리 동네에 처음 이사해서 아직 모든 것이 낯설었을 때, 아마도 내가 훨씬 더 낯설었던 동네 사람들이 내게 묻던 말이다. 보는 사람마다 그렇게 물어서, 이 동네에서 동양 사람에 대한 평판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 살지는 않지만, 많은 동양인들이 남들이 꺼리는 험한 동네에 들어가서 Corner Store나 Take-Out 음식점 등을 운영한다. 우리 동네에도 한국 분들이 운영하는 가게가 절반 정도 된다. 그러니 나를 본 이웃들이 내가 이 근처에 가게를 가지고 있어서 동네를 어슬렁거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 다음에는 “템플대학교 학생이니?” 하고 묻는다. 내가 사는 집에서 여덟 블럭 떨어진 곳에 템플대학이 있으니 그들로서는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다시 아니라고 대답하면 동네 사람들은 상당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가게를 하는 것도 아니고, 템플 대학생도 아닌데, Chinese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동양인은 모두 'Chinese'다) 가 이 동네에 사는 이유가 뭘까?’

뭘하는 사람이냐고 다시 물을 때 내가 목사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목사님이 왜 이 동네에 삽니까?” 묻는다.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흑인 교회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동네에는 교회가 많다. 큰 길을 따라 걷노라면 돌로 지은 웅장한 교회당이 한두 블럭 사이로 늘어서 있고, 골목길에도 주택을 개조해서 모이는 교회들이 흔하게 보인다. 그렇게 교회가 많은데, 이 동네에 사는 목사님은 거의 없다. 대부분 우리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에 살면서 일이 있을 때만 동네에 들어온다.

우리 동네에 살다가 '좋은 동네'로 이사 간 목사님이 있는데, 설교 시간에 이사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이전에 이 동네에 살 때에는 악한 영에게 짓눌려 지내는 것 같았는데, 교외로 이사 간 후 얼마나 편하고 자유로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안전한 곳으로 가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빈민가에서 교외로 이사간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면, 버려진 채 무너져내리는 집, 빈터에 나뒹구는 쓰레기, 빈곤과 폭력, 알코올과 마약으로 얼룩진 'Bad Land'에서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는 내 이웃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인가?

60-70년대 횃불처럼 불타올랐던 흑인 민권운동이 사그러들면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모든 이들이 풍성한 삶을 누리는 공동체의 회복을 외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선지자적 설교도 그 맥이 끊기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건강과 부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소시민적 기복신앙이 대신하게 되었다.

▲ 주일이 되면 먼 곳에서 좋은 차를 타고 우리 동네 교회로 오는 흑인들이 많다. 이 동네를 빠져나가 다른 '좋은' 곳에서 살고 있는 그들은 마치 어둠의 세상에서 광명의 세상으로 탈출에 성공한 것인 양한다. (이태후)
주일이면 우리 동네에 있는 큰 교회들은 좋은 차를 타고 잘 차려입은 흑인들로 붐빈다. 어떤 교회에는 주차난이 일어날 정도로 교인들이 몰리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우리 동네 이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빈민가를 벗어나 '좋은 동네'로 이사 간, 외지인들이다. 할머니가 다니시던 교회라서, 부모님이 다니시던 교회라서, 어려서 자란 교회라서, 주일마다 차를 타고 오지만, 그들이 찾아오는 빈민가는 그들이 지금 누리는 축복을 상기시키는 어두운 과거일 뿐, 그 이상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내 이웃들에게 이런 교회는 '당신들을 위한 복음'을 외칠 뿐,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당신들을 위한 건물'일 뿐이다.

그런데 동양인 목사인 내가 이 동네에 산다니, 동네 사람들은 당연히 내게 호기심과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 일 년은 시험 기간이었다. 이웃들은 조심스럽게 나를 지켜보며 일정한 거리를 지켰다. 눈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지만, 별 대화는 없었다. 하긴 외부 사람이 들어와서 자신들이 덕을 본 일이 없으니, 경계할 수밖에.

내게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내게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지나가면서, 문틈으로, 이삼 층의 창문 뒤에서, 이웃들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골목에 널린 쓰레기를 치우거나 눈을 치우면 그 다음 날 누군가가 치사를 하곤 해선 나를 놀라게 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사실인즉 누군가가 창너머로 내다보았고, 그 사람을 통해 입소문이 퍼진 거였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나는 좋은 이웃이 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목사가 되기 전에, 내 이웃들이 먼저 나를 그들의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에게 목사로 다가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내 이웃들에 의해 목사로 세움 받는 것이 내 소망이었다.

▲ 쓰레기가 곳곳에 나뒹구는 곳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쓰레기처럼 내팽개친 채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도 목사인 내게 찾아와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던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까. (이태후)
2003년 12월 31일, 처음으로 내 이웃과 의미있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날 교회에서 송구영신예배를 마치고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집으로 오게 되었다. 차를 세우고 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걸어오는데, 같은 블럭에 사는 제임스가 인사를 했다.

“Happy new year!” 나도 인사를 하고는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방문하고 오는 길이라고 대답을 하더니, 내게 잠깐 얘기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보통 우리 동네에서 이웃들이 잠깐 얘기를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돈을 달라는 뜻이다. 내가 이 동네에 들어오면서 세운 규칙 중 하나가 이웃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 것이어서,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는 그의 얘기를 듣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제임스는 갑자기 자기 아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여자 친구가 있지만, 사실은 헤어진 부인이 있는데, 알콜 중독으로 문제가 여러 번 있었고, 결국 그로 인해 헤어지게 되었노라고. 연말이 되니 아내가 그립고, 헤어진 아내가 불쌍하다며, 섣달 그믐의 추운 밤, 제임스는 어두운 골목에서 삼십 분이 넘게 내게 자신의 불행한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이.

그동안 인사 정도만 하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무엇이 제임스의 마음을 열게 했을까. 아마도 자기 친구들에게 얘기를 했다가 "그런 마누라는 두들겨 패지 무슨 동정이냐"는 핀잔만 들었을 터였다. 마음속에 묻어두고 혼자 아파하다가 연말연시가 되어 아내가 더 그리웠을 테고, 자기 신세가 더 처량하게 느껴지던 가운데 적어도 목사인 나만큼은 자기 형편을 조금은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직도 나는 왜 제임스가 그날 밤 내게 자기 인생 역정을 고백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섣달 그믐, 자정이 가까운 늦은 시각에 집앞에서 그와 마주치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한다. 그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얘기를 다 털어놓고는 후련한 표정으로 나를 껴안는 제임스에게,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겠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사십대 중반이 지난 그의 지친 어깨를 감싸안고 그의 버거운 신세를 함께 아파하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주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간, 제임스와 함께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제임스의 눈물과 상처, 아픈 기억들을 주님께 가져옵니다. 아내를 위해 눈물 흘리고, 병원에 계신 아버님을 위해 마음 아파하는 제임스를 기억하여 주소서. 성실하게,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제임스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의 아픈 상처들이 저무는 해와 함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하시고, 새해에는 주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이 그의 삶에 햇살처럼 충만하게 하소서.

헤어진 아내를 기억하시어 그녀의 삶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하소서. 알콜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구하셔서 이제는 술 대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소서. 병중에 계신 제임스의 아버님에게도 함께 하셔서 치유의 손길로 그의 연약한 육신을 어루만지소서. 주님, 이 밤에 제임스에게 임하셔서 그의 마음에 세상이 알 수 없는 주님의 평안이, 샘솟는 기쁨이 가득하게 하소서.”

연말연시, 아무도 초대하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제임스. 헤어진 아내를 그리워하며, 깨어진 사랑의 상처에 괴로워하는 기막힌 신세. 그런 제임스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큰 은혜였다.

2003년의 마지막 날, 나는 내 이웃 제임스에게 친구가, 이웃이, 목사가 될 수 있었다. 계획하지 않은 섬김의 기회. 아니, 계획할 수 없었던,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의 시간. 그렇게 2003년이 저물었다.

* 실제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 이 글에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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