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페허의 대통령
트럼프, 페허의 대통령
  • 조동호
  • 승인 2017.02.08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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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담이 사라진 평화적 정권교체

2017년 1월 20일 정오 도날드 존 트럼프가 미합중국의 제 4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거의 아무도 생각할 수 없던 일이 현실화된 것이다. 전국 득표수에서 트럼트는 힐러리에게 무려 280만표나 뒤졌다. 그러나 미합중국 특유의 간접선거 제도는 트럼프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트럼프는 펜실베니아, 위스콘신, 미시건, 세 개의 경합주에서 겨우 이겼는데, 세 주를 대 합한  득표차는 겨우 77,744표였다. 이처럼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선거제도를 고치자는 이야기가 또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튼 트럼프는 미국의 현행법에 따라 당당하게 대통령이 된 것이다. 러시아와 연방수사국장의 대선개입 의혹에 대해서 지금도 국정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지난 20일 네 명의 전직 대통령들과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정권교체”는 공식화되었다. 구랍 11월 선거결과가 나온 직후 오바마 대통령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트럼트 당선자측에 “순조롭고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약속했고 그 후 작별연설에서도 “평화로운 정권교체는 민주주의의 표징”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동시에 오바마는 “민주주의를 그저 주어진 것으로나 여기면 민주주의는 반드시 위험에 처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모두가 “민주주의 제도를 재건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뼈있는 경고를 겸한 부탁을 했다. 나가는 대통령 오바마는 들어오는 대통령 트럼프에게 차기정권의 성공을 빈다는 덕담을 하는대신, 미합중국의 이상과 원칙을 새삼스럽게 상기시켜야 했던 것이다.

정치권은 국민의 적?

트럼프 정부의 출현은 트럼프 자신의 말처럼 단순히 여야의 자리바꿈이 아니다. 트럼프 정부의 등장이 곤혹스러운 것은 단지 민주당만이 아니다. 대통령과 손발을 맞춰야 하는 공화당은 바로 그 때문에 더욱 곤혹스럽게 되었다. 트럼프는 워싱턴정가의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다. 당내 경선도 대선도 그는, 자신이 아웃사이더임을 내세워서 이겼다. “그 늪에 고인 물을 빼버리자! (drain the swamp!)”고 그는 지지자들에게 호소했다. 늪의 고인 물처럼 썩은 워싱턴 정치권을 싹 물갈이하겠다는 것이다. 늪에 고인 썩은 물은 민주당만이 아니다. 공화당도 썩은 물이다.   

지난 20일 대통령 취임연설에서도 트럼프는 이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오늘의 취임식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는 한 정권에서 다른 정권으로, 혹은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정권을 이양하는 것이 아니라 워싱턴 디씨에서 권력을 빼앗아 국민 여러분들께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취임연설은, 선거과정에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나라의 공동목표를 향해 초당적으로 협력하자는 치유와 단합의 메시지를, 아무리 그것이 공허해보여도,  담기마련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다수표를 얻고도 패배한 힐러리 후보와 그 지지자들을 헤아리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력하자는 인사치레도 건너뛰었다.  취임선서를 하고 공식적으로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아웃사이더로, 켐페인에 나선 싸움꾼이었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권 전체를 청산대상으로 삼는다. 기성정치권 전체가 그의 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도 오랫동안 이 나라의 수도에 둥지튼 소수의 무리들이 정부의 혜택을 독차지하고 국민들이 그 짐을 졌습니다. 워싱턴은 영화를 누렸지만 국민은 그 부을 나누어갖지 못했습니다. 정치가들이 치부하는 동안 일자리는 사라지고 공장은 문닫았습니다. 기성정치권은 이 나라의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고 자신만 보호했습니다. 그들의 승리는 여러분의 승리가 아니었고 그들의 성공은 여러분의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이 나라의 수도에서 즐기는 동안 이 땅의 곳곳에서 고생하며 사는 가족들에겐 기쁨이 없었습니다.”

트럼프가 보기에, 대다수 미국인들의 현실은, “살육과 파괴 (carnage)”가 자행되고 있는 현장이다. “도시의 한 가운데서 빈곤의 족쇄에 갖힌 엄마와 아이들, 나라 전체에 무덤돌처럼 널려있는 녹슨 공장들, 돈은 넘쳐나지만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전혀 없는 교육 시스템, 숱한 생명을 앗아가고, 꽃피워보지 못한 이 나라의 숱한 재능을 강도질해간 범죄, 갱, 그리고 마약” 등을 나열한 후, 그는 “이러한 미국의 살육과 파괴는 바로 여기서, 바로 지금부터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율, 임금상승율, 실업율, 범죄 발생율 등 객관적 지표는, 이런저런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미국인들의 삶이 대체로 나아지고 더 안전해졌음을 보여준다. 물론 버려진 옛공업지대 저학력 백인 노령층의 상실감을 끌어안지 못하고 “한심한 족속 (the deplorable)”으로 치부해버린 것은, 트럼프의 노골적 인종폄하 발언 못지 않은, 민주당쪽의 패착이었다. 그들의 분노가 단지 인종주의나 여성폄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 중 과거에 오마바를 연거푸 찍었던 이들이 적지 않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렇기는 하지만, 트럼프의 현실 인식은 우스꽝스러울만큼 과장되고 단순화된 것이다. 후보 시절에는 지지자들을 끌어내기 위해서 과장과 단순화가 필요할지 모르나, 미국 사회 전체를 정말 “살육과 파괴”의 현장이라고 전제하고 정책을 편다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잘 작동하고 있는 정책마저 우격다짐으로 폐기해버리거나 잘 가다듬으면 나아질 정책을 도리어 개악해버리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예컨대 오바마 건강보험은, 만든 사람들도 인정하듯, 개선의 여지가 많지만 “완벽한 실패”와는 거리가 멀고, 미국의 공립학교가 돈은 펑펑 쓰면서 아이들은 멍청이로 만드는 수준은 아닌 것이다. 건강보험의 경우, 오바마 보험의 좋은 점을 살리고 결함을 보완하거나, 아예 새로 만들어 캐나다식 전국민 단일보험으로 가거나 연방공무원 건강보험 제도을 전국민에게 확대하는 과감한 방안이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해법이 없다. 공화당은 벌써 6년 동안 건강보험이라기보다는, 401K처럼 세금 면제 저축겸 투자인 의료비 저축계좌의 전면 확대 방안을 연구해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아이디어 단계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자기 의료비는 자기가 부담한다는 미국식 보수주의의 자기부담원칙 (영국이나 북구의 보수주의와도 또 다르다)으로는 만성환자, 중환자, 그리고 빈곤층의 의료비를 감당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병든 사람들에게는 생사의 문제인 의료비 문제의 해법은, 병든 사람과 아직 병 안든 사람, 이미 늙은 이들과 앞으로 늙을 이, 즉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의료비를 분담하는 사회적 연대의 제도화말고 달리 없는 것이다.     

트럼프식 포퓰리즘의 늪

취임연설에서 트럼프는 그의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는 카터, 클린턴, 오바마, 부시 등 역대 대통령과 상하원의원과 각료 들을 싸잡아서, 제잇속만 챙기고 국민은 팽개친 부패세력으로 규정한 셈이다. 놀랍게도 그는 취임연설에서 건국정신이나 노예해방, 민권운동 등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적 성취를 상기시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링컨이나 레이건 같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역사니 전통 따위는 그에게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제 미국이 “전무후무한 하나의 역사적 운동”을 시작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정치권 전체를 싸잡아 불신하고 직접 국민과 함께 가겠다는 태도를 사회과학자들은 “포퓰리즘 (populism)”이라고 부른다. 트럼프가 선언한 것은 보수주의가 아니라 포퓰리즘이다.  기성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할 때 포퓰리즘은 번성한다. 정당과 의회는 “국민의 이름으로” 펼치는 정책의 훼방꾼, 아니면 들러리에 불과하다. 법률적 규범, 관행, 절차도 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작”에 불과한 것으로 의심받는다. “국민의 의지를 직접 대행한다”는  지도자의 비전만이 중요하다. 이처럼 인류의 오랜 경험에서 얻은 지혜의 산물인 민주적 규범과 절차를 무시하고 독불장군으로 나아가는 포퓰리즘은 불행한 결말로 끝나기 마련이다.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든지 “국민과 결혼했다”든지 하며 정당과 의회를 무시하던 지도자가 부패의 늪을 정화하기는커녕 스스로 부패의 늪으로 국민의 지탄받아 권좌에서 끌어내려지는 사례는 요즘의 대한민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물론 정치권에 대한 정당한 분노와 불신에서 나온 “포퓰리즘”이 민의를 진실되게 대변하는, 진짜 정치개혁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다. 버니 샌더스 돌풍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경제구조개혁과 대의제도개혁을 미국 민주주의의 재건이라는 하나의 과제의 두 축로 제시했다. 민주당 경선과정과 대선이 민의를 최대한 반영하는 방식으로 치러졌다면 미국 중산층과 노동계층의 분노는 샌더스식 포퓰리즘으로 나아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트럼프의 “국민에게 권력을 되돌려준다”는 구호에는, 과거 트럼프의 이름을 딴 가짜 대학교 같은 냉소적 속임수의 냄새로 물씬 풍긴다. 그 자신의 삶만 보아도 그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혹은 약자를 위해서 자기것을 희생한 흔적은 없다. 시공업자에게 줄 돈을 떼어먹고 카지노 파산비용을 세금납부자에게 전가했다. 트럼프는 억만장자들을 경제관련 직책에 지명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성공한 사업가가 경제운용도 잘 할 것이라고 말한다. 트럼프가 과연 성공한 사업가인지도 불분명하지만, 이른바 “성공한” 기업가가 국가경제도 잘 운영한다는 생각은, 골목싸움 잘하니 전쟁도 잘하겠다는 생각만큼 어리석다. 재무부 장관직에 지명된 므너친은 “주택 차압 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은행가이고 노동부 장관에 지명한 패스트푸드 업자 푸즈더는 최저임금인상이나 오버타임 지급 확대같은 노동자 권익신장에 반대해온 사람이다.  이런 정책, 그리고 메디케이드 축소, 각종 보조금 감축 등의 정책들은 “도시 한 가운데서 빈곤의 족쇄에 갇힌 엄마와 아이들”을 더욱 빈곤의 수렁으로, 그리하여 결국 범죄, 갱, 마약의 수렁으로 밀어넣을 것이다.

미국 먼저!

트럼프는 미래 비전으로 “미국 먼저 (America first)”를 제시했다. “이 날부터 오로지 미국 먼저가 될 것입니다. 미국 먼저”라고 그는 목청을 높였다. 무역, 외교에서 미국은 그 동안 밑지는 장사만 해왔다고 그는 말한다.  

“수십년 동안 우리는 미국의 산업을 희생하여 다른 나라의 산업을 부강하게 하고, 다른 나라의 군대는 지원하면서 우리 군대는 아주 애석할 정도로 고갈시켰습니다. 우리 나라 국경은 지키려하지 않으면서 다른 나라 국경만 방어했습니다. 해외 기간설비 건설에는 몇 조씩 쓰면서 미국 기간설비는 돌보지 않아 낙후하게 되었습니다.우리는 다른 나라를 부유하게 했지만, 우리 나라의 부와 힘과 자신감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늘 그렇듯이 트럼프는 여기서도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미국의 제조업 부문 고용이 최근 20년 동안 28%나 축소되었다. 티셔츠, 장난감 등 저가제품 생산이 대거 해외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조업은 가스 터빈, 비행기 같은 고가제품 생산에 주력하고 있다. 물론 이 분야에서도 자동화된 생산기술로 노동력 수요를 확 줄인 결과 제조업 고용율은 계속 하락했다. 그러나 제조업 부문 생산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세계화, 자유무역, 자동화로 희생된 것은 “미국의 산업”이 아니라 실업의 위협 앞에 갈수록 악화되는 노동조건을 감수해야만 하는 노동자들과 그런 노동조건을 감수해야할 “복”마저도 없는 실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다. 다른 나라 제조업 생산이 늘어나고 업자들이 상당히 부유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노동 때문이지 미국의 산업을 희생했기 때문은 아니다.

미국의 군사비 지출은 바로 세계 전체의 37%로, 바로 하위 일곱 나라의 군사비 지출 총액보다 더 크다. 또, 가령, 한국군이나 일본의 자위대를 미군과 얼마나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미국이 다른 나라의 군대를 지원했는지 거꾸로 다른 나라 군대의 지원을 받았는지도 불분명하다. 미국 정치인들은 미국의 군사지원 혹은 동맹을 “미국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미국의 이익”의 경계선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있는 지리적 국경만이 아니다. 

세계화는 글로벌 상품사슬(global commodity chain)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상호의존성이다. 하나의 국가가 막거나 끊어내기에는 너무 크고 복잡하다. 한 곳이 절단되면 전체가 망가진다. 이런 글로벌 상호의존체제 구축을 주도한 나라가 다름아닌 미국이다.  미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이미 이 사슬 속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다. 트럼프의 사업도 가정생활도 이것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 먼저”를 내세운 경제적 보호주의와 군사적 고립주의는 오늘의 현실적 조건에서 가능할까? 정부의 강력한 의지 아래 몇몇 공장을 국내에 유치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윤추구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럴 기업은 없다. 수입품에 대한 관세부과는 당장 미국 소비자들의 반발을 살 것이다.

“미국 먼저!”는 지금 서구세계 곳곳에서 강화되고 있는 민족주의 물결의 일부이다. 영국 국민들은 국민투표에서 유럽단일시장을 떠나기로 결정했고 그리스 국민들은 유럽단일 통화를 포기하고 그리스 통화로 돌아가려 하다가 유럽중앙은행의 위협 아래 무릎 꿇었다. 스페인, 포르트갈, 프랑스, 덴마크 등에서도 민족주의 정당이 약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19세기의 민족주의의 귀환이라기보다는 초국적기업이 주도한 세계화에 대한 소외계층의 반발이다. 브렉시트 결정도 트럼프 당선도 결코 “압승”은 아니었다. 브렉시트에 반발한 스코트랜드는 영국연방에서 탈퇴하여 유럽단일시장에 다스 들어갈 기세이다. 트럼트 지지자는 결코  다수가 아니었음도 유념해야 한다. 대기업 중심의 세계화가 낳은 양국화의 해법은 민족주의, 보수주의, 고립주의가 아니라 “세계화의 민주화” 같은 것일 터이다.

트럼프는 약속을 지킬까?

아마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많다. 거짓말은 그의 버릇이다. 자기 취임식에 역사상 최대의 인원이 왔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것은 하나의 최근 사례에 불과하다. 그는 거짓말이 탄로나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폭로한 사람을 “엉터리 기자” “엉터리 뉴스”라고 트위터로 혹은 기자회견 석상에서 비난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 털끗만큼이라도 부정적으로 말하면 결코 용서하지 않고 즉각 반격한다. 다 큰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러한 어린애같은 반응은 심리분석이 필요하다.   

트럼프의 말은 믿기 어렵다. 그 자신도 자기 말을 정말 믿는지 의심스럽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시치미떼기 일쑤다. 그것은 “거래의 기술”일까? 사업에서는 사실, 진실, 신의 따위보다 많이 남기는 것이 최고의 기준이니 그런 거짓말이나 말바꾸기는 질끈 눈감아 줄수 있는 것일까? 트럼프 지지자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정치인치고 거짓말 안 하고 말바꾸기 안 하는 사람 있냐? 어쨋든 트럼프는 성공한 사업가, 억만장자요, 티브이 스타이고 드디어 대통령까지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그들은 반문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자신을 얼마나 멋지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든말든, 그의 지지자들이 그를 얼마나 위대한 사업의 귀재, 거래의 달인이라고 믿고 싶어하든 현실은 현실이다. 그러한 믿음이 현실에서 멀고 망상에 가까울수록 참담한 결과에 이를 가능성은 높다. 한국에서 이명박, 박근혜에 대한 믿음, 혹은 망상이 어떤 참상을 낳고 있는지를 보라. 결단코, 믿음만으로는 현실을 복된 방향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작전을 염두에 둔 지휘관이 현장을 꼼꼼하게 점검하듯, 냉철한 현실인식과 흔들림 없는 믿음이 하나로 될 때만 제대로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럴 경우조차도 “성공”은 보장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뜻있는 실패, 부분적 성공도 “완벽한 성공” 못지 않게 값진 역사의 유산이 된다.

트럼프의 취임연설에서 빠진 말이 또 있다. “이 막중한 책무 앞에 한없는 부족함을 느낀다 (I am humbled)”는 말. 어떻게 벽을 만들 것이냐, 어떻게 비용을 멕시코 정부에게 부담케 하겠느냐는 질문에 트럼프는 구체적 방안을 내놓는대신 “내가 한다”고 대답했다. 무엇이든 내가 하면 다 된다는 식이다. 외부 현실에 대한 망상과 자아에 대한 망상은 동전의 양면이다.

트럼프 대통령직 수행의 최대 걸림돌은 트럼프 자신일듯싶다. 대다수 국민과 민주 공화 양당의 국회의원들이 그의 망상을 공유할리 없다. 그의 충동적 발언, 거짓말과 변덕은 공화당 주도의 정책 추진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트럼프의 참모들은, 선거과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실언을 해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이다. 국방장관에 임명된 매티스 장군처럼 상식을 가진 각료도 있지만 그의 상식과 트럼프의 비상식이 충돌하게 될지, 충돌하면 상식이 비상식을 “해고 (you are fired!)”하게 될지 비상식이 상식을 해고하게 될지 모르나, 이무튼 전반적으로 비상식적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공익과 사익의 충돌 가능성도 트럼프 정부 앞에 깔려있는 지뢰밭이다. 공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 지위나 정보로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법률고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대통령과 사업가의 차이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크든 작든 자신의 자산을 깜깜이 위탁기구 (blind trust)에 맡긴 후에서야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헌법상의 의무는 아니지만 부패 가능성을 처음부터 제거하여 국정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이므로 다들 그렇게 했다. 트럼프는 세금보고 공개도 않했지만 이것도 하지 않았다. 두 아들에게 자산 운용을 일임하고 자신은 손을 떼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말로 하는 약속에 불과하다. 게다가 사위 쿠쉬너를 대통령 최고참모직에 임명했다. 취임초 지지율이 역대 최하인 대통령이 이 이익충돌 시비의 지뢰밭을 무사히 건너가면서 부실한 현실인식에 공약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도 가장 어려운 곡예일 터이다. 물론 그가 이토록 힘든 곡예를 수행함으로써 국민을 감탄케 할지 대통령직을 트럼프 사업확장과 브랜드 가치 제고의 수단으로 만들려다, 국민들과 공화 민주 양당에게 버림받아  도중하차하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미국과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민주주의 회복 혹은 재발명의 펠요성을 깨닫게 했다. 그가 취임한 바로 다음 날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세계 곧곧에서 민주주의, 여성 인권, 이민자 권리, 그리고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선을 이루기 위해 악도 사용하는 하늘의 섭리일까.   

조동호 박사 / 퀸즈칼리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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