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때 박정희는 무엇을 했을까?
4.3사건 때 박정희는 무엇을 했을까?
  • 김기대
  • 승인 2017.04.04 06:4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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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는 어찌 그리 닮았는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소속 당원 350여 명이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비극적인 4.3 사태가 시작되었다. 사실 한 해 전 3.1절 기념행사에서 기마 경찰의 말에 어린이가 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도민 일부가 경찰서에 가서 항의를 하는 과정에서 경찰측의 발포로 6명이 사망을 했다. 이 때 곪은 양측의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정부 차원에서 대응은 불가피할 터, 그러나 공권력 이외에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 조직이 무소불위의 만행으로 개입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 비극의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사망자는 모두 14,032이었는데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나머지는 원인 불명)인 것을 보면 진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 병력 증파를 결정한다. 이때 제주도 파병을 명령 받은 여수 14연대가 동족 학살을 할 수 없다며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고 10월 19일에 봉기한 사건이 ‘여순반란사건’이다. 

여순사건의 발발에는 북한의 지령도 남로당의 명령도 없었다. 그 지역에는 이미 일제때부터 소규모 독서모임들이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구성원들의 영향이 컸다. 봉기 초기에는 하사관이 중심이었지만 지역주민들의 참여로 봉기는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역사에는 좌익에 의한 학살극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훨씬 더 많았다.  여순사건을 연구해 온 김득중에 따르면 “대한민국 성립 초기 국가 형성과정에서 노골적인 국가 폭력으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주체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임무를 맡은 군대와 경찰이었다.”

 

여순 사건과 박정희

여순사건에서 당시 '반란군' 활동을 하던 박정희의 배신으로 군대 내 좌익 세력이 토벌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는 몇 가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박정희는 사건 발발 바로 다음 날 도착한 토벌군 정보국장 김점곤의 안내를 맡았었고 여순 사건이 끝난  11월 11일에야 체포되었다. 그의 남로당 경력이 문제였던 것이지 실질적으로 여순 사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체포된 뒤 남로당 군사 총책으로 가지고 있던 군내 좌익 명단을 토벌군에 넘겨 주었고 이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되었고 여순사건 진압 당시 보여주었던 박정희의 ‘능력’을 높이 산 군지도부와 미군에 의해 구제되어 출감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는 2년 전인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경상북도 선산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0월 6일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박상희는 이미 경북지역의 명망 있는 좌파 지도자였는데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 박정희가 군대 내에서 대위의 계급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해방공간에서 좌익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사회주의 계열은 해방 후 주요 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등을 제시했고,  여운형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추구했다.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선호도가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 사회주의 70%였다. 해방 후 어떤 국가 수립을 원하느냐는 동아일보 조사에서는 70%가 사회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선호한다고 응답했다.

박정희는 투철한 이념에 따라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이 아니라 박상희의 권고로 당시 대세였던  좌익에 줄을 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중 형이 사망하고 대구 항쟁이 진압되자 자발적으로 좌익의 정보를 빼내 '세작' 을 준비한 것은 아니었을까?  4.3 사건이 발생했고 진압과정에서 정부군의 기세가 등등하자 그는 조금씩 전향의 기회를 엿보았던 것같다. 

여순 사건이 일어나자 반란군에 참여했을 법한 박정희는 천연덕스럽게 정부 편에 섰다가 남로당 명단을 넘긴다. 그가 이전부터 백선엽과 같은 친일 장교들에게 지속적인 정보를 제공해왔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그가 다시 군대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남로당 소속 군인 명단을 넘겨 준 공을 인정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감형의 사유는 될지 몰라도 군대 복귀는 어려운 일이었는데도 백선엽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다시 군대로 돌아왔다가 마침내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 사가들은 모두 백선엽의 도움으로 군대에 복귀했다고 말하지만 백선엽 말처럼 박정희가 도와 달라고 찾아와서 (군대 복귀를)도와 주었다라는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알려진 두 사람의 일본군 장교로서의 친일 행각보다 서로만이 아는 더 깊고 추한 무엇인가가 있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일본이 패망하자 며칠을 걸어 독립군을 찾아갔다는 그의 일화처럼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정치적 변혁기에 양지의 냄새를 맡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형이 참여했던 대구 항쟁과 제주의 4.3, 그리고 여수 순천에서 일어나던 비극의 시간에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양지를 지향하는 것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며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 여수 14연대에 한 때나마 관여했다가 처벌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배신한 사람, 즉 어느 정도 정상이 참작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심정적으로도 14연대의 마음과 조금의 연관성도 없었고 오직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단이 어떻게 자신을 살릴 수 있을까만 궁리하던 인간이었다.

69년이 지난 지금 그의 딸은 자신은 엮였고 아무 것도 몰라서 억울하고, 돈 한푼 받지 않았다며 발뺌을 하면서 그를 위해 충성을 다했던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배신하고 있다. 어찌 그런 모습까지 부녀는 닮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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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2023-02-14 10:07:47
이 글은 거짓말이다.
박정희는 당시 14연대에 양민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
원본은 왜관 구상박물관에 있다. 그리고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으로 1948년 11월11일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배신은 그 이 후의 일이다. 서푼치도 안되는 정보로 기사를 썻다면 기자가 모자라서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알고도 썻다면 심각한 이간질이다,

박회준 2021-03-04 23:37:48
박정희가 “빨갱이”였으며 능력 좋은 박쥐 였군요.
여순항쟁이 사회적으로 부각되지 않을 법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