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 - 그 찬란한 130일의 기록
촛불집회 - 그 찬란한 130일의 기록
  • 이욱종
  • 승인 2017.03.2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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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시간에서 '박근혜 퇴진'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벌써 봄이다. 들에는 이른 들꽃들이 봉우리를 짓고 있지만 나는 아직 지난겨울 강추위에 거리를 헤매던 추위가 몸에 서려있다. 박근혜는 탄핵되어 오늘 검찰에 섰다. 
시민들이 무척이나 비싼 값을 치러낸 결과다. 

광화문 촛불집회, 무려 20차에 걸친 130일이 넘는 대장정 이었다. 나는 주말을 반납하고 토요일 오후가 되면 매주 빠지지 않고 1600만의 시민 중 하나가 되기 위해 늘 가장 적절한 시간에 지하철로 향했다. 12월정도 부터는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몇 번째 칸에 타야하는지, 5호선을 갈아타는 군자역 어느 방향이 가까운 지, 광화문역을 내려 2번 출구로 나와 군중들을 헤치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눈감고도 갈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일상이 되었다.  ​
이쯤 되니 종로3가역에서 광화문역 까지 지하철 승객수와 나오는 출구에 늘어선 사람들의 수를 보면 대충 오늘 백만이 넘겠구나, 오십만 정도 되겠구나 하는 계산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니, 광화문 집회의 숨은 고수가 다 되었다. 지난 3월 10일, 박근혜가 탄핵된 복된 금요일, 헌재와 청와대, 광화문을 오가며 촛불집회를 참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 10시 반의 거리에서 혼자 인사불성이 되어 울고 웃었다. 드디어 대한민국 시민들이 박정희 독재성장의 신화를 극복해낸 놀라운 역사적 증표를 보는 것 같아 감격스러웠다. 
지난 20차 광화문 촛불집회를 되새겨 보니, 1차 촛불집회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 원래는 정기적인 민중총궐기집회가 10월29일 청계광장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JTBC 태블릿 PC 보도가 있던 10월 24일 이후,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고 난 뒤의 집회이지만 얼마나 모일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시청역을 나오는 출구 계단에서 부터 어디선가 지상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장엄하게 땅을 울린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성서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인 많은 물소리 같다고 할까, 청계광장은 이미 엄청난 인파로 진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축을 울리는 시민들의 함성은 마치 지상에서 발생한 우레와 천둥소리 그 자체였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민중총궐기가 준비한 마이크와 스피커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서 집행부의 사회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다만 출근길 지옥철보다 더 많은 인파의 물결은 서로의 몸을 가누기 초차 힘든 밀집도 에서 어디론가 이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통로 모두 마치 장마철에 물이 넘쳐 생기는 지류들과 같이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아무도 리드하는 사람도 없이 시민들이 서로서로 함성을 만들어 하나가 되어 외치고 있었다. “박근혜는 내려와라!” 나는 그 어디에서도 이처럼 엄중하고 준엄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청계광장에 모인 3-5만의 시민들의 인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민중총궐기 집행부는 발언 등의 시간을 끝내고 서둘러 명동거리를 돌아 광화문으로 행진을 하는 것으로 집회를 마무리 했다. 지금이야 두 시간 본 집회이후 청와대와 헌재, 황교안 대행이 업무를 보고 있는 청사로 나누어 행진 이동하고 광화문에 다시 모이는 약 4시간의 집회 일정이 잘 짜여 있고 대형스크린들과 음향시스템으로 모든 집회 참여자가 잘 듣고 볼 수 있는 포맷이 되어 있다. 첫 집회 당시에는 집회를 준비하는 집행부도 형성이 되어 있지 않았고 “이게 나라냐,” “하야송” 과 같은 집회의 단골 행진가도 만들어 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은 광화문 촛불 집회는 분노한 시민들이 너무나 멋지게 큰 그림을 그려 준 것이다. 누구도 영웅적으로 주도하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일어난 시민들의 함성은 마치 20차를 쉬지 않고 달려와 역사를 변혁할만한 동력이 충분히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첫 집회를 끝내고 뒤풀이로 모인 광화문 골목 호프집들 곳곳에서 서로 “박근혜 퇴진!” 을 외치며 시민들은 잔을 부딪쳤고 다음날 예배에서도 기도하던 중 자꾸 “박근혜는 물러나라!” 는 함성이 계속 나의 머릿속에 맴돌 정도로 이날의 함성은 가슴깊이 각인되어 있다. 

첫 백만을 넘어선 4차 촛불집회의 긴장감도 생각이 난다. 촛불집회를 비하하던 김진태 의원을 비웃듯이 전국에서 올라온 시민들은 130만을 넘어섰고 세종대왕상부터 덕수궁 대한문까지 시민들은 길바닥에 앉아 3 시간 넘는 집회를 달리고 있었다. 집행부는 발 빠르게 지금까지 민중총궐기 집회의 무겁고 결의에 찬 남성들의 목소리와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노조 투쟁가들과 민중가수들보다 여성들과 학생들의 평범한 목소리로 집회를 진행했고 가볍고 재미있지만 시사를 날카롭게 풍자하는 인디가수들을 무대에 세워 많은 호응을 받았다. 

12월 중순 까지는 보통 대학로에서 416연대나 노동당등 여러 단체에서 서로 조를 나누어 오후 2시정도부터 행진을 시작하여 광화문에 4시정도에 모여 본 집회를 진행하고 7시부터 거리를 행진하다가 청와대 근처 폴리스 라인 앞에서 밤12시 까지 집회를 진행했었다. 겨울 강추위 속에 진눈개비와 눈보라 속에 시민들은 보통 밤 10시에서 12시까지 길바닥에 주저앉아 난장을 해야 했고 경찰의 차벽에 편의점이나 식료품을 구입하기가 어려워 배고프고 목이마른 어려움들을 참고 늦은 시간까지 견뎌야 했다. 한번은 항상 집회에 같이 참여한 명동 향린교회 식구들과 김밥을 맞추어서 먹었는데 50박스중 20박스정도가 남았다. 내가 김밥박스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본 한 시민이 너무 배가 고픈데 하나만 달라고 해서 나누어주니 갑자기 여기저기서 김밥을 달라고 모여들 정도로 다들 허기진 상태에서 무려 8시간, 9시간 집회를 강추위 속에서 버텨내고 있었던 것이다. 

집회 초기에는 끝장집회 하자고 해서 밤12시 이후에도 광화문에서 밤샘 자유발언이 이어졌고 곳곳에 노숙인 처럼 쓰러져 자는 시민들도 꽤 있었고 밤에 수많은 인파들이 택시를 잡는 바람에 한 시간 동안 걸어서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가면서 한 번도 택시를 잡아본 적이 없던 적도 많았고 박원순 시장의 도움으로 심야버스를 새벽 2시, 3시에 타면 마치 출근길 만원 버스처럼 서있기 조차 힘든 초만원 버스의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버스 탑승객들 거의 모두가 집회 플래카드와 세월호 리본을 달고 있었고 심지어 그 시간에 어린이들도 꽤 있었다. 시민들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 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촛불집회는 끊임없이 진화했다. 초기에 평화집회가 과연 혁명을 이룰 수 있을까 하여 차벽을 끊어내자는 폭력집회의 요구도 있었고 비폭력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130만, 그 후 전국 260만 까지 모인 촛불은 전국을 강타하고 정치판도 흔들어 국회에서 탄핵안이 바로 가결되었고 시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져만 갔다. 국회가 탄핵안을 가결시키기 전날, 서울에는 진눈개비가 몰아쳤다. 밤늦은 시각까지 국회앞에서 진눈개비를 맞으며 기독인들의 촛불교회에 참석하고 시민만장쓰기에 참석했다. 그때부터 한구석에서 태극기를 들고 “아 대한민국,” 이선희 버전의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 을 시끄럽게 틀며 통성기도조로 탄핵반대 집회를 주도하는 태극기 부대가 조그만 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광화문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시청역 주변이나 교보문고 앞에서 현수막 하나 걸고 2-30명이 모여 마이크 잡고 떠들다가 촛불집회에 자연스럽게 해체되던 집단들이었다. 

2017년 새해가 되고 박근혜가 친박 새누리와 함께 반격을 준비하면서 태극기 집회는 갑자기 2-3만이 전국에서 모이는 이상한 집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씨가 저작권을 문제 삼자 어느덧 이들은 논산 훈련소에서 배식을 할 때 나오던 군가를 시끄럽게 틀기 시작했고 태극기도 모자라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나오는 추태를 서슴지 않고 벌이기 시작했다. 태극기 집회에 가보니 자신들은 100만이니 300만이 모였다고 하는데 정작 시청광장에는 평소 2-3만이 모이는 민중총궐기집회보다 사람의 밀집도가 크게 떨어진다. 집회를 할 때 참가자들에게 ‘앞으로 나란히 좌우 뒤로 나란히’ 를 시켜서 간격을 벌린다고 하던데 딱 그말이 맞아 떨어진다. 

구정이 지나고 광화문 촛불집회는 자연스런 포맷을 잘 이어나갔다. 오후 5시부터 본 집회를 시작으로 시민들의 발언과 공연을 이어갔고 7시 반부터 청와대와 헌재 앞으로 행진을 해서 9시경에 광화문에 집결해서 마무리 집회를 했다. 행진을 해서 헌재나 청와대 앞에 가서 트럭에 스피커를 실고 구호를 외치고 자유발언등을 했는데 분노한 시민들이 헌재 앞까지 행진해서 계속 구호를 외치고 분노를 쏟아냈으면 하는데 자유발언이 본 집회부터 계속 이어지니 조금 과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퇴진운동본부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주도하지 않았고 큰 내부분열도 없이 자원자들이 의견을 수렴해 물흐르듯 시민들의 참여를 조직화 해냈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1600만의 엄청난 자발적 참여는 모든 비판들을 자연적으로 포용해버리며 무혈혁명을 이루어냈다. 

개인적으로 향린교회의 ‘청년예수’ 깃발을 들며 참여했는데 약 20여개의 기독인들 단체가 깃발을 들고 빠지지 않고 참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87년 6월 항쟁 때만 하더라도 기독교계는 향린교회 깃발이 유일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이렇게 많은 기독인들의 깃발들이 참여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선배들이 많았다. 들꽃향린교회의 김경호 목사의 본 집회 자유발언도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 사회자가 목사님이 발언하신다고 소개하자 사람들이 싫어하는 표정들이 역력했고 야유도 보내는 사람이 있었는데 알기 쉬운 언어와 명쾌하고 유쾌한 발언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충분했고 마지막에 “기독교에서는 복된 소식을 복음이라고 하는데 박근혜가 구속되었다는 복음이 들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라고 했을 때 시민들이 큰 박수로 호응해주었다. 

갑자기 추워진 11월 11일 목요일 밤에 모였던 신학생총연합 시국기도회도 생각이 난다. 젊은 신학생들의 사회참여가 늘 아쉬웠는데 어디서 왔는지 천여 명의 전국 신학생들이 모여 대한문 앞에서 기도회를 가진 뒤 십자가를 들고 청와대 까지 행진 중 경찰에 막혀서 몸싸움을 하다가 두 명이 연행될 때까지 싸우던 신학생들의 모습은 매우 참신했다.  

광화문 촛불집회 무대에 오른 민간잠수사 황병주씨의 증언도 가장 아프게 기억이 난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수습한 우리들이 왜 참사의 책임자들 보다 더 죄책감에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가 없다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생생하다. 지난 일 년 동안 민간 잠수사 김관홍님이, 물대포에 쓰러지신 백남기 농민이, 그리고 분신공양 하신 정원스님이 떠나가시면서 우리 시민들 마음에 큰 빛을 전해주고 가신 것이다.   

광화문 촛불집회의 가장 큰 성과는 여성들이 주도하는 시민집회를 열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운동권을 연상시키는 투사적이고 남성적인 집회를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지르거나 절규하는 것도 아닌, 부드럽지만 강하고 분명한 여성들의 목소리로 집회를 인도하고 구호를 외치는 것은 시민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바로 이끌어내기 충분했고 매우 지혜로운 결정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여 저녁 7시에 소등하기, 촛불파도타기, 박근혜구속을 상징하는 빨간 한지에 촛불 밝히기, 노란풍선 일제히 날리기, 탄핵을 축하하는 폭죽쇼 등 다양한 아이디어로 재미있는 참여를 이끌어 낸 것도 하나의 성과였다. 장시간의 집회동안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배려했고 아이들과 어른들, 노인들, 학생들이 서로 격려했고, 부산어묵을 팔고 땅콩과자를 파는 상인들과 농담을 주고 받으며 바쁜 사람은 먼저 가고 늦게 올 사람은 늦게 오며 서로 유쾌하게 진행된 촛불집회. 

시민들의 지혜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1600만의 함성은 모든 반대의견과 정치적 노림수를 불식시키고 국정농단의 주역인 박근혜를 파면시켰고 최순실과 청와대 보좌관들과 이재용을 구속시켰다. 물론 적폐청산의 국민적 요구가 실행되려면 앞으로 갈길이 멀다. 지난 토요일, 성주에 내려갔다가 밤1시에 집에 들어가면서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느낌이 든다. 하지만 촛불을 든 시민들이 일궈낸 승리, 헌재 앞에서 서로 얼싸안고 흘린 눈물은 이제 승리를 맛본 거대한 힘으로 세월호 진상규명과 사드배치 철회, 위안부 합의철회, 그리고 나아가 한국사회의 적폐를 청산하는 혁명으로 나아가는 충분한 동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동력에 태극기집회에 동원되는 좀비 같은 기독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깨어 진리에 일어서는 기독인들이 심장 같은 힘으로 보태어 지기를 바란다. 
 
(이욱종 목사는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미국종교사로 박사과정을 마친 후 지난 해 귀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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