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환경을 따르다 보니 현재의 나에 이르렀습니다" (상)
"주어진 환경을 따르다 보니 현재의 나에 이르렀습니다" (상)
  • 서상희
  • 승인 2017.05.25 0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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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 인터뷰
김동찬 대표는 20년의 세월을 한인 사회 풀뿌리 운동에 헌신해왔다.

풀뿌리 운동에 전념한 20년의 세월, 김동찬 대표(시민참여센터)는 주어진 환경을 따라가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1996년 한인유권자센터를 설립하고 시작한 유권자등록운동. 플러싱에서 이 운동을 시작할 때 한인 유권자 수는 6%에 불과했지만, 20년이 지난 현재 이를 65%까지 끌어올렸다. 뉴욕 동포 사회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쌓아온,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이 모여 이룩한 눈부신 결과이다.

경북 칠곡 태생의 김 대표는 어린 시절 기억이 많지 않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들어오고, 6학년이 되어서야 도로가 포장될 정도로 시골이었던 고향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한 여름 모기장에서 손님이 사온 수박을 기다리던 어렴풋한 기억만 있어요. 무엇에 기분이 상했는지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던 그런 추억.”

김 대표는 세 살쯤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허리가 아팠다. 동네 사람이 목화씨를 술 담아 먹으면 좋다고 해서, 이를 따르다가 간이 망가졌고 결국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그는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 3 담임교사가 경북대 보다는 서울 소재 대학이 앞날에 나을 것이라며 건국대를 추천했다.

“대학은 대구에 있는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등 세 곳만 알고 있었어요. 건대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담임이 가라고 해서, 이런 대학도 있네,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지원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올라온 서울, 그리고 대학. 김 대표의 삶에 가장 아로새겨진 시간이 대학에 다녔던 20대 초중반이다.

화공과 85학번인 그는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86년부터 극동정유(현대정유)에서 파타임으로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학생운동과는 거리를 둔 삶을 살았다. 

“86년 건대 사태 때, 주위 친구가 많이 잡혀 갔어요. 운동권도 아니었고 순진하고 착한 친구들이었는데, 경찰이 마구잡이로 잡아 갔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학교 분위기는 전투적으로 변했고, 잡혀갔던 학생 대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운동권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발생한 이 사건을 경찰과 공안당국이 짜놓은 시나리오에 학생들이 엮였다고 평가한다. 전두환 정권이 연합집회에 참석한 학생들을 이용해 민주화 운동의 확산을 막고, 정권유지를 위해 이 사건을 유도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 대표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이 사건으로 “열 받았다.”

김동찬 대표는 뉴욕으로 유학 오면서 한인 사회 풀뿌리 운동을 시작했다.

87년 그는 신의 아들이 되었다. 김 대표는 군대를 가기 위해 휴학을 하고, 다니던 회사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했다. 신체검사를 받고 동사무소에 신고를 하러가니, 직원이 재직증명서를 제출하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부선망독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살고 있는 그는 군 면제에 해당됐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친구들이 신의 아들이라며 부러워하는 분위기였어요. 당시 군대 안가는 방법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선배들도 정확한 법은 몰랐었는지, 다들 놀라워했지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된 87년 6월 항쟁은 당시를 살았던 의식 있는 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2016~17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와 버금가는 규모의 87년 6월 항쟁에 김 대표는 주말이나 퇴근 후 참여했다.

“일을 해야 해서, 친구 따라 시위에 참여하곤 했습니다.”

그는 복학을 하고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일도 그만뒀다. 김 대표는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붓글씨에 관심이 많아 서도회에 속해 있었다. 총학생회는 그에게 플래카드를 써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는 총학생회 홍보부에서 플래카드 글씨를 쓰게 됐다.

“건대 사태로 열을 받았고, 87년 6월 항쟁에 참여하면서 사회 부조리에 눈을 떴어요. 물론 기존 운동권 학생들처럼 체계적으로 학습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글씨 쓰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해서 들어주었고, 하다 보니 공대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며 학업을 마쳤다.

“주변 상황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고 이념에 투철한 운동권 학생과는 다르게 대중적이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학교 측이나 관할 경찰서와의 협상을 전담했어요.”

성격이 유한편인지 물었다.

“굳이 싸울 일이 무엇이 있겠어요. 당시 관할서 경찰들과 친해서 학생들이 오해를 하기도 했지요.”

김 대표는 졸업 후에 이 것 저 것 도전하다가 사촌형이 하던 소프트웨어 사업을 도왔다. 컴퓨터의 매력에 빠져 더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고, 이 결정이 그가 뉴욕에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 시초가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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