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을 따르다
삶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을 따르다
  • 서상희
  • 승인 2017.03.16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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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강한가족의료원 원장의 삶과 행복
강병철 원장이 자신의 삶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소도시의 변두리 마을. 한 소년이 몸져누워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교대로 아이의 똥오줌을 받아낸다. 아버지는 가정 경제의 풀 수 없는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 6학년의 이 소년은 거동조차 할 수 없어 학교도 빠진 채 자리에 누워 석 달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이 소년에게 공감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당신이 이 소년이라면, 시골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마을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부재 속에 집안의 그 누구도 병원에 데려갈 생각조차 못 한 채, 어쩔 수 없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강병철 원장(강한가족의료원)은 당시를 회고한다.

“연탄 수레를 타고 마을에서 용하다는 침놓는 사람에게 갔어요. 수레가 흔들려 무척 아팠던 기억이 3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아프기 전에 주일학교에 다녔었는데, 아프니까 더 하나님께 의지하게 됐어요.”

1971년생인 강 박사가 중학생이었던 85년에 이르러서야 마을의 큰 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됐을 정도로 낙후됐던 이 지역에서 그나마 깨어있던 사람은 교회 목사와 전도사였다. 이들의 권유로 병원에 가게 된 소년은 3개월간 누워만 있어 관절이 다 닳았고 설사 나아도 다리를 절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할머니와 어머니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어머니는 집안을 세우고자 미국으로 떠난 남편에게 아들의 변고를 알릴 수 없었다.

“참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아프다는 사실을 모르셨는데도, 전화를 연달아 하셔서 정말 별일 없는지 자꾸 물으셨어요. 아버지 꿈에 제 영정사진이 계속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 중고등부 수련회(강병철 원장 제공)

소년은 굳은 결심을 한다. 기독교에 귀의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우선 집안의 어른이신 할머니께 자신의 결심을 밝히고, 할머니의 의향을 물었다. 무속 신앙을 신봉했던 할머니는 소년의 권유에 수십 년간 보관해왔던 무속 신앙 관련 자료를 모두 아궁이에 집어넣고 태웠다.

“염주 돌리시는 것이 보기 싫어 그만하고 교회 가자고, 이제 하나님을 믿자고 했더니, 할머니께서 ‘그럼, 내일 목사님 불러오라.’고 하셨어요. 아직도 그렇지만 집안 어른들이 제 말을 잘 들어주셨어요.”

그 과정에서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3개월의 시련은 소년과 그의 가족에게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암울했지만 만화책을 보며 나름 그 시간을 즐기기도 했던 강 박사와 가족에게 이 시기는 가족의 큰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가족사를 살펴보자. 그의 고향은 전라남도 구례이다. 해방 정국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좌우익이 서로 우위를 장악하려다 애꿎은 마을 사람들만 피해를 본 지역 가운데 한 곳이다.

할아버지는 잡혀서 고문당하고 투옥됐다. 할머니와 가족은 도망치다시피 전주시의 외곽지역으로 이사했다. 동네 구성원은 토벌을 피해 올라온 구례 마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전북에 거주하면서도 고향인 구례 사람답게 사투리 억양이 강했다. 할아버지도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나 한국전쟁 당시 군대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차근차근 재봉사 과정을 밟으셨다. 남의 밑에서 열심히 배워 양복점을 차렸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기성복이 맞춤복을 앞지르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아버지는 빚을 청산하고 살길을 모색하고자 도미해, 맨해튼 봉제 공장에 다녔다. 불법 체류 6년(이민법은 형사가 아니라 민사이므로 불법이라는 용어가 적당하지 않지만, 그대로 사용한다). 영주권을 받자마자 가족을 초청했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청소년기를 지내서, 아버지가 고생하셨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결혼하고 보니, 아버지에게 더 고맙고 애틋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한국에 가족을 두고 미국에 온 혼자 사는 남자 중에 가족을 버린 사람이 많은데, 아버지는 그 많던 빚을 다 갚으시고 혼자서……. 정말 성실하신 분이세요. 덕분에 우리 가족은 잘살았지요.”
중학교  졸업 사진(강병철 원장 제공)

소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삶의 중심에 교회가 자리 잡았다. 집 담장 밖이 바로 교회였다. 소년의 집은 작았고 공부방이 없었다. 담임 목사는 소년에게 공부방으로 교회 사택을 제공했다. 소년은 교회 사택에서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친구들과 놀고, 먹고, 자고, 공부하고, 말 그대로 잘 살았다. 중학생 때부터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한 그에게 교회는 전부였다.

“아프면 보통의 경우 하나님을 찾게 되고, 낫게 해주면 이거 하겠다, 저거 하겠다, 약속을 남발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고, 신학교에 가려고 마음먹기도 했지요.”

그의 결심에 반대를 한 건 담임 목사였다. 전주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그에게 담임 목사는 일반 대학교 철학과를 권했다. 종교학을 공부하고서 신학대학원에 가라고 제안했다.

강병철 원장은  몸져누웠던 초등 6학년이 삶의 결정적 시기라고 생각한다 

연세대학교 철학과 89학번. 시골서 올라온 그에게 대학은 문화 충격의 연속이었다. 급변하는 정치 상황은 그를 고민에 빠뜨렸다. 교회 안에서 살아온 그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 가입했지만 학생 운동에 관한 호기심을 지을 수 없었다.

“학생 운동을 하지는 않고, 대학 1년 내내 고민만 했어요. 같은 과 출신 총학생회장이 구속돼, 총학생회에서 시험 거부 투쟁을 했습니다. 이때 세 부류가 존재했는데, 거부투쟁 하던 운동권, 저처럼 중간에서 고민만 하던 측, 마지막으로 공부 열심히 하던 애들이지요.

시험 거부에 관심 없던 대여섯 명이 교실에 들어가 시험을 보는 거예요. 예의주시하며 모여 있던 저 같은 애들이 흔들려서, 공부도 안 하고 시험을 봤어요. 당연히 성적은 엉망이었고. 일주일 후에 시험 거부 투쟁에 참여했던 학생들에게 똑같은 문제지로 재시험의 기회가 주어졌지요.

결국, 왔다 갔다 했던 저 같은 애들만 시험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성적표에 C와 D로 도배가 돼 있었어요.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했더니, 결과가 안 좋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그와 할머니는 먼 친척이 살고 있던 오류동에 정착했고, 어머니와 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뉴저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에 와서 비록 목사는 할 수 없더라도 의사가 돼서 선교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고등학교에서 문과였던 그가 이과 과목을 다시 이수해 의대 진학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대학 1년을 마치고 가족이 있는 뉴저지에 온 이유 중 하나였다.

뉴저지의 여러 대학 가운데 한 곳으로 편입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대학 1학년 성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다행히 연대와 자매결연 관계였던 스토니 브룩에서 입학을 허가했다.

“의대에 가려고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했어요. 살아야 하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의사가 되어 남미에서 의료 선교 활동을 하겠다는 비전이 있었으니까요.

신학과 철학 분야를 좋아하고 더구나 남미 선교에 관심이 많아서, 남미에 가고 싶어서, 남미 역사 등을 공부하다가 자연스럽게 해방신학을 접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발간한 보수적이지만 학술적인 잡지를 비롯해 안병무 선생님의 책을 섭렵했어요.

민중·해방신학 관련 서적과 남미 역사서를 읽고 나서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단체에 가입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을 지원하는 뉴욕 단체인 엘살바도르 민중과 함께하는 연대 위원회(Committee in Solidarity with the people of El Salvador/이하 시스피스(CISPES)에 찾아간 이유입니다.”

우리문화찾기회의 토론회 모습(강병철 원장 제공)

그는 1년 동안 바쁘게 생활했다. 주 중에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고, 주말 낮에는 맨해튼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도와드린 후, 밤에는 시스피스에 가서 전단을 붙이고, 선거 모니터하고, 컴퓨터 나르고, 영어가 능숙하지 않으니 주로 토론을 듣는, 그런 삶을 살았다. 이 생활은 엘살바도르의 총선이 끝나면서 막을 내렸다.

그는 스토니 브룩을 졸업한 1.5세들이 정체성을 찾기 위해 결성한 우리문화찾기회에 가입, 활동했고, NYIT 의대를 마쳤다. 스토니 브룩의 한 학습 팀에서 만난 한성민 씨와 98년도에 결혼,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아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저는 기피 인물 입니다. 집안의 경찰관 역할을 하고 있어요. 아내는 착한 사람이고. 물론 아이들과 함께 카약 등 야외 스포츠를 자주 하고 재미있게 놀아주기 때문에 아이들이 좋아합니다.”

강병철 원장

그는 미국에 온 이후로 정신없이 살았다. 의학 공부를 하면서 세상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몰두해 진보적인 활동을 하며, 어렸을 적 꿈이었던 선교사를 포기할 정도로.

“한동안 신앙생활도 안 하고 살다가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또다시 하나님에게 귀의하게 됐어요. 아이에게 어떤 부모가 되고, 어떤 걸 물려 줘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신앙을 찾게 되고, 삶이 힘들면 하나님을 찾게 되고…….”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삶이 힘들 때, 기도하면 하나님이 답을 주시냐고. 그는 우문에 현답으로 응했다.

“답을 주진 않지만, 힘을 주십니다. 제 경우에 상황이 내 맘대로 안 될 때가 가장 힘이 든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이를 가지려고 할 때와 레지던트 시절이 가장 힘들었고, 힘드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더군요.

또 나 혼자 있다, 손을 쓸 방도가 없다, 는 느낌이 들 때도 힘들잖아요. 비록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으시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힘이 내게로 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스스로 좌파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레이블 붙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고 속에 뿌리박혀 있는 이분법적인 사고, 선악이나 좌우를 너무 쉽게 나누는 것이 안타까워요.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좌·우파로 나누고,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고, 진영 논리에 빠지는 편 가르기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정의하는 인간 강병철이 궁금해졌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굉장히 학구적이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지식인이다. 그의 삶의 두 연결고리는 정치와 신학이다. 그런 그가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때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프면서 손을 놓았던 태권도를 1년 전에 다시 시작해 친구들과 보내는 행복한 시간이 줄어들어 아쉽기도 하다.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당연히 초등학교 6학년, 아팠을 때. 이것이 삶의 기로에 선 순간에 저를 결정지은 사건이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거나 결정하기 전 언제나 그 당시를 떠올립니다.”

강병철 원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강병철 박사는 인생 이모작의 꿈을 꾸고 있다. 자녀들이 모두 대학에 진학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가에 관해 행복한 고민 중이다. 교회사를 비롯한 신학 공부를 할 것인지, 오랫동안 꿈꿔왔던 의료 선교를 할 것인지 생각 중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가 살아오면서 이루고 싶었던 것은 공동체의 삶이다. 이웃집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던 시골 마을의 친밀감을, 어릴 적 교회에서 받은 은혜를, 교인들의 사랑을, 어떻게 하면 다시 회복해서 이웃과 함께 공유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아주 행복해요. 미국에서 그런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은 교회이고, 따라서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싶고, 그러한 터전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이름 모를 병을 앓던 변방의 한 소년이 30여 년의 세월을 감싸 안으며, 여기 뉴욕에 우리와 함께 있다. 아프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이 몸에 밴 정의로운 삶,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온 강병철 원장.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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