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은혜 베푼 그들
특별한 은혜 베푼 그들
  • 신순규
  • 승인 2017.03.25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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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규의 [세상사는 이야기]
신순규 ⓒ

기후가 이상해졌다. 옛날엔 3월 중순쯤이 되면 뒷마당에 쌓여 있던 눈더미들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파란색이 시각을 자극했고, 새 우는 소리에 잠을 깨기도 했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워지고, 깔끔한 이들의 손은 옷장정리와 이부자리 빨래 등으로 바빠졌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추워야 할 시기에 따뜻하고, 봄비가 내려야 할 때 폭설이 오는 이상한 날씨를 자주 경험하게 되었다. 올해도 그랬다. 2월엔 따뜻한 날이 유난히 많았고, 영상 20도가 넘는 날도 며칠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곳에 따라 30㎝에서 60㎝나 되는 눈이 내리는 일이 일어났다. 3월 중순에 폭풍설이 뉴욕·뉴저지 지역을 강타한 것이다.

시각장애인으로 평범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운전을 하지 못하고, 아이들과 공놀이를 해줄 수 없는 등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들이 있지만, 멀쩡한 시력을 갖고도 운전을 안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아내를 위해서, 또 아이들과 같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그런데 폭설이 올 때면 나의 무능력에 속상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혼 후 7년 동안은 뉴욕시 아파트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눈을 치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뉴저지에 이사를 온 후부터는 눈 치우는 일이 우리 몫이 되었다.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적어도 집 주위 인도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하는 법적 책임을 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각장애 때문에 내가 못 하는 것은 운전과 공놀이만이 아니다. 삽으로 눈을 치우는 일도 그중 하나다. 몇 번이나 아내가 나에게 이 스킬을 가르쳐주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눈 덮인 곳에 서 있는 시각장애인은 쉽게 방향 감각을 잃게 된다. 그래서 삽으로 푼 눈을 항상 같은 곳에 던지기가 힘들다. 엉뚱한 쪽으로 눈을 던지다보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옆 사람, 즉 아내에게 더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지난 2월 초 내린 눈은 다행히 돈을 벌기 위해 찾아온 동네 고등학생들이 치워주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온 눈은 너무 양이 많아서 학생들이 치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내와 아이들을 시키기에도 양이 너무 많았다. 나는 결국 기계로 눈 치우는 사업을 하는 톰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좀처럼 답이 오지 않았다.

새벽부터 시간당 5~7㎝의 눈이 내린 지난주 화요일, 아이들은 집에서 '스노 데이'를 즐기고 있었고 나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틈틈이 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후 2시가 되어도 연락을 받지 못하자,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모임 멤버들과 단체문자를 나누면서 '톰과 연락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부탁했다.

그런데 이 단체문자를 보낸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젊은 친구들 세 명이 삽을 들고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차로 20~30분 거리에 사는 친구들이 나의 메시지를 보고 그 먼 길을, 그것도 폭설이 내린 날 운전해서 온 것이다. 그들은 우리 집 주위에 쌓인 눈을 열심히 치워주고 먹을 것, 마실 것도 사양한 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너무 고맙다는 말을 직접 그리고 문자로 했다.

요즘 보기 드문 이 인정 어린 친절에 나는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근처에 사는 이웃도 폭설이 오는 날 이런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자신들 집 주위의 눈을 치우는 것만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집으로 찾아온 그들은 아주 특별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푼 것이다.

다들 정당하게만 서로를 대한다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란 생각을 할 수 있다. 받은 만큼 주고, 남에게 해가 되는 일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은혜(grace)라는 말은 정당이란 말의 의미를 초월한다. 다른 이를 위한 노력을 정당 수준에서 한두 발짝 더 가는 수준까지 한다면 부정이 당연해져버린 이 세상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신순규 시각장애 월가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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