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기독교는 없다
안티 기독교는 없다
  • 김종희
  • 승인 2008.04.14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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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무시형·반격형·반성형, 안티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기독교를 거부하는 정서가 우리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 거부라기보다는 증오나 저주에 가까운 반응이 지난 아프가니스탄 선교팀 인질 사건 때 나타났다. 보통 ‘안티 기독교’라고 불리는 정서가 계속 퍼지는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세 가지만 꼽아 본다.

▲ 온라인에서 활동하던 안티 기독교 단체들이 오프라인으로 나와서 자신들의 주장을 일반에게 알리고 있다. 숫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놓고 비판할 만큼 개신교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인터넷의 발달이다. 인터넷이 반 기독교 정서의 유통망 역할을 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는 50개 정도의 반 기독교 카페가 있다. 회원 수가 적게는 100명 정도에서 많게는 1만 명까지 된다. 인터넷은 기독교에 대해서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안티 문화’를 퍼뜨리는 도구가 되어 있다. 연예인들이 안티적인 댓글 때문에 자살하는 사건도 목격하는 요즘이다.

온라인이 온라인 안에서만 머물면 그나마 여파는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오프라인으로 번져 가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월드컵 응원 열기, 효순·미선이를 죽인 미군 규탄 집회,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운동 등은 모두 온라인에서 시작해서 오프라인으로 번져간 대표적인 사회적 사건이었다.

반 기독교 정서도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확산되고 있다. 거리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로 자신들의 활동 내용을 알리고 있다.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공개 토론회에 나가서 기독교에 대해 여과 없이 비판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 때는 분당샘물교회 앞에서 시위도 했다. 오프라인 현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으나, 온라인에서의 빠른 확산과 맞물려가고 있다.

▲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듣든지 안 듣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을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찌그러진 표정을 보라. 이들의 표정이 왜 일그러졌을까. 복음 때문일까, 복음을 전하는 자의 태도 때문일까.
절대주의와 권위주의가 낳은 괴물

둘째는 사상적·문화적 변화와 갈등이다. 절대주의에서 근대주의를 거쳐서 상대주의로 넘어 가는 때다. 물론 상대주의는 절대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다. 우리 사회는 군인이 총과 칼과 단일 사상으로 수십 년을 통치했다. 나라도 반 토막, 이데올로기도 반 토막 상태였다.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은 곧 ‘쥐도 새도 모르는 죽음’뿐이었다. 이 문화에 길들여 있는 기성세대가 지금도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상대주의 문화에 익숙한 세대가 빠르게 쳐 올라오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이라고 하는 날카로운 무기를 쥐고 있다. 돈에 환장한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폭력적·선정적·가학적 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았다. 남보다 빨리, 남보다 높이, 남보다 멀리 달려서 성공하라고 내리치는 기성세대의 채찍질에 익숙해져 있다. 공동체 경험도 없어 나밖에 모른다. 이들이 치받고 있다.

이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 사회는 중간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화’ ‘토론’ ‘논쟁’ 등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무참히 깨졌다. 임기 초반에 새파랗게 젊은 검사들이랑 토론하려다가 안팎으로 망신을 당한 것은 절대주의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불량스런 짓을 한 탓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다시 절대주의·권위주의적 통치를 시작하니 대다수가 환호성을 지르며 한나라당에 몰표를 던지는 나라다. 보수 우파가 만든 교과서에 의하면 일제강점기가 근대화의 시기로 평가될 만큼 근대화가 이뤄지지 못한 나라다.

세상도 그렇지만 교회는 특히 절대주의의 화신이다. 교리적 절대주의와 문화적 권위주의가 결합했다. 성서가 일점일획도 틀림없다고 하면 곧 목사의 말도 일점일획 틀림이 없게 된다. 까라면 까야 한다. 그래야 성공한다. 대한민국이 절대주의 문화 속에서 급팽창했듯이 한국 교회도 절대주의 문화 속에서 급팽창했다. 대개는 이걸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쏟아 부어주신 복으로 여긴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러 손대지 않으셔도 이런 판국에서 급팽창하지 못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 예수님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셋째는 부패 때문이다. 절대주의와 권위주의가 결혼하면 괴물이 자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한강을 가만히 놔뒀는데 자기가 알아서 괴물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포름알데히드라는 독극물을 쏟아 부었으니 그걸 먹고 자란 녀석이 괴물이 된 것이다. 우리 교회의 괴물들을 보자.

정치판에서 선교한다면서 이번 총선에 나갔다가 망신당한 개신교 정당이 있다. 그 정당 만든 목사는 빤쓰 목사로 유명하다. 수천 명 목사 부부 앞에서 “빤쓰 벗으라고 했을 때 벗으면 내 교인, 안 벗으면 남. 인감도장 가져오라고 했을 때 가져오면 내 교인, 어디다 쓰려고 하냐고 물으면 남”이라고 말해 안티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근데 빤쓰 목사의 발언이 허튼소리가 아니다. 벗으라면 벗고 내놓으라고 하면 내놓는 교인들, 절대주의와 권위주의에 감염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잘 나가는 대학생 선교단체 중에 이런 곳이 있었다. 이 조직 안에서 연애는 불가하다. 목자님이 점지해주면, 양떼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근데 그걸 순종한다. JMS 같은 사이비가 아니다. 이 단체 회원 숫자가 장난 아니다. 아무도 안 갈 것 같은데, 그곳 숫자가 웬만한 대학생 선교단체를 능가한다. 대학생들이 이 지경이다.

형 김선도 목사가 아들한테 교회를 물려주더니 아우 김홍도 목사도 아들한테 교회를 물려주었다. 형제간의 목회 성공 경쟁이 사촌들로 이어지는 꼴을 천연덕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헌금을 맘대로 쓰고, 교인들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단군상 때려 부수고, 사찰 무너지라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세금 안 내고,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면서 십자가 밑에 바퀴 달고 그걸 짊어지는 쇼를 하고 있다. 도대체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다. 안티들에게 “날 잡아 잡수쇼” 하는 셈이다.

▲ 개신교는 절대주의, 배타주의, 호전주의로 무장되어서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실제 전쟁을 벌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배워야 할 예수의 이중적 모습

이런 안티 기독교인들에 대한 태도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무시형. 안티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태도다. 언젠가 대오각성하고 참회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도하자고 한다. 진짜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지는 모르겠다.

둘째는 반격형. ‘반기련’이라는 안티 기독교 단체가 생기니까 ‘반기련 대응 전략 연구소’라는 단체가 생겼다. 영적 전쟁·사이버 전쟁을 선포한다. 여리고성 돌았던 것처럼 우리도 뱅뱅 돌자고 한다. 정말 돌아버리겠다. 안티들의 댓글을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댓글을 달아서 싸움을 벌인다. 욕하면서 똑같이 배우는 꼴이다.

셋째는 반성형.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이름이 낯설지 않은 풀러신학교 리처드 마우 총장이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의 논리를 강요하지 말고 예수의 삶을 따라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다.

▲ 십자가도 쇼의 소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운동을 하면서, 바퀴 달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 '순교의 각오'로 싸우겠다면서 고작 머리나 박박 밀었던 목사들의 모습과 똑같다. 머리 하나 미는 데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면 승려들이야말로 날마다 순교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설 자리는 어디이며, 꼬인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첫째로, 기독교의 절대성을 양보할 까닭은 없다. 예수님처럼 절대주의자로 보이는 이도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했다. “내가 곧 메시아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누구한테 했는지, 상대방이 누군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구에게 배타적이었고, 누구에게 한없이 관용적이었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과 정반대다.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방식을 거꾸로 해보자.

둘째로, 교회 내 권위주의를 청산해야 한다. 교회의 문화와 제도가 민주적·수평적이어야 한다.

셋째로, 사회적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 하지만 교회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독려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면 고난을 받는다고 했는데, 예수 믿고 잘 살자고 가르친다. 기복주의·물질주의·성공주의의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안티를 박멸하는 비법인가. 아니다. 안티의 존재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정작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티 기독교는 없다’.

* 이 글은 4월에 열린 필그림교회 청년부 테마 수련회 때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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