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하지 말라
나에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하지 말라
  • 김원영
  • 승인 2017.04.24 0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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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기

고교 때까지 교회에 다녔다. 열성신자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여호와'라 불리는 기독교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성경도 읽었고 기도는 거의 매일 밤 했다. 내가 바랐던 것은 주로 좋은 성적, 생존(건강), 사랑(연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입증해달라는 요구였다.

신에 대한 관념은 구약에 등장하는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더 범신론적인, 자연과 우주의 법칙 속에 편재하는 절대적 힘에 가까웠다. 반면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바로 그 존재에게 매력과 숭고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죄 없는 자 돌로 쳐라"라고 말할 때, 당대에 형식화된 윤리적 보수성을 돌파하는 그의 혁신성과 용감함이 좋았다. 별 볼일 없는 풍모로 살아가지만 그 모습 그대로 거대한 구약의 질서를 휘젓는 그의 행위와 발언, 사유들은 역시 별 볼일 없는 존재로 태어나 이 세계 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버둥거리던 나에게는  더없이 위대해 보였다. 

대학에 들어온 후에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다. 몇 가지 동기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교회라는 제도와 기독교가 가진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스스로 '간파했다'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의 인문계열 대학생들이 종종 그렇듯이, 철학자 니체의 <도덕의 계보>가 영향을 미쳤다. "한쪽 뺨을 맞고 다른 쪽 뺨을 내미는" 태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라"는 그 정신을 통해 자기 내면에서 고작 도덕적 우월감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 '노예의 도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자의식을 한참 날카롭게 벼려왔던 스무 살 무렵의 장애인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하지만  더욱 핵심적인 이유는, 기독교의 교리나 그에 대한 비판적 철학 때문이 아니라, 주위의 장애인들이 성경을 끌어안고 예배를 드릴 때만 외출하는 모습을 끔찍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교회는 장애인들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거나 수화통역을 제공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다 너를 쓰실 때가 있어서 이렇게 태어나게 한 것이다" 라는 말을 건네는 교인들의 태도가 당시 나에게는 혐오스러웠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는 지극히 위선적이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중증장애인의 휠체어를 밀어주지만, 사랑은 예배가 끝난 후 설거지 봉사를 하고 청년반 스터디를 하면서 꽃피는 법이다. 이 '에로스적' 사랑의 폭발 속에서 장애인들은 그들의 이 '순수한' 성욕에 어떤 숭고함마저 부여한다. 장애인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장애인에게 전도하는 교회 오빠와 누나의 아름다움이란!

나의 인식은 냉소적이며 얼마간 과장에 기초했다는 것을 이제 인정한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방안에 처박혀 사실상 버려진 사람들을 '세상'으로 이끌었다. 한국전쟁 이후 국가의 복지제도가 자리잡기 전 가장 먼저 장애인들을 구휼한 것은 기독교(불교도 마찬가지다)였다.  그럼에도 나는 기독교, 나아가 종교 일반이 신의 '사랑'에 근거하여 장애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정적 입장을 갖고 있다. 세계의 변방에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당신과 내가 신에게 기대지 않고, 무작위적이고 우연적 사건들의 연속인 우주 위에서도 나의 존엄을 선언하고 내 가치와 매력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근본적인 우리 존재의 토대를 찾는 일이 아닌가? 당신과 내가 어떤 질병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수 있지만,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태어났고, 태어났더니 장애인이었다. 그것뿐이다.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인간의 자기성장으로서의 윤리적 삶과, 타인에 대한 의무로서의 도덕적 삶을 통합하는, 그러면서도 절대자인 신에게 기대지 않는 인생의 의미를 구축하고자 두꺼운 책을 썼다. 하지만 그토록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논변으로 글을 쓰던 그조차도, 우리가 한밤중 깨어났을 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그 압도적인 허무 앞에서는,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하며 밤을 지새울 것이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나는 이제 종교에 의지하는 장애인 친구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에게 전도하는 기독교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도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런 방법도 없는 그 허무의 공간에서 자기 존재를 정립하기 위해 발버둥 쳐볼 권리는 있다는 점이다. 그런 발버둥을 쳐볼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들에게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하나님이 다 뜻이 있어서" 너를 '그렇게'(장애인으로) 만들었다며, 장애를 가진 그 사람에게는 '지금 당장'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으로 섣불리 휠체어를 밀어 교회로 데려올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집 밖으로 나온 장애인들이 일단 가야 할 곳은 교회가 아니라 욕망과 투쟁, 비아냥과 칭찬이 섞여있는 이 허무한 '세계'이다. 일단 이곳에 온 후에, 교회나 절로 갈지, 그저 아침이 오기를 기다릴지, 프로작을 먹을지 선택의 시간이 온다. 그때 만약 교회로 향한다면, 환대하면 된다.

필자인 김원영 변호사는 현재 브런치(http://brunch.co.kr)에 글을 연재중이며, "원영의 브런치" (https://brunch.co.kr/@greece7)에서 더 많은 글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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