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되짚어보기] 분단 아픔 욕보이는 '주적' 논란
뉴스되짚어보기] 분단 아픔 욕보이는 '주적' 논란
  • 지유석
  • 승인 2017.04.21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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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대치는 민족의 불행, 후보들 냉철한 역사 인식 아쉽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19일 밤 KBS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향해 북한이 주적이냐고 물었다. 이 같은 질문은 큰 논란으로 이어졌다. ⓒ KBS TV 방송화면 갈무리

"왜 북한을 주적이라고 말을 못 하느냐?"
"국방백서에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돼 있는데, 통수권자가 주적이라고 못하는 게 말이 되느냐?"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후보가 19일 밤 있었던 KBS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던진 질문이다. 이내 '주적'은 '네이버', '다음' 등 검색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네이버의 경우 '주적'은 다음 날인 20일 오후 8시 24분 기준 실시간 검색어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더불어민주당을 제외한 정당들은 공세 수위를 높였다. 특히 보수정당인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이 문 대표를 향해 날을 세우는 모양새다. 바른정당 김무성 선대위원장은 "주적이라는 표현을 제대로 못 하는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도록 해서는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가지게 됐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도 "북한이 주적이라고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한테 국군통수권을 주는 게 맞느냐"고 물었다. 소속당인 자유한국당 역시 논평을 통해 "문재인 후보의 안보관은 불안함을 넘어 두려움에 다다르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도 "국방백서에 (북한은) 주적으로 명시돼 있다. 지금 남북 대치 국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주적"이라고 주장했다.

주적 논란이 의도하는 바는 명백해 보인다. 즉, 이 논란을 안보관으로 확대해 선거판을 진보 대 보수의 대결국면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다.

일단 "국방백서에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돼 있다"는 유승민 후보의 발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는 "현재 주적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핵심은 '주적' 논란을 둘러싼 주장의 진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단과 뒤이은 남북의 대치상황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주적 개념 역시 이 같은 비극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다. 그런데 분단의 비극은 우리 안에서가 아닌 미국 등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정치인들이 이를 선거용 쟁점으로 활용하고 있으니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토론에서 주적 질문을 받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는 "남북관계를 풀어가야 하는 입장에서 '주적' 같은 표현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받았다. 문 후보의 대응은 괜찮았다고 본다. 그런데 문 후보를 비롯해 다른 대선주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이 있다. 제발 다시는 '주적' 운운하며 특정 후보의 안보관을 검증하려는 시도 및 선거를 보수 대 진보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려는 시도를 멈춰달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분단과 남북대치는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이고, 이를 선거 쟁점으로 활용하는 건 한 마디로 몰역사적인 행태다.

한반도 분단, 강대국이 저지른 '실수'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남북이 분단된 역사적 상황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보냈다. 사실 미국은 별반 한반도에 관심이 없었다. 미국의 우선적인 관심은 일본의 전후처리였다. 미국은 이를 위해 2000명에 이르는 민정관을 양성하기도 했다. 한반도는 일본의 패전 이후 항복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미국의 시야에 들어왔다는 게 지배적인 해석이다.

미국은 소련이 만주와 북한 지역을 점령하자 초조해졌다. 만에 하나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면, 일본마저 넘볼 것으로 우려했다. 한반도 분단은 이 과정에서 결정됐다. <워싱턴포스트>지 특파원을 지낸 돈 오버도퍼는 자신의 책 <두 개의 한국>에서 한반도 분단이 결정되는 과정을 이렇게 적었다.

"미국 정부는 자정 무렵 두 명의 젊은 장교를 옆방으로 호출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이어 순식간에 일본으로 진출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한반도에 미국의 점령지를 구획토록 했다. 딘 러스크 대령과 찰스 본스틸 중령은 이 느닷없이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완수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상부의 채근과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두 명의 미군 장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제작한 지도를 참고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38도선을 기준 삼아 미군은 그 이남을 점령하고 소련 군대는 이북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제안했다. 이와 같이 한반도 분단이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순간까지 한국 문제에 정통한 전문가는 단 한 명도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 나라, 한 민족의 운명이 졸속으로 갈린 경우는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주한 미 대사관 문관을 지낸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반도 분단 과정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 시대, 이 세계에서 한반도의 분단만큼 그 연원이 놀랍고 충격적인 사례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분단 당시 당사자들의 의지와 상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 과정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없다. 한반도의 분단은 강대국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의 부산물이다."

불행하게도 남북한의 정부는 외세가 강요한 분단체제를 타파하지 못했다. 특히 남한의 역대 보수 반공정권은 대결 구도를 부추겨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챙겼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은 2017년이다. 더구나 이번 대통령 선거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치러지는 보궐선거다. 박 전 대통령은 세월호, 메르스 등 불리한 쟁점이 불거질 때마다 안보 논리, 진영 논리를 끌어들여 위기를 빠져나갔다. 이런 와중이라면 대선 후보들은 유권자들과 역사 앞에, 특히 분단의 비극이 지속되고 있는 한국 현대사 앞에 겸허한 자세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남북 대치 국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의 안보관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반도 분단에 얽힌 역사를 냉철하게 인식하고, 분단체제를 어떻게든 극복하겠다는 마음이 곧 안보관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주적' 운운하며 특정 후보를 공격하는 현 선거 국면은 분단의 역사를 욕보이는 저급한 행태일 것이다.

대통령 후보들에게 바란다. 뜬금없는 '주적' 논란으로 이 땅의 비극에 소금을 뿌리지 말아 달라. 그보다 분단의 역사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분단체제를 뛰어넘을 현실적 전략과 비전을 제시해 달라. 그 후보에게 소중한 한 표를 던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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