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내홍, 당통을 반면교사로 삼으라
진보의 내홍, 당통을 반면교사로 삼으라
  • 김기대
  • 승인 2017.05.1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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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다

문재인 대통령의 출범 이후 진보 진영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심상치 않다. 한겨레 신문과 같은 진보언론은 선거 이전부터 문재인 후보에 대한 호감이 높지 않았던 까닭에 기사의 일점 일획이 문재인 지지자들에 의해 감시 당하고 있다. 이런 공격을 견디다 못한 한겨레 안수찬 기자가 SNS에서  "문 빠 다 덤벼"라고 한 넋두리가 집중 포화를 받았다. 마침내 안기자는 해당 게시물을 삭제하고 신문사 차원의 사과문도 공지됐다.

애초 문제가 된 한겨레 21의 표지 사진이 왜 문제인지 솔직히 필자는 잘 모르겠다. 문재인 하면 떠오르는 약하고 우유부단한 이미지를 상쇄시키기에 좋은 사진이었다. 무겁고 공적인 정면 사진이 아니라는 점도 해석하기에 따라 대중적 이미지를 강조한 의도라고 읽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지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선거전부터 한겨레가 부리던 몽니의 연장선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실제로 문재인에 대한 진보 언론의 논조는 문재인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문재인이 진보의 모든 것을 표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진보 언론의 비판은 수긍할 수 있지만 그 대안 세력으로 안철수를 거론하는 듯한 일부 기자의 논조는 누가 봐도 의아해 할 만 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이후에도 관계가 개선된 것 같지 않다고 느낀 열성 지지자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언론의 기능적 사명을 중시하는 진영과 속칭 '빠'들의 대립구도가 격화되고 있다. 이런 싸움에 조선일보가 기다렸다는 듯이 '점잖게'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분명 진보 진영의 손실이다.  

​사실 이번 싸움은 '문재인'을 둘러 싼 싸움이라기 보다는 이른바 진보 보수를 결정짓는 인자가 다양해졌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어떤 사람의 이념을 진보 보수라고 규정짓기까지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아졌다는 말이다.

동성애, 낙태, 통일(대북인식), 계급(빈부격차), 민주주의의 정의, 결혼과 성, 페미니즘, 언론관에 이르기까지 진보 또는 보수에게 이런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 같은 입장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이다. 메갈리안 논쟁에서 페미니즘을 두고 진보끼리의 생각도 얼마나 다른지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문대통령 바로 옆에 앉았던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자 김종렬 장로는 세습으로 문제가 되는 모 대형 보수 교회의 장로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냈던 임동원 장관도 건강하지 못한 보수교회의 장로다. '리버럴'로 분류되는 문재인 지지자들은 노동문제나 계급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이다. 그렇다고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일단 정권이 바뀌면 세상이 좋아질 터이니 그 때가서 다시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성주에서 홍준표 표가 많이 나왔듯이 성소수자들 중에서도 홍준표를 찍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촛불혁명을 경험하면서 민주주의를 대단한 제도로 '추앙'하고 있지만 지젝, 아감벤 등과 같은 좌파 철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논쟁들은 대상이 '박근혜' 하나에 집중되었던 단순한 싸움의 범주를 넘어섰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따라서 지지자들도 사소한 비판에 세상이 무너진 듯이 반응할 필요 없고 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계몽주의자'들도 구태스러운 계몽을 멈추어야 한다. 진보를 결정짓는 인자가 다양해짐으로서 생겨난 '빠'들의 행태도 엄연한 현상으로 교화의 대상이 아니다.  

두 진영 모두 지금부터 집중해야 할 대상은 문재인이 아니라 '사람'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혁명을 이끌던 당통은 처음에는 공포정치로 개혁을 추진해 나갔으나 뒤늦게 루이 16세의 사면을 요구하는 등의 유화정책을 쓰다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 그가 단두대까지 가는 데에는 로베스피에르의 역할이 컸으나 그 역시 몇 개월 뒤 똑같은 처형을 당했다.

독일의 희곡작가 게오르커 뷔히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민음사에서 번역 출판되어 있다)에서

조르주 자크 당통 (Georges Jacques Danton, 1759~ 1794)

당통은 인간 개체의 본성을 강조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혁명적 이념인 미덕을 강조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멀리한다. 요즘 한국의 정황과 비교하자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당통의 이념을 닮았다. 일단 제도는 차치하고 그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좋다. 싫고 좋음에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냥 본성적으로 그에게 끌리는 것을 어떡하겠는가?  

반면 구좌파라고 할 수 있는 세력들에게는 로베스피에르처럼 아직 이념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재인은 그 '이념'의 실천자로 부족해 보여 뭔가 마음에 안드는데 그것도 모자라 (그들이 보기에) '뭣도 모르는' 열성 지지자들이 덤벼드니(?) 같잖다는 마음에 안수찬 기자처럼 '우리가 살아낸 지난 시절'로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두 축이었던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은 모두 실패했다. 인간 본성은 소중했지만 사람을 혁명에 예속시켰던 당통과 끝까지 이념의 끈을 놓지 못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실패는 이후 정치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립구도라는 점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재인을 둘러싼 진보의 내홍은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이제 문재인 지지자들은 문재인을 그만 바라보고(그만 예속되고) 주변의 다양한 사람을 바라 볼 때다. 촌스런 계몽주의자들 역시 이념의 끈을 놓고 나와 '틀린' 사람을 바라 볼 때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초기 행보는 후한 점수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일단 제도보다는 사람을 우선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식장에서 1980년 5월 17일 태어나던 날 아버지를 잃은 여성을 안아주고, 싸인을 받기 위한 종이를 찾는 아이를 기다려주고, 군대내 성희롱에 저항해온 여성을 보훈처장에 임명하는 등 '사람이 먼저다'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노조의 파업, 성소수자의 외침 등이 문재인을 지키기 위해 배척당하는 상황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사람이 아니라 제도나 특정 계층에 의해서 쏟아질 난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능력이 진정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지지자들과 계몽주의자들이 보여줄 행보도 관심분야다.

이런 논쟁들은 나쁘지 않으니 그리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니 심각해 지지 말자. 단 문재인이든 특정 이념이든 '살아낸 시절'이든 예속되지만 말자.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주인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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