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화가에서 막노동까지 16인 기독교 대표 후손들
북한 화가에서 막노동까지 16인 기독교 대표 후손들
  • 김기대
  • 승인 2017.03.0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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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흐르는 '저주'는 없어야

친일파의 후손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역사의 '저주'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상으로부터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영예만 물려받았지 빈한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실이 그냥 시대의 '아이러니' 정도로만 이해되는 사회는 '저주 받은 사회'다. 3.1 운동 98주년, 33인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16명의 기독교 대표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기독교 대표 16인 중 이승훈(1864~1930) 선생은 좌장 격이었다. 오산학교를 세운 그는 함석헌과 같은 걸출한 제자를 배출했다. 이승훈의 5대손 이기대씨는 2009년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마포구 서교동에서 12개 테이블이 놓인 66㎡(20평)짜리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식당에서 한 달 150만~200만원을 벌어 빠듯하게 살면서도, 남강 이승훈을 기념하는 행사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박희도 (1889~1951) 목사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에는 기독교 운동을 꾸준히 해왔지만 결국 일제강점기 말 친일행위를 하다가 1948년 반민특위에 의하여 친일파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료 행정직으로 일하다가 미국에 이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희도 목사의 나이를 고려할 때 아들도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고 나머지 후손들에 대한 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다.

33인 중 가장 장수한 이갑성(1889~1981)은 정통성이 부족한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는데 특히 박정희는 이갑성을 최고로 대우했다. 하지만 이갑성에 대한 의혹은 아직도 시비 중에 있다. 일본 밀정설, 창씨개명을 한 점등이 그의 과거를 의심케 한다.

반대로 이런 점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고생을 겪지 않았다.  아들 이용희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의 창설에 관여한 정치학자이면서 미술사학에 조예가 깊었다. 1997년 별세 전까지 국토 통일원 장관, 아주대학교 총장, 세종연구소 이사장을 지냈다. 이용희의 아들 이재명은 대우기전 사장,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했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비례대표 전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되었지만 1998년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의원 영입에 의해 한나라당에서 새정치국민회의로 당적을 변경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양지로만 다닌 셈이다.

오화영(1880~1960) 목사는 해방 후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이로 인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될 때까지 유족은 연좌제에 따라 상당히 고초를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인지 유족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자녀들에게 남긴 잠언 27장의 내용을 비단에 옮긴 '인생의 지침'이라는 유일한 유품도 먼 친척에 의해 보관되다가 지난 2009년 항일운동 자료를 수집하던 심정섭씨에 의해 공개되었을 뿐이다. 

최성모(1874~1937) 목사는 3.1운동으로 2년형을 선고 받고 출옥 후 만주지역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증손자인 최선일씨는 뉴저지 거주 교민으로 지난 2008년 미주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증조부가 묻힌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에 있는 선산 7만여평도 전두환 대통령 당시 강제 토지 수용됐고 증조부 묘소는 예비군 훈련장 안쪽에 방치돼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이필주(1869~1942)목사는 출옥 후 목회에 전념하다가 병사했다. 손자인 이현기씨는 민족대표 33인 유족회 회장을 맡았었다. 

김창준(1889~1956) 목사는 1946년 좌익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을 맡았고 1948년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을 지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미군과 UN군의 전쟁 범죄를 해외에서 폭로했고,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까지 지낸 뒤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때문에 2005년에 와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김창준은 옥중에서 만일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자손을 낳게 되면 전부 조국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출감 후 6남매를 두게 되었는데 모두 조선의 朝 자를 항렬로 하 여 이름을 지었다. 예컨대 장녀는 조선의 빛이 되라는 뜻 에서 광조 (光朝)라 지었고, 2녀는 조선을 사랑으로 화하라는 뜻 에서 인조(仁 朝)라 지었으며, 3녀는 조선을 정의의 나라로 화하라는 뜻 에서 의조 (義朝)라 지었고, 아들은 조선을 일으키는 건국의 남아가 되라는 뜻 에서 기조(起朝)라 지었으며, 4녀는 조선을 영광스럽게 하라는 뜻 에 서 영조(榮朝)라 지었고, 5녀는 조선을 드러내라는 뜻 에서 현조(顯 朝)라 지었다.  한편 그에게 손자 둘이 있었는데 장손의 이름은 우정(宇政)이라 지 었고 차손의 이름은 우영(宇榮)이라고 지었다. 우정(宇政)의 뜻은 조선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나의 조국을 사랑하면서 이웃(隣)의 조국도 사랑하고 만국을 봉사하여 달라는 의미 였다. 우영(宇榮)의 뜻은 우 주만민을 일체로 봉사하여 조선인으로서 우주의 영광이 되라는 뜻 이 었다. (김창준 회고록에서)

이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김목사였지만 그 후손들 역시 남쪽에 남아 있었다면 2005년까지 침묵 속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신석구(1875~1950) 목사는 해방 후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다가 1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한국 전쟁 당시 총살당했다. 이덕주가 쓴  ‘신석구 연구’에는 맏손자 신성균의 회고가 아래와 같이 실려있다.

“본래 결혼예정일은 5월 10일로 잡았는데 그날이 마침 남한에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일이었어요. 북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소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날짜를 5월 20일로 연기했지요. 결혼식은 장인목사님께서 시무하시던 평양 유성리교회에서 송정근 목사님 주례로 거행되었다. 그날 진남포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평양으로 올라갔는데 평양에 다 와서 버스가 고장이 나서 모두 늦게 되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트럭을 타고 늦게서야 식장에 도착했어요. 평양에 들어가면서 검문을 받았는데 함께 가신 현병찬 목사님께서 군인들을 설득해 통과한 기억이 납니다.”

신석구 목사는 그날 맏손자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가족 일보다 더 시급했던 ‘교회 일’이 있었거나, 아니면 정보 당국에서 시국 관계를 빌미로 그의 ‘평양행’을 금지시켰는지도 모른다고 이덕주는 추정한다. 회고의 주인공 신성균은 75살의 나이로  대구지역에서 장로로 활동하던 지난 2001년의 기록이 언론에서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록이다.

박동완(1885~1941)목사는 출옥 후 1930년대 하와이로 망명했다. 박동완 목사의 손자 박재상씨는 정신과 전문의로 서울에서 개업중이며 손녀는 2006년까지 포틀랜드에 거주했던 기록이 있다.  

신홍식(1872~1937) 목사의 후손들은 막노동판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손 중 가장 독특한 인물은 길선주(1869~1935) 목사의 아들 길진섭 화백이다. 길선주 목사는 1919년 3·1운동 직후 붙잡혀 1920년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 받기까지 1년7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다. 당시 길 목사는 지방에서 목회를 인도하다가 3·1 독립선언문 낭독 행사식장인 서울로 향했으나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행사가 끝난 뒤에야 도착했다. 길 목사는 재판에서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받았고,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과 달리  포상이 보류되다가 2009년에 와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길진섭은 일본 도쿄미술학교 유학시절 1932년 일제가 주관한다는 이유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을 거부, 화가 김용준 등과 '목일회'를 결성했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반발해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탈퇴한 이들과 함께 조선조형예술동맹을 조직했다.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길진섭은 '또다시 조국진군의 길에 오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1955), '종달새가 운다'(1957), '심령목장에서'(1954) 등을 그렸다. 1960년대에는 당시 천리마운동에 맞춰, '전쟁이 끝난 강선땅에서'(1961), '청산리를 지도하시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1965), '작전임무를 주시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동지'(1968) 등을 그렸다. 북한에서 길진섭은 "당의 주체적 문화사상과 문예방침에 맞추어 사상 예술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여 조선 미술 발전에 이바지한" 화가로 칭송받고 있다.  

길진섭, 심령 목장에서(1955)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 근본주의자인 길선주 목사의 아들치고는 상당히 독특한 행보다. 그가 남긴 그림에도 아버지의 초상화는 없고 어머니 초상화만 있는 것으로 보아 신앙 또는 이념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이 깊었을 가능성이 크다. 

 

길진섭이 그린 길선주 목사 아내 신선행의 초상화

그 밖의 33인 대표 중 기독교계 인사로는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친일로 완전히 변절했던 정춘수가 있다.

현재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사실상 보상에서 완전히 배제된 셈이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보상 내용을 담은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 유족의 범위를 손자·손녀까지로 제한해 후손들에 대한 예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6인 대표의 후손들은 다른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 비해서는 가난 보다는 이념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김창준과 오화영은 월북 납북 사실 때문에 오랫동안 보상에서 제외되었었다. 한국 기독교와 미국의 관계 때문에 후손들 중에는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럼에도 친일파의 후손들과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은 극명하게 대립된다.  '저주'같은 현실이 극복되지 않는 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한낱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자료의 수집은 취재보다는 기존의 언론 보도 자료나 도서 등을 참고 할 수 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자료들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그리고 이명박 정부 초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독특하다. 후손들이 점점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에 비추어 볼 때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정부의 관심 또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라는 생각이다. 정부의 무관심은 언론과 시민사회, 교계의 무관심으로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한국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약산 김원봉의 후손들 중 남은 이들이 4.19 당시 명예회복에 나섰다가 5.16으로 다시 고초를 겪게 되었던 역사가 반복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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