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권센터(상) - 이민자 권익 옹호와 정치 신장에 앞장서다
민권센터(상) - 이민자 권익 옹호와 정치 신장에 앞장서다
  • 서상희
  • 승인 2017.05.04 0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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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범 선임 컨설턴트 민권센터를 말한다
민권센터는 지난 1884년 설립되어 이민자 권익 옹호와 정치 신장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민자 권익 옹호와 정치 신장을 위해 헌신해온 민권센터. 1984년 설립되었으니, 벌써 33년째 올곧고 줄기차게 한인 사회를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마당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민권센터의 원래 이름은 청년학교였다. 청년 중심의 운동과 조직화에 집중한다는 목표가 담겨있는 이름이었으리라.

오래되고 소중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여 아무런 생각 없이 대하게 된다. 가족이 그렇고, 공기가 그렇다. 민권센터도 마찬가지이다. 늘 그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탓에 공기처럼, 가족처럼, 또는 물처럼, 소중하지만 사람들은 그 가치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민권센터를 취재하기로 한 이유는 여러 이민자 단체들이 이민자 및 난민을 보호하기 위한 ‘난민 보호 도시 24시간 행동’에서 만난 민권센터의 새로운 모습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서 만난, 민권센터 팻말을 들고 서 계신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에서 비롯됐다.

갑자기 기억 속의 청년학교가 떠올랐다. 한적한 주거 공간에 위치한 마당 넓은 집에서 언제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젊음의 활기가 끊이지 않던 마당집의 모습이 20여 년의 세월을 반추하며 생각을 과거로 회귀시켰다.

전화를 걸고 약속 시각을 잡았다. 민권센터에서의 인터뷰는 지난 4월 6일에 이루어졌지만, 거의 한 달을 묵힌 이유는 변명을 보태 설명하자면, 다 세상 탓이다. 정세는 급변하고, 사건·사고는 잦으며, 시의성 있는 기사를 먼저 올렸어야 하니까.

더구나 민권센터는 마치 가족처럼 그 자리에서 기다릴 터이니, 급한 기사 먼저 쓴 다음에 쓰자고 한 것이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 인터뷰에 응하고 기다려준 민권센터 여러분께 미안하고 감사하다.

차주범 선임 컨설턴트

민권센터의 이모저모를 알려준 이는 차주범 씨(선임 컨설턴트)였다. 사실 ‘씨’ 자를 붙이는 것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그를 잘 아는 편이다. 그를 처음 만난 시기는 1990년대 초중반이었고, 그는 갓 뉴욕에 이민 온 20대의 풋풋한 젊은이였다.

집회에서 만났던 어르신들에 관해 물었다.

“60대 중반부터 70대 후반까지의 장년층 30여 명으로 구성된 커뮤니티 모임에 참석하는 어르신들입니다. 세금보고나 시민권 신청 등 사회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이용하기 위해 찾아오셨다가 모임에 결합하신 분들입니다.”

민권센터는 현재 총 3개의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있다. 커뮤니티 모임이 시작된 것은 2009년도쯤이다.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광범위한 계층을 조직화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집회에서 만났던 장년층 모임은 매달 첫 주 목요일에 열린다. 커뮤니티 오가나이저가 주관하는 이 모임은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변화하는 이민정책의 현황에 관해 설명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장년층 모임의 참가자들은 일상적인 집회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차 선임 컨설턴트에 따르면 이들은 1년에 10여 차례씩 집회와 모임 등에 참석한다. 뉴욕시 뿐 아니라 워싱턴 DC와 뉴욕주 올바니에도 간다.

이들 장년층은 뉴욕의 고질적이지만 해결되지 않는 주택 문제에도 관여하고 있다. 렌트비 인상 및 노인 아파트 부족 현상을 다루는 세입자 모임이 그것인데, 장년 모임과 세입자 모임의 구성원은 거의 유사하다. 물론 각각의 모임에만 참석하는 이들도 있다.

민권센터 장년 모임에 참여하는 어르신들이 '난민 보호 도시 24시간 행동' 집회에 참석했다.

드리머들을 위한 모임도 활발하다. 드리머란 어려서 부모를 따라 미국에 와서 자신도 모르게 서류 미비자가 된 청소년을 이른다. (기사-오리지널 드리머(상) 참조) 민권센터가 드리머와 관련을 갖게 된 계기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12년 6월 15일 발표한 서류 미비 청소년 추방유예 프로그램(DACA)에 기인한다.

민권센터는 이들을 위해 신청서 서류를 대행해 주었고, 그 이후로도 갱신 과정을 거치거나 새로 신청하는 이들과 계속 만나면서, 이들을 묶어내는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처음 DACA 신청 당시에 신청자들이 몰려들어 한인봉사센터 강당을 빌려서 신청서 작성을 도왔습니다. 초기 신청자와 갱신하는 이들이 연인원 1,200명입니다. 그러다 보니 DACA를 통해 한인 커뮤니티 그늘에서 조용히 살던 많은 드리머 친구들을 알게 됐습니다. 이들을 의식적으로 조직할 필요성이 발생했지요.”

현재 20여 명의 드리머들이 커뮤니티 모임을 통해 활동하고 있다. DACA를 통해 만난 드리머들 중 일부는 시민 활동가로 활발한 역할을 하고 있다. 민권센터에서도 스탭으로 여러 명이 거쳐 갔고, 지금도 드리머 중 한 명이 커뮤니티 오가나이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30대 초반의 김앤지 씨이다.

“1,200명에게 봉사하고, 그 중에 몇 십 명이 우리 활동에 본격적으로 결합해 민권센터와 이민자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드리머 가운데 한 명이 청소년 프로그램의 오가나이저로 곧 결합할 예정입니다.”

민권센터 사무실 내부. 외부 업무가 많아 전 스태프가 모이는 경우는 드물다.

청년학교였던 시절, 작은 사무실 공간에서 모두가 같은 일을 하고, 모두 모여 회의를 하며 조국과 이민 사회의 앞날과 나아갈 방향에 관해 머리 맞대고 고민했었다.

민권센터의 조직은 커지고 체계화되어, 더 이상 다 함께 같은 일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 편에서는 민권센터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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