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이쁜이에서 장인 영감탱이까지
아홉살 이쁜이에서 장인 영감탱이까지
  • 김기대
  • 승인 2017.05.15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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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선거 결과는 왜 항상 그런가

대구 영천 경찰서에서 1950년 작성한 처형자 명부(국군에 의한 처형)에 따르면 정립분이라는 이름이 있다. 립분은 집에서 부르던 이쁜이의 한자 이름일 것이다. 그는 1950년 7월 10일, 9살의 나이에 ‘10.1 당시 요인 암살 방화 행위’를 한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10.1이라면 1946년 대구 항쟁, 즉 경상북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좌익에 의한 항쟁을 말한다. 이쁜이는 대구 항쟁 당시에 다섯 살이었을 터인데 이 무시무시한 죄목을 뒤집어 쓰고 채 피지도 못한 꽃이 되고 말았다.

한국 전쟁 당시 겁에 질려 탈영해 고향인 영천에 숨어 들었던 오빠 정동택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9살 아이는 다섯 살 때 ‘요인 암살’을 했다고 처형당했다. 정동택 뿐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아내 또 다른 동생들, 그리고 같은 마을의 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처형당했다. 죄목은 한결같이 대구 항쟁 가담자였다는 것이다. 전쟁 중 탈영은 중죄일 수 있다. 그러면 당사자만 처형하면 될 것을 그들은 왜 그렇게 잔인하게 무고한 사람들을 도륙했을까? 대구항쟁의 트라우마는 주민을 모두 잠재적 빨갱이로 보게 만들었다. 특히 영남은 인민군 비점령지역이거나 교전 지역이 많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보도연맹 희생자가 많았다.

주민을 잠재적 빨갱이로 보고 자진 신고를 하게 만들었던 보도연맹, 전쟁 중 국군과 경찰은 비교전지역에서 조차 빨갱이의 씨를 말린다며 아무나 끌여다 죽였다. 대구 항쟁이 눈앞의 인민군보다 더 큰 공포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1946년 10월 1일 발생한 대구 항쟁은 당시 경상북도 인구(대구 포함)의 ¼ 정도가 참여한 대규모 항쟁이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도 구미 선산 지역 저항군을 이끌다가 이때 목숨을 잃었다. 미군에 의해 진압된 이 항쟁의 희생자들도 적지 않지만 한국 전쟁 당시 보도 연맹 사건 등으로 4년만에 다시 불려나가 양민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다.

경북지역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인민위원회 조직이 활성화 되어 있었는데 대구 항쟁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영남의 진보 세력은 ‘절멸’하고 만다.

재판도 없이 평소에 감정이 안 좋은 사람을 그냥 빨갱이로 몰면 처형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이 겪는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감히 권력에게 저항할 생각을 못한채 숨죽여 살 수 밖에 없었다. 

인혁당에만 왜 그리 가혹했나?

하지만 1960년대부터 영남  지역에서는 다시 진보운동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훗날 인민혁명당(인혁당)사건으로 희생된 지역 운동가들이 활동을 전개해 나갈 즈음 시민 조직이 아닌 ‘정치’에서 박정희에게 충격을 줄 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받은 8명, 그들은 거의 3~40대의 지역 운동가들이었다.

​1971년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명이나 다름없던 민주당의 신진욱은 국회의장을 지낸 거물인 이효상을 대구에서 꺾고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자신의 정치적 텃밭으로 여기던 대구에서 그것도 거물이 신예에게 밀리자 박정희는 대구 경북 마저 잃으면 설 곳이 없다는 공포감에 쌓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놀란 박정희는 이듬해인 1972년 유신을 선포하고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획책하며 1974년 인혁당 사건을 조작한다.  인혁당 사건은 1968년의 통혁당 사건에 비한다면 '북한'과 엮을 부분이 훨씬 적은 사건이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통혁당 주모급 김종태와 이문규는 실제로 북한에 다녀왔지만 대법원 판결 하루 만에 사형당한 인혁당의 8명은 북한과의 접촉점도 찾기 어려웠다.

또한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면서 함께 터뜨렸던 민청학련 사건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이철 유인태 등은 모두 감형되었고 수감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혁당에만 왜 그리 가혹했나? 사형당한 인혁당 8명은 모두 영남을 배경으로 한 인사들이었다. 그들의 직업도 평범한 중산층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도원(매일 신문 기자, 경남 창녕),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경남 함안),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경남 의령), 우홍선(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경남 울주),  송상진(양봉업, 경북달성), 여정남(전 경북대 학생회장, 대구, 그는 겨우 31살 이었다), 하재완(건축업, 경남 창녕),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경북 경주)

이들은 모두 영남의 시민 세력이라는 '죄'로 통혁당이나 민청학련보다 더 가혹한 사형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영남 지역의 진보 세력, 투표로 심판하려는 단순한 시민 의식 등은 모두 엄청난 공포에 빠져들게 된다. 1971년 대선에서 호남에서 김대중과 박정희의 득표 비율은 6:4 정도 되었고 영남지역은 그 반대였다. 지역구도가 극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엄청난 부정이 동반된 관건선거였음에도 불구하고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의 득표율차이는 53.2%대 45.2%에 지나지 않았다. 박정희의 멸공 구호에도 불구하고 '빨갱이' 김대중은 전국적으로 골고루 득표했다.

겁에 질린 박정희의 영남 길들이기가 인혁당 사건으로 나타났다. 호남은 김대중만 잡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그를 납치하여 제거하려 했고 형 박상희를 통하여 대구의 풀뿌리 조직을 봐왔던 박정희는 영남의 진보세력을 끝장내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겁에 질린 영남 사람들은 호남을 비하하면서 그들이 박정희의 후원자임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이 대구 항쟁에서부터 인혁당에 이르기까지 무서운 살육극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살아 남는 방법이었다. 

홍준표의 장인 영감탱이

홍준표는 지난 대선 운동 과정에서 장인을 '장인 영감탱이'라고 호칭하고 결혼 후에 자신의 집에 발도 못 들여 놓게 했었다는 말로 여론의 뭇매를 받자 영감탱이는 애칭이라고 발뺌했다. SNS에서도 이 발언에 대한 비난이 줄을 이었다.

이 발언을 한 그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이건 천박해서도 아니고 뒤에 문제가 될 것을 몰라서도 아니었다. 이 발언은 철저하게 계산된 발언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홍준표의 아내는 은행원이었고 전라도 출신이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에게 은행원 따위는 말만 하면 넘어온다는 인식이 그에게 있었다. 전라도 여성이라는 점도 홍준표의 자신감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홍준표에게 전라도 출신의 은행원은 구제의 대상이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시혜를 베풀었는데 전라도 장인이 '감히' 결혼에 반대를 하니 세상의 상하관계를 모르는 '영감탱이'일 수 밖에 없다.

이게 영남의 정서다. 호남을 희생양 삼아 그들을 폄하하고 고립시킴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건 대단한 정신적 상처다.

이번 선거에서 영남 중 대구 경북은 예외 없이 홍준표에게 50% 가까운 표를 몰아 주었다. 대구 경북 지역 일부에서 문재인이 얻은 득표는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얻은 표에도 못 미쳤다.  특히 사드문제로 민감한 김천 성주 지역에서도 홍준표가 앞서자 이 지역을 향한 네티즌들의 비난도 거세게 타올랐다.

​뭐가 문제일까? 말했듯이 그들은 아직도 트라우마로 인한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이번에 영남 지역에서 젊은이들이 문재인에게 많이 투표한 점을 고려하면 2001년 노무현에게 투표했던 당시 젊은이들은 40대가 되어 다시 보수로 돌아섰다는 이야기다. 세대는 바뀌었어도 기억에 새겨진 흉터는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사드 문제는 직접 피해 당사자기이기 때문에 반대하지만 투표는 다르게 할 수 밖에 없다. 괜히 '종북'후보에게 투표함으로써 그들에게 덧붙여질 종북 비난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지역활동가들에 의해 사드는 종북이 아니라 평화의 문제라고 받아들였던 그곳 주민들이었기에 '종북'후보는 배척할 수 밖에 없었다. 사드를 과녁 삼을 수 있는 적의 공격보다 더 두려운 실체는 내부(보수 우파 정당)라는게 보도연맹을 통해 체득된 공포였다. 그런 점에서 선거 때마다 종북을 강조하는 보수 정당의 속내는 북한을 두려워 하라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을 두려워 하라고 세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천 상주를 비롯한 대구 경북의 투표 행태는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이다. 그들은 아직도 두려워 하고 있다. 농촌 지역 주민들의 마음에는 마을마다 있었을 아홉살 이쁜이의 비극이 대를 이어 새겨져 있고 도시 지식인들에게는 인혁당의 공포가 깊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정치나 선거가 아니라 마을 단위의 지역 운동을 재건하는 일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역 활동가들은 명심해야 한다. 권력 주체를 바꾸려는 노력은 지역 주민들의 두려움을 치유한 다음의 일이다.  

(대구 10월 항쟁에 대한 내용은 김상숙 저, '10월 항쟁'(돌베개)을 많은 부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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